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가 구체화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통념이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진화해왔다,는 과학적 언설로 변형될 때, 여성과 남성의 다름은 차별의 준거가 된다. 모성을 강조하며 여성을 ‘어머니’라는 위치에만 고정하려 할 때, 모든 여성은 자격미달이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항상 ‘부족한’ 어머니일 뿐이며, 어머니이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정상 궤도를 벗어난 사람으로 여겨진다. 능력 있고 똑똑한 여성이 되라고 장려하지만, 그와 동시에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여성이 되라고 강요한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여성을 무능력하다고 비판하지만, 자신이 이룩한 경제적 독립을 향유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과소비의 화신이라고 비하한다. 여성 혐오의 방식 중 가장 비열한 것은 여성 신체를 대상화하며, 이런 활동을 예술이라 부르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는 것이다.
‘스너프’라는 용어의 정의는 “여배우를 실제로 고문하고 사지를 절단하고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또는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영화”다. 하드코어 스너프는 실제 살해 장면을 촬영한 영상물, 소프트코어 스너프는 실제처럼 재현한 살해 장면을 촬영한 영상물이라고 정의된다. (376쪽)
소프트코어 스너프는 교외 비디오 대여점에서 ‘호러’, ‘서스펜스, ‘미스터리’ 장르 영화로 이미 자리잡았다. 원조 <스너프>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실제로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백인 남성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 버클리 페미사이드 정보교환소의 보고서>를 쓴 크리스 도밍고는 “포르노그래피와 ‘연예오락’에서 진짜처럼 재현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실제 폭력이 서로를 부추기는 관계에 있다”(375쪽)고 주장한다. 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페미사이드가 현실의 페미사이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을 고문하고 사지를 절단하며 결국 살해하는 모습을 담은(혹은 그렇게 보이는) 영상물들은 시장을 통해 활발하게 유통된다. 이런 영상물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어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허셜 고든 루이스 감독은 1960년대에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내장을 빼낼 뿐 아니라 여성의 장기를 애무하는 장면이 담긴 고어 영화들을 통해 컬트의 지위에 올랐다. “… 우리는 여자들을 비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에 대한 찬양도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영화에서 여자들의 신체를 절단한 건, 그건 그렇게 해야 표가 더 잘 팔릴 것 같아서였습니다.”(408쪽)
결국은 상업적인 이유가 가장 주요하다. 돈이 되기 때문에, 팔리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여자들은 고문당하고 사지를 절단 당하며 살해당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좋아하고 찾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페미사이드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기는 광고계도 마찬가지다. <페미사이드 광고: 포르노그래피와 고어노그래피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치명적 폭력>에서 제인 카푸터는 주류 광고, 스타킹 광고 등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성의 잘린 머리를 향수병들과 나란히 바닥에 배치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향수 ‘쇼크 클레르’ 광고나 허리에서 잘린 두 다리가 공중에 뜬 채 벌어져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브 생로랑 스타킹 광고 등이다. 제인 카푸터는 이같은 광고들이 남성을 직접 선동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실제 성적 살인의 행동에 상응하는 고어노그래피 광고들이 여성의 신체 절단 이미지들을 매력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런 이미지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상화하고 합법화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짜처럼 보이는 페미사이드 장면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 그런 장면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사람들, 흥미롭다, 새롭고 의미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몇 명이나 포함될까. 여성이 고문당하고 성적으로 유린당하며 사지를 절단당하고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고양될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일까. 결국은 소비의 문제다. 스너프, 포르노그래피, 고어노그래피를 제작하고 유통시키며 소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여성혐오 역시 자유로운 예술 표현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스크린과 광고 속 여성들의 수난은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화면이 화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페미사이드 이상이 페미사이드 현실로 이어진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