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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ㅣ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 우려되는 것이 있다. 두 분야의 균형과 전문성이다. 두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만든 책이라면 두 분야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각 분야의 전문성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와 다른 분야를 접목해서 책을 쓰면, 다른 분야는 그냥 곁들이는 수준이 되거나 다른 분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 현직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의학과 미술사를 접목한 책『미술관에 간 의학자』를 읽으려 할 때도 이런 우려가 들었었다.
다행히 미술사와 의학의 비중은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 페스트, 디프테리아, 수면장애, 도박 중독 같은 의학적 주제를 미술 작품과 엮어서 설명하는데, 하나하나가 그 주제에 대한 처방전과 같은 느낌이다. 의학에 있어서는 전문 지식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미술사에 있어서는 교양 수준의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달한다. 미술 작품을 그저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삽화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이력,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시대적 배경, 기법의 특징, 그 당시의 미술 사조까지 미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맹인을 이끄는 맹인>, 1568. 저자는 이 그림 속 시각장애인들을 관찰해 누가 어떤 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는지 분석한다.
단순히 배경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눈으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어 흥미롭다. 저자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맹인을 이끄는 맹인> 속에서 묘사된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이 각각 어떤 병으로 시각을 잃었는지 분석해낸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디프테리아>에는 호흡 곤란을 겪는 아이를 돕기 위해 손가락으로 아이의 목구멍을 벌리려고 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하면 목구멍의 기도 점막을 자극해 림프가 더욱 부어올라서 아이는 숨을 더 쉬기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의 의료 기술을 생각해 보면 그림 속 아이는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의학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의학적 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압생트 중독으로 인한 황시증으로 별 주위의 노란 별무리가 보였을 것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저자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 통설을 반박한다.
인문 교양서 중에는 그저 대중 독자들이 흔히 알고 있는 통설만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통설에만 기대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한 반 고흐의 작품들에는 노란색, 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빛무리가 많이 나타나는데, 반 고흐가 즐겨 마셨던 술 압생트 때문에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통설이 있다. 하지만 별 주위에서 빛무리가 보일 정도가 되려면 182리터 이상의 압생트를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1997년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복용하던 간질약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한다. 스탕달에게 ‘스탕달 신드롬(미술 작품과 교감한 관람객이 흥분과 자아 상실을 경험하는 현상)’을 일으킨 작품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가 자기 가슴을 물게 해 자살했다는 것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환상이 반영된 가설일 뿐이다, 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미술 작품과 의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을 경어체로 서술하고 있어 더욱 더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보며주면서 그림과 관련된 병이 어떤 것인지, 그 병은 어떻게 예방하면 되는지, 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치료하고 몸 관리를 하면 되는지 처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이야기를 듣듯 편안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다만 고유명사 표기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귀스타브Gustave’로 표기해야 하는 이름을 자꾸 독일식 표기인 ‘구스타프’로 표기하고 ‘알렉상드르Alexandre’를 ‘알렉상드로’로 표기하며 ‘마네트 살로몽’의 원어 표기를 ‘Manette Salomon’으로 제대로 적어놓고도 계속 ‘마네트 랄르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스페인인인데 영어식으로 ‘프랜시스 고야’라고 표기한다. 동성애자라고 분명히 밝혀진 사람은 20세기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인데 17세기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동성애자라고 적어 놓는 오류도 보인다. 모차르트의 사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모차르트가 매독 치료를 위해 수은을 치료제로 사용하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즐겁게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것도 많은 인문 교양서이다. 미술 작품에서도 의학적인 사실들, 의학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미술사 지식과 의학 지식들을 함께 쌓아가는 것이 즐겁다. 미술관과 병원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