1. 여자-공부하는 여자
이 책은 『빨래하는 페미니즘』이 보여준 ‘여성주의 고전 다시 읽기’의 포맷을 가지고 있다. ‘앎으로써 삶을 바꾸는 나의 첫 페미니즘 수업’이 부제인데, 제일 부러운 부분은 ‘삶을 바꾸는’의 ‘실천’에 있다. 저자는 스테퍼니 스탈처럼 대학원에 진학해 여성주의 강의를 들으며 페미니즘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페미니즘 책을 꽤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들을 ‘새로’ 발견했다. 이를 테면, 제목만 알고 있던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제목도 표지도 가벼운 느낌이라 ‘쉬운(?)’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쉽게 쓴 책이 아니었다.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의 저자 하루카 요코는 5년 치 문헌을 한꺼번에 읽고, 남들이 한 번 읽을 시간에 세 번을 읽고, 3년 동안 자정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쉬지 않고 책을 읽어가며 그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25쪽). 뜨거운 열정과 강인한 체력에 큰 박수를 보내며 같이 읽기를 시작한다.
여성주의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다른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는게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페미니즘 개념이나 관련되어 있는 사실에 대한 설명, 그에 대한 비판들이 비교적 쉬운 언어로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어, 저자의 바람처럼 페미니즘 공부를 위한 최적의 지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게 된 계기 혹은 여성주의를 공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써 내려간 문장이 특히 좋았다.
무언가 이상했던 것, 내가 경험한 것과 그것을 설명하는 와중에 이상하게 불편했던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의 아귀가 맞아나가듯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의 상처가 만들어지게 된 사회문화적 조건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상처로만 생각하던 기억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침묵시키려 하는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67쪽)
2.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1, 2
출생의 비밀이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는 건 좀 뻔한 것 아닌가, 너무 쉽게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출생의 비밀만큼 효과적인 도구는 없을 것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양보한다. 반납하면서 캡처해 둔 문단은 여기.
용인되는 전공은 오로지 의학이나 법학뿐이었다. 다만 정말로 머리가 나쁜 경우라면 회계학 정도를 전공하고 말았다. 학교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가족에게 수치를 주는 일이었으니까. 그 후에는 전공한 일을 해야 했다. 그것도 최장 3년이었다. 그러고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또는 의대를 졸업했으면 스물여덟에 괜찮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야 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아이를 갖기 위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이쪽 배경의 여자들에게 정부는 공식적으로 셋 이상의 자녀를 가지라고 권장했으며 그 중 최소 둘 이상은 남자아이여야 했다. 그 후의 삶은 갈라 파티, 컨트리클럽, 성경 공부 모임, 가벼운 봉사 활동, 브리지 카드 게임이나 마작 등에 참여하고 여행을 다니며 (희망컨대 줄줄이 이어지는) 손자 손녀들과 시간을 보내다 조용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엘리트계층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삶은 이렇게 고정화되어 있다. 부모가 정해준 학교에서, 정해진 전공을 공부하고,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셋 이상 낳아야 하고 아들을 둘 이상 낳아야 한다. 화려한 내면 뒤의 삶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여자로서의 삶, 여자라는 종으로서의 삶.
3.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읽기’ 독려 차원에서 읽었다. 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제2의 성>의 쪽수는 <제2의 성>을 읽어야 더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왕따라고는 할 수 없으나 외톨이라 할 만한 보부아르에게 친구 자자(엘리자베트 라쿠앵의 애칭)의 존재는 구세주와 같았다. 아주 작은 숨구멍이었지만 그래도 그 숨구멍으로 숨쉴 수 있었다. 정해진 틀 안에 가두어 두고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시몬의 엄마처럼 자자의 엄마도 딸이 자신이 계획해준대로 살아가길 원했다. 자자는 시몬처럼 반항하지 못 했고 갈등과 번뇌 속에 결국은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시몬은 자자의 죽음으로 자신이 자유를 얻게 된 거라 생각했다. 친구의 죽음으로 얻게 된 자유. 시몬 드 보부아르가 한 사람 이상의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시몬은 자자의 삶까지 살았다. 구하라, 예쁜 아이 구하라의 말이 생각나 또 한없이 슬퍼진다.
4. 제2의 성
꼴등이 싫어 어깨에 매었던 배신자의 멍에를 내려놓고 사뿐히 다시 267쪽으로 돌아왔다. 정약용 선생님과 조선천주교회사에 대한 책 2권을 빼고는, 다른 책도 안 읽고 열심히 읽고 있는데 왜 이리 진도가 안 나가는지 모르겠다. 하긴, 400쪽이나 600쪽이나 900쪽이나 상관 없다. 내 목표는 오직 932쪽. 932쪽이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혼자 피식 웃는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사실 그대로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 서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헤어지기 아쉬워 붙잡던 손을 간신히 놓고 계단으로 내려서는 찰나, 지하철 셔터를 내리는 역무원을 봤다. 역대 최강의 길치인지라 떨리는 가슴을 토닥이며 괜찮을거야, 일단 나가보자 속으로 말하며 사람들을 따라나선 길에서는 의외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처럼 막차를 놓친 지구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지구인들이 참 많았다. 유쾌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