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68쪽)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잭 리처의 능력이 내겐 없어서, 시작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다. 보통의 경우처럼 1시 5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끝나는 시간은 정확히 기억한다. 1시 27분. 핸드폰 시간을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있었다. 그리고는 굳이 자리를 빛내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굳이 자리를 빛내주시려 참석한 연단 위 인사들의 인사를 받았고(바둑대회인데 수영협회, 요가협회 회장님들이 왜 오셨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는 축사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또 한참이나 들었다. 365일 200% 충전 상태의 초등생들. 남자애들이 대부분인 장난꾸러기 아이들 백여명이 불편한 의자에 엉덩이를 얹고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1시 27분까지.
드디어 대회가 시작됐다. 어수선했던 체육관이 조용해졌다. 아이들도, 부모들도, 아이들의 동생들도. 심지어 공기마저도.
나는 장기를 둘 줄 안다. 체스도 둘 줄 안다. 하찮은 실력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 줄은 안다. 선을 따라 움직이는 장기와 칸을 따라 움직이는 체스. 전진과 좌우 이동이 가능하나 후진이 불가능한 졸과 마지막 연에 도달했을 때 화려하게 부활이 가능한 폰(Pawn)을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둑은 모른다. 인간과 인공지능 세기의 대결,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면서도, 흰 것은 흰 돌이요, 검은 것은 검은 돌이라 했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닥다닥 붙은 책상, 등받이도 없는 불편한 의자에 마주 앉아 대국을 시작하는 일군의 아이들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누군가 그리고 여기는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고야 만다.
네모난 나무판, 상하종횡 19줄의 선 위에 하얀 돌과 검은 돌을 교차로 놓으며 더 큰 집을 지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 내 앞의 에너자이저들, 차고 넘치는 에너지의 화신이 분명한 이 초등학생들을 일순간 고요하게 하는 이 게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내가 모르는 규칙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경기를 시작하는 이 진지한 아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약속과 규칙, 뜨거운 결전.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바둑돌을 드는 이 아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 그래서 내게는 완벽하게 가려져 있는 상상의 세계로 거침없이 다이빙하는 이 아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몰입해서 모든 경기를 지켜봤다. 나는 아이들의 전쟁터 단 한 곳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내뿜는 열기는 나를 그 경기 속으로, 경기 한 가운데로 초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싸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피엔스들이 마주앉아 가상 공간 속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한 손에 바둑알을 들고서.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