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쓰는 동안 가장 자주 받은 질문은 짧고 노골적이며 불쾌한 것이었다. “강간당한 적 있어요?”
나도 짧게 받아친다.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비슷한 질문을 받았지만 묻는 이도 나도 만족한 적이 없는 듯하다. 사람마다 질문하는 동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저자로서 자격이 충분한지를 이중으로 문제 삼기 위해 저렇게 질문한다. … 다른 이들은 고약한 호기심으로 뒤틀린 논리를 깔고 질문하지 않았나 의심된다. 강간에 대해 쓰기로 작정한 여자라면 어두운 개인사라든가 끔찍한 비밀, 실제든 상상이든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 과거 어느 시점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착, 자신을 평생토록 비틀며 세상을 향해 뭔가 고발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게 한 나쁜 경험을 갖고 있겠지. (4쪽)
강간의 경험이 있어야만 강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만 강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간의 경험이 있어야만 강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성만 강간의 피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강간에 대한 책, 강간의 역사를 추적한 이 책을 쓰는 동안 수전 브라운밀러에게 일어난 일이다. 강간당한 적 있어요?
페미니즘을 말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여성 억압의 근본인 가부장제는 페미니즘의 가장 큰 적이다. 가부장제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타파해야 할 거악의 최고봉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 들어와 있다.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할 때, 답은 섹스하지 않는 것,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이미 결혼했다. 경제적 독립을 추구할 수 없는 페미니즘은 역겹다고? 어머나, 나는 전업주부다. 동성애 혐오와 피터지게 싸우지 않는다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나는 이성애자다.
아무도 내게 토달지 않아도 나는 3-4개의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기혼이며, 이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인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페미니즘을 말할 자격이 없다. 비자격자이며 무자격자다. 하지만, 내가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해 버린다면, 그래서 소리내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이 공간을 차지할 될 것인가. 이런 질문/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강간당한 적 있어요? 강간당한 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나서는 거죠? 강간당한 적도 없으면서 왜 여자 편을 드는거죠? 그 여자들 다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에요. 그냥 강간당한게 아니라고요. 그 여자들 다 꽃뱀이에요. 돈 보고 그러는 거라고요. 뭣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설쳐요? 뭣도 모르면서.
뭣도 모르는 내가 페미니즘을 읽고 쓰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작은 내가 사는 사회가 여성을 제2계급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밝혀내는 것이고, 성, 인종, 계급, 국가, 지역에 따른 차별의 부당함을 논증하는데 있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사 그것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차용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즘적’ 태도로 말하고자 한다.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대안이 페미니즘 토양 속에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기까지>에서 저자와 주제가 짝을 이루는 과정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독자와 책이 짝을 이루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달의 짝궁은 이 책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