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을 때, 나는 꼬꼬마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어리기는 해서,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전 세계적인 혼란과 충격이 어떠했을지 잘 모른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보니 마르크스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저녁. 내 말은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던 친척언니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회주의만이 살 길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내게, 언니는 차분히 말했다. 그래, 젊었을 때 사회주의에 경도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런데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때 언니가 고3, 나는 중1. 사회주의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유도 근거도 알지 못했다. 지금도 뭔가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나는 사랑하는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3권 『화폐라는 짐승』에 발이 묶여 고병권을 읽지 않고 이 여름을 보냈다. 만나지 못했고, 만나지 않았으며, 만날 기회가 없던 그 이름을 이제야 만난다. 마르크스. 페미니즘 책에서 만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1.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이 책은 콜론타이, 체트킨,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을 엮은 것인데, 이 중에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토대>만 읽었다. 어제가 반납일이라 급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제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여도 그들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현재의 경제, 사회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그래야 여성이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투쟁에 나설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79쪽)
여성 노동자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고 ‘모든 여성이 공감하는 세상’에 대한 그럴듯한 설교에 속지 않는다. 노동계급 여성은 자신과 부르주아 여성의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부르주아 여성의 목표는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현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노동계급 여성의 목표는 낡고 쓸모없는 이 사회 대신에 보편적 노동과 동지적 연대, 기쁨과 자유가 어우러지는 희망찬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85쪽)
페미니즘의 핵심 주장에 다가갈 때마다 결혼의 허울과 굴레에 대해 듣고 읽을 때마다, 기혼 여성으로서 편하지만은 않다. 부자는 아니지만, 현재 사회적 계약관계에 의한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이기에, 어쩌면 콜론타이에 의해 ‘부르주아’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상황은 모르지만, 콜론타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보다 계급이 더 우선한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동지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찾기에만 급급했던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가장 공고한 벽은 성차별이고 가부장제이지만, 신자유주의 또한 그만큼 견고하고 잔혹한 장벽임은 분명해 보인다.
2. 다시 오지 않는 것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로 시작되는 시 “괴물”은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충격을 안겨줬던 시다. 이 시를 쓰며 그녀가 얼마나 몸서리 쳤을지 생각하면, 이 시를 발표해야겠다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아이고 아이고
날 좀 죽여줘
아직 멀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저는 어떡하구요?
쇠고랑 차요.
죽여 달라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놔주며
‘아직 멀었다’고 달래는 간호사 <옆 침대, 70-71쪽>
요양 병원의 늙은 어머니와 어머니 옆침대 할머니 이야기는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프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되어 있지만 언제 죽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고 싶다 말하기는 쉽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가장 큰 절망은 죽는 게 낫겠다고 여겨질 때. 폐부를 찌르는,이라는 뻔한 말로 쓰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시는 마음 속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찌른다. 막 들어온다.
3. 마틸다
어제부터 『Matilda』를 읽고 있다. 하루에 2챕터씩 읽는게 목표인데, 어제랑 오늘은 3챕터씩 읽었다. 작심삼일은 커녕 작심일일도 어려운 내가, 이게 웬일이냐. 『Matilda』를 읽고 『James and the Giant Peach』를 읽고 『The Witches』를 읽을 예정이다. 로알드달 쓰리 콤보 완성. 계획은 그렇다.
Mostly it was hot chocolate she made, warming the milk in a saucepan on the stove before mixing it. Occasionally she made Bovril or Ovaltine. It was pleasant to take a hot drink up to her room and have it beside her as she sat in her silent room reading in the empty house in the afternoons. The books transported her into new worlds and introduced her to amazing people who lived exciting lives. She went on olden-day sailing ships with Joseph Conrad. She went to Africa with Ernest Hemingway and to India with Rudyard Kipling. She travelled all over the world while sitting in her little room in an English village. (21)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었던 장소, 시간, 느낌, 냄새에 대한 추억이 있다. 책이 많지 않았던 우리집 책에 대한 내 기억은, 여름과 과학만화책 그리고 자두다. 긴긴 여름방학, 자두 하나를 씻어 손에 들고는 바닥에 엎드려 책을 펼친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만화로 구성되어 있던 20권짜리 과학책 전집. 과학의 원리, 실험결과, 과학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던 책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 책의 제목만은 또렷이 떠오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자두를 먹으며 책장을 넘기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마틸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핫초코 한 잔을 옆에다 두고 빈 집의 적막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긴 오후를 책읽기로 채운다. 가장 행복한 시간.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시간, 그런 시간을 마틸다는 보내고 있다. 책 속에 빠져서.
4. 여행의 이유
김영하의 책을 읽고는 실망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소설도, 에세이도, 강연 모음집도 모두 다 좋았다. 첫 번째 중국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을 알려주자는 취지로 재벌 기업들이 돈을 모아 소련과 중국으로 운동권 대학생들을 단체여행 보내주던 때, 김영하는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중국 여행에 동행하게 된 서대문경찰서의 안형사가 생애 처음일 것으로 보이는 해외여행에서 외톨이 신세임을 눈치챈다.
학생들은 그를 피했다. 천안문이나 만리장성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도 그는 좀처럼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뻘인 그가 그렇게 혼자 겉돌고 있는 걸 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가 찍어드릴까요?” (39쪽)
김영하는 관광지에 도착할 때마다 잊지 않고 그의 사진을 찍어준다. 후에 서대문경찰서의 그 형사는 김영하가 수배 대상이 되었음을 미리 알려주고, 나중에 체포되었을 때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조사받을 수 있도록 해, 김영하가 구속을 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영하는 만약 자신이 수배 당시 바로 검거되었다면, 경찰서보다 훨씬 가혹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면, 대학원 시험을 보지 못 했다면, 아마도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 예상한다. 다른 삶, 다른 운명으로 살아갔을 거라 추측한다. 어쩌면 한 마디 말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슬슬 피하는,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건넨 그의 한 마디. 제가 찍어드릴까요?
난처한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해본다. 나의 결말이 그의 것처럼 훈훈하고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도, 후일의 보답을 기약할 수 없더라도. 그래도 한 마디. 제가 찍어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