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화어 수업 - 다음 세대를 위한 요즘 북한 말, 북한 삶 안내서
한성우.설송아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8월
평점 :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공부했던 영어 교재나 제2외국어 교재는 주요 인물을 설정하고 그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 대화에서 사용된 단어와 표현들을 익히는 형식이었다. 『문화어 수업』은 ‘수업’이라는 제목에 맞게 이런 외국어 교재와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 평양에 1년 동안 체류하게 된 남한의 방언학자 ‘한겸재’와 그의 가족(저자 자신과 가족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들이 북한의 미대 교수 ‘리청지’ 가족과 함께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더 자세히 보면 ‘식사 시간’, ‘교통수단’, ‘학습 용어’, ‘두음법칙’ 등 20개의 주제에 대한 단어와 표현, 그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국어 교재처럼 대화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문화어에 대한 설명이 녹아 있는 모습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방언학자 한성우 교수의 전작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앞의 책은 우리 음식과 관련된 우리말을, 뒤의 책은 우리 대중가요 가사 속 우리말을 탐구해 보는 책이었다. 이 책들에서 한성우 교수는 우리말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나갔는데, 『문화어 수업』에서도 특유의 이야기 솜씨를 발휘한다. 앞의 책들과 달리 각자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고 같이 뭔가를 하며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니 더 흥미롭다. 공저자인 북한 출신 설송아 기자는 상자 글에서 본문을 읽는 데 참고할 만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의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밥상 구성, 주택 상황, 교육 제도 등 북한의 현재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화어가 남한의 언어와,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제의 각을 뜨자’ 같은 과격한 북녘 언어는 구호나 뉴스에서나 쓰이지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대화를 하면 대부분은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가끔 귀에 걸리는 낯선 어휘들도 맥락을 살피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서 들어온 옷가지들을 장마당에서 사 입고, 젊은이들은 몰래 남한 아이돌의 노래를 듣는다. 심지어 남한 젊은이들처럼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20강 내내 줄기차게 이야기한다. 남과 북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많고, 다른 점마저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한겸재 교수의 딸 슬기와 리청지 교수의 딸 예리는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맞춤법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의 뜻을 맞춰보는 놀이를 할 정도로 편안하게 서로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한겸재 교수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언어의 미래를 본다. 통일이 된 이후 무조건 한쪽을 기준으로 삼아서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맞출 수는 없으니, 우리도 북한의 어문 규정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할 것이다. 맞춤법을 잘 알아야 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어문 규정을 다시 배우는 게 번거롭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내 것에 맞추라고 강요할 권리는 내게 없다. 한겸재 교수(의 입을 빌린 한성우 교수)의 말처럼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남는 말들, 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규칙들을 잘 활용하면 될 일이다.
이 책은 왜 남한에서는 두음법칙을 쓰고 북한에서는 쓰지 않는지, 남한과 북한에서 한글 자음, 모음을 부르는 명칭이 왜 다른지, 남한의 이 단어가 북한에서는 어떤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지 같은 남북 언어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지식들을 전달한다. 하지만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임을 책 전체에 걸쳐 강조한다. “남북의 말 차이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사례가 뭔가요?”나 “북한말 중 재미있는 사례 몇 개만 들어주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런 질문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바람처럼 남북 사람들이 서로의 언어를 우스꽝스러운 흥밋거리로 여기기보다는, 같은 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다른 점들을 수용하고 조화시켜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