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페미니스트는 (남성에게) 무해한 개념녀라는 천사의 날개를 스스로 부러뜨리고 헬조선이라는 진창으로 추락한 존재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자기검열과 자기혐오의 족쇄였던 날개를 폐기해 버린 이들은 더는 가부장제 천당에 머무는 착한 천사를 꿈꾸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진창과도 같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관념적 자기만족에 머물던 페미니즘의 타성으로부터도 깨어났습니다. 스스로 ‘지옥Hell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그렇습니다. (28쪽)
나는 헬조선에서 가장 극렬한 전투 가운데 있는 헬페미니스트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가장 앞장 서 있는 그녀들에게, 그녀들의 용기와 헌신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해서, 더 많은 여성, 나를 포함한 더 많은 여성들의 삶이 1센티라도 전진하고 있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모먼트’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제약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했다. 내게 강요된 제약의 일부를 ‘82년생 김지영’처럼 무의식적으로 수용했고, 또 다른 일부는 내게 와서 닿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이었는지. 나는 결혼하고 나서야, 결혼 후에 남편과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위치가 완벽하게 다르다는 걸 인식했다. 9년 넘게 동거하다가 아이를 갖게 된 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말하던 퀘백의 소설가 니콜 브로사르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으면 물론 화가 나고, 그것에 저항하고, 현실을 바꾸는 일에 활발히 참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어머니가 되고 나서야 내가 여자임을,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음을 갑자기 깨달았어요. 또, 저는 임신을 했을 때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케이트 밀레트의 『성 정치학』을 읽었어요. 물론 많은 여자들처럼 저는 페미니즘이 제 인생을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207쪽)
『여성의 신비』가 내게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책이 지닌 한계, 그 책의 저자가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내 안의 고민을 밖으로 꺼내어 주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그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 속에서, 나는 왜 만족하지 못 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다른 여자들은, 다른 엄마들은 다들 그렇게 적응하고 사는데, 나는 그게 왜 안 되는가. 왜 계속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다른 책들은, 내가 읽었던 다른 책들은 설명해 주지 못 했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의자 커버를 씌우면서, 아이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이들을 소년단과 소녀단으로 태우고 다니면서, 그리고 밤에 남편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이 조용한 물음 –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 을 자신에게조차 던지기 두려워했다. (54쪽)
가사노동에 대한 깨달음은 실비아 페데리치에게서 왔다.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이 각별한 이유다. 재료를 준비해 음식을 차리고, 차린 음식을 먹고, 먹이고, 치우고, 정리하고. 빨고 널고 개고 정리하고. 털고 밀고 닦고 정리해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다. 전업주부. 전업으로 주부. 주부의 일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사람. 하는 일의 대부분이 가사노동인 사람. 일하고 있는데도 사회적으로 나는 ‘노는’ 사람이다. 나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 나는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이다.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한가한 소리, 배부른 소리라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게 두려웠다. 돈을 버는 일과 돈이 되지 않지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을 동시에 할 만한 체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정희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앎의 위치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앎은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나의 욕망과 현실, 그리고 나의 사회적 위치가 정해준 영역 안에서 사고하고 판단한다. 서울에 사는 비장애인. 가부장제에 편입한 기혼 여성. 이성애자이며 기독교인. 그리고 전업 주부.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만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이 워낙 스펙트럼이 넓고 방대한 학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가내부불노동’, ‘노동으로서 가사 활동’이다. 큰아이 출산 후 현재까지 전업 주부로 살고 있는 현재의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다면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싶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이런 기사를 보게 됐다.
문 잠갔는데 뚫렸다… 여자 화장실 ‘구멍’의 진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52308303973371, 머니투데이 2018. 5. 27>
여자화장실 문짝 안쪽으로 의심스러운 구멍들이 있는데 남자화장실은 ‘깨끗’하다는 기사다. 새로 지어져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여자화장실에만 구멍이 나 있다. 신촌의 편입학원, 여행사가 밀집한 종로 빌딩, 컴퓨터 학원이 위치한 강남 빌딩. 시공업자들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백여개의 구멍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단은 여기인데 차마 옮길 수가 없어 사진으로 대신한다. ‘여자에게 기눌릴 땐 화장실 몰카를 봐라’의 글 중 일부다.
방향 없이, 목표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페미니즘 공부이지만, 복수 전공해도 된다면,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있어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연구에 더해, 여자에게 기눌릴 때 '화장실 몰카를 보며 자신감을 회복'한다는 그 심리를, 그 해괴한 심리를 추적하고 싶다.
인간은 언제 인간인가.
가장 사적이며 가장 내밀한 공간에 침투해, 배설의 순간을 엿보며 내면을 안위하려는 그 심리는, 그러한 인간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뭔가.
언제 인간인가.
언제 인간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