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달리기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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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열심히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원작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원작 소설의 두 주인공 캐릭터를 바탕으로 해서 가족, 친구, 지인 등 조연 캐릭터들을 새로 만들어낸 반면, <오월의 청춘>은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들을 조연으로 삼고 그들을 바탕으로 주인공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원작의 주인공 명수의 두 여동생 명옥과 명신을 지우고 그 자리에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누나 명희를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넣었다. 명수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정태에게는 사이가 껄끄러운 형이 있는데, 이 인물은 희태라는 남주인공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드라마는 명희와 희태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원작의 주인공인 명수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원작을 읽으면서 드라마가 원작에서 이런 부분을 가져왔다는 것이 조금씩 보여 흥미롭게 읽었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속 정태(최승훈)과 명수(조이현)의 모습


  드라마가 1980년 5월을 살아갔던 광주의 청춘들을 다루고 있는 반면, 소설은 소년체전을 준비하기 위해 그때 광주에 모였던 아이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남 대표 1000미터 달리기 선수로 뽑힌 명수와 정태, 둘과 합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친구 진규와 성일, 네 명의 소년들이다. 명수와 정태, 진규는 열세 살이고 성일은 열두 살. 고된 훈련에 지치고 좀처럼 넘기 힘든 자신의 한계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아이들은 같이 울고 웃으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1980년 5월 18일, 코치와 감독 몰래 광주 시내로 놀러나간 아이들은 뜻밖의 참혹한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5 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주요 장소들. 광주천을 중심으로 가까이 모여 있다.


  소설에 나오는 지명들을 지도 앱에서 찾아가며 주인공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은 지도 속 하늘색 띠, 광주천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명수의 아버지는 명수를 합숙소에 데려다주는 길에 양동시장에 들러 새 운동화를 사준다. 아이들의 합숙소로 쓰인 여인숙은 사직공원 담장 앞에 있다. 아이들이 휴일을 제외하면 매일 가서 훈련했던 무등경기장은 사직공원에서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거리. 아이들은 매일 아침 뛰어서 무등경기장까지 갔으니 그보다는 시간이 약간 덜 걸렸을 거다. 아이들은 18일 오후 광주공원으로 놀러갔다 시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진압하는 공수부대와 마주친다. 광주천 건너편, 지금은 철거된 옛 적십자병원에서는 시위 중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했고, 옛 전남도청에는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모셔두었다. 전남도청과 지금의 광주 지하철 금남로4가역, 금남로5가역을 가로지르는 금남로는 5 18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주인공들이 훈련하고 먹고 자고 노는 공간 중 대부분은 실제 광주 시내에 있는 장소들이다. 작가가 장소에 대해 고증과 설정을 꼼꼼히 한 덕분에, 주인공들과 함께 광주 곳곳을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5 18의 진행 상황도 사건 전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5 18이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위가 일어나니 돌아다니지 말고 몸 조심 하라고 주의를 준다. 휴일인 일요일이라 광주 시내로 놀러나왔던 아이들은 광주 시내에서 시위하던 사람들과 진압하러 온 공수부대와 맞닥뜨린다. 아이들은 온갖 험한 일들을 목격한 뒤 간신히 합숙소로 돌아오고, 감독과 코치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합숙소에서만 지내게 한다. 그러나 합숙소 밖의 끔찍한 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튿날인 19일, 비 내리는 밤에 아이들은 방에서 조잘조잘 속마음을 털어놓고, 21일에는 시외 전화가 끊겨 광주 밖이 집인 아이들은 가족들과 연락하지 못하게 된다. 그날 오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을 듣고 코치는 분개한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5 18 민주화운동의 진행 상황과 그때 날씨까지 정확히 고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욕설, 전남도청에 줄을 지어 누워 있는 시신들과 그 시신들 앞에서 통곡하는 가족들까지 이 소설은 숨김 없이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주인공 아이들에게나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나. 참혹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멋있게만 보였던 군인 아저씨들이 사람들을 해칠 리 없다고, 김일성이 보낸 북한군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그들이 정말 우리 군인이라는 진실에 당혹스러워한다. 게다가 생각지 못한 비극과 위험이 아이들에게 닥쳐온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일의 말대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우정을 나누면서 함께 씩씩하게 이 비극을 헤쳐나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거대한 폭력을 힘으로 이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살아남고 연대하고 기억할 수는 있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무기이다. 5 18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 5 18을 학교에서 배웠지만 실감하지는 못하는 아이, 또는 어른에게 이 책은 살아남고 연대하고 기억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이 책 자체로 5 18에 대해 배우고 느낄 수 있고, 드라마를 본다면 드라마에서 덧붙인 서사와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는 원작만의 서사를 모두 돌아보며 더 풍성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5 18 당시의 상황이 다음 주부터 나온다. 주인공들 위주로 사건이 전개되니 이 책 속 아이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모두 나오지는 않겠지만,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더욱 빛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와 사랑, 우정이라는 메시지가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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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21-05-30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인데 원작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청춘들의 용기와 열망, 벗들 사이의 우정과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 등이 애잔하게 그려지는 드라마 다음 주가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스티안 2021-05-30 15:10   좋아요 0 | URL
원작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원작을 아주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깨알같이 원작 속 내용과 설정들을 조금씩 가져왔고 ‘평범한 사람이 겪은 5 18‘이라는 주제와 정서는 그대로 가져와서, 드라마를 보신 분이라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다음 주부터 드라마에 5 18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맞서 나갈지 궁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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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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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7년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에는 미성년자와 성인 사이의 성관계를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공개 서한이 실렸다. '아이들은 폭력의 희생자이기는커녕 스스로 동의했다고 법정에서 밝혔다'면서. 68 혁명(1968년 프랑스에서 기성 세대와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던 시민 혁명) 이후 70년대 프랑스에서는 모든 육체가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려야 한다는 풍조가 일어나면서 청소년의 성생활을 막는 것을 사회적 억압으로 보는 시각까지 생겼다. 이 공개 서한도 그런 풍조의 일환이었다. 14살 소녀 바네사 스프링고라를 연애라는 명목으로 성적, 정신적으로 학대한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도 그 서한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바네사는 수십 년 뒤 자신이 겪은 폭력을 자전적 소설로 기록해 출간했다. 그 소설이 『동의』이다.

바네사는 자신이 어떻게 마츠네프의 덫에 걸려 들었는지, 마츠네프의 손아귀에 있는 동안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이야기하고, 마츠네프에게서 벗어나서 온전히 홀로 서기 위해 방황했던 날들을 이야기한다. 이혼한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로 외로웠던 바네사는 잘생긴 데다 유명 작가인 마츠네프가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애정을 표시하자 그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50살이나 먹은 남자가 14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유혹한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바네사가 아직 마츠네프의 진짜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도 그의 추악함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고대에는 어른이 젊은이로 성으로 인도하는 일이 의무였다는 궤변과, 어린 바네사와 성관계를 맺으려고 늘어놓는 온갖 사탕발림들 속에서. 독자들은 그의 추악함을 눈치챘지만 바네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해도 더욱 강해지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계속되면서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고, 바네사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네사를 매혹시켰던 그의 탄탄한 몸매와 매끈한 피부는 겉멋 부리기의 결과였고, 그는 자기 외모뿐만 아니라 바네사의 외모까지 관리하려 들었다. 그는 바네사가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콘서트에 가는 것도 반대하고, 모든 생활을 통제하려고 들었다.

마츠네프가 바네사를 어떻게 통제했는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둘이 함께 작문 과제를 하는 장면이다. 마츠네프는 자신이 젊은 시절 승마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뽐냈던 일을 자랑하며, 그 이야기를 받아 적어서 작문 과제로 제출하라고 한다. 바네사가 거부하자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거냐고 상처 받은 척하고, 네가 쓴 것처럼 보이게 쓸 수 있다고 구스른다. 결국 바네사는 마츠네프의 글을 받아 적어 과제로 제출하고 좋은 점수를 받지만, 그것은 바네사의 글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을 잃어간다. 작문 과제뿐만 아니라 그와 주고받는 편지까지 그의 문체와 닮아갔다. 바네사는 그 후 자신뿐만 아니라 마츠네프와 연인 관계였던 소녀들이 하나같이 그와 같은 문체로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네사는 마츠네프가 상상 이상으로 추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출장을 간다고 하고 거리에서 다른 여자아이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마주치고, 그가 쓴 소설과 일기에서 그가 필리핀에서 열한 살짜리 어린 소년들과 성관계를 가지고 난교 파티를 즐겼다는 대목을 발견한다. 바네사는 자신이 그에게 결코 특별하지 않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도 그의 추악한 행동에 가담한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워하고 빠져나오고 싶어했을 때, 아무도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부모도 친지도 선생님도.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기에, 바네사는 스스로 마츠네프를 떠난다.

마츠네프를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곧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츠네프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눈총을 견디기 힘들었고, 자기 자신에게 죄인, 낙오자, 창녀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때에도 스스로가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도구,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헤어지고 나서 10여 년 동안 마츠네프는 바네사를 모델로 한 소설, 바네사가 보낸 편지들을 포함한 일기, 서간집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바네사는 자신이 채 형체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그가 자신을 말들의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을 깨닫고, 문학 자체에 환멸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바네사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대학에 진학했고, 출판계에서 경력을 쌓아 출판사 대표가 되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도 낳고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츠네프는 계속해서 바네사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려고 했다. 그는 자기 전기를 출간하겠다며 바네사의 사진을 실어도 되겠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바네사의 사진을 포함한 옛 연인들의 사진을 자기 공식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심지어 길이 남아야 할 문화유산인 양 바네사의 편지가 포함된 연애 편지들과 원고를 출판 기록물 연구소에 기증했다. 출판사 편집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을 가까이 했던 바네사는, 마츠네프를 통해 책과 문학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바네사는 오히려 책과 문학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복수를 한다. 마츠네프의 추악한 진실은 『동의』로 박제되었다.

2013년 에세이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으면서 마츠네프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술 작품을 그 아름다움이나 표현력이 아니라 윤리성 혹은 비윤리성을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한 바보짓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과 명성을 위해 아이들을 성적, 심리적, 문학적으로 착취하는 그를 보면서 바네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문학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가?"

나는 단호히 답하겠다. 문학이, 예술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예전에 한 교수님은 예술가들은 우리와 피 자체가 다르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가 또한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어떤 예술도 인간의 존엄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마츠네프가 문학상을 받고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게 지금의 현실이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문학, 예술 뒤에 숨어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세상은 점점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동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과 예술은 피해자가 반격을 하는 데에도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동의』는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아 오던 작가 마츠네프가 사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욕망을 쏟고 그들을 통제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마츠네프가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피해자들의 신상과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의 행적을 기록한 이 책도 남아 사람들이 그의 추악함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와 세상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가하는 폭력을 견디면서 더욱 단단해졌던 바네사의 품위와 존엄함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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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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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고 때로는 신랄한 문체 안에서 자신을 착취하던 가해자의 민낯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의 위선과 한심함을 가차없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그와 그를 추앙하는 세상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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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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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 때 회의감을 느낀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바르게 살아야 할까.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먼데 왜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할까. 미국의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니클의 소년들』을 읽으며 그 질문의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니클의 소년들』의 주인공 엘우드 커티스는 선하고 정의롭기에,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기에 더 고통받았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1960년대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민권 운동가들이 인종 차별에 저항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는 흑인이었고,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특히 심한 남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사업을 하겠다고 집을 나간 부모 대신 외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흑인이라 받는 차별과 모욕은 일상이었다. 백인 아이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놀이공원에 흑인 아이들은 입장할 수 없었고, 백인 학교에서 보낸 중고 교과서에는 '죽어라, 검둥이' 같은 욕설이 잔뜩 적혀 있었다. 가난과 차별, 폭력 속에서도 그는 올곧고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고, 온 동네 사람들이 그의 장래를 기대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또래들과 달리, 엘우드는 대학에 진학하고 민권 운동에 참여해 흑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 못한 불행이 닥쳐왔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고등학생을 위한 대학 강의를 들으러 가던 길에, 엘우드는 한 흑인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하필 그 차는 도난 차량이었고, 엘우드는 흑인이고 그 차에 탔다는 이유로 차 도둑과 공범으로 몰렸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모범생 엘우드는 하루아침에 소년범이 되어 니클 아카데미라는 소년원으로 끌려갔다.

  심지 굳은 엘우드는 절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착실하게 생활하면 빨리 출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 엘우드의 상식이었으니까. 문제는 니클이 그런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엘우드는 니클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작고 약한 하급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엘우드가 그들을 막아섰지만, 백인 교사들은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가죽 채찍으로 수십 대나 때렸다. 니클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용소였고, 교사들은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과 차별당하며 더 심한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니클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히거나 학교에 불이익을 입힌 학생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어 학교 뒤편 비밀 묘지에 묻혔다.

  니클에서 일어나는 일은 법적으로도, 엘우드의 가치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고 묵인한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엘우드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어설 수 있다고 동급생 터너에게 말하자, 터너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서도 살아남는 요령은 밖에 있을 때랑 똑같아. 남들이 어떻게 구는지 보고, 장애물 경주를 하듯이 놈들을 피해서 돌아가는 길을 알아내는 거지. 여기서 걸어 나가고 싶다면."(p. 108.) 터너는 니클에서 자신만의 요령으로 버텨 왔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산 덕분에 한 번도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고, 제일 쉽고 편한 일을 맡았다. 일을 하기 싫을 때는 숨겨둔 가루비누를 먹고 병동으로 실려가 며칠씩 쉬고 왔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엘우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엘우드와 터너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니클에서의 삶을 버텨냈다.

  바로 곁에서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아이들이 새벽에 끌려가 폭행당하거나 성적으로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해도 일상은 흘러갔다. 엘우드도 이제는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엘우드의 내면은 위축되고 망가져 가고 있었고, 엘우드는 그렇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형량을 채우거나 열여덟 살이 되면 이곳을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엘우드는 조용히 니클을 졸업하는 대신, 니클 자체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정부에서 보낸 감사관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 니클의 실상을 폭로하는 쪽지를 전달하겠다는 엘우드의 말에 터너가 경악하자, 엘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틀렸어, 터너. 이건 장애물 경주가 아니야.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돼.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야 돼."(p. 218.)


  터너는 엘우드가 니클에 순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내면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엘우드에게 영향을 받아 왔다. 그는 대책 없이 이상만 좇는 엘우드가 짜증나기도 했지만 엘우드가 누구보다 굳건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 교사의 심부름 때문에 엘우드가 쪽지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터너는 감사관에게 신문을 건네는 척하며 그 속에 쪽지를 넣어 전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엘우드와 터너는 목숨을 걸고 감사관에게 쪽지를 건넸지만, 니클 문제는 몇 주 동안만 의회에서 논의되고 곧바로 잊힌다. 쪽지를 쓴 것이 엘우드라는 것이 밝혀지자 백인 교사들은 엘우드를 채찍질한 뒤 3주 동안이나 독방에 가두었다.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엘우드마저 누구도 자신을 위해 와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다. 좌절할 때마다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킹 목사의 말을 떠올리지만,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다. 그때 터너가 나타나 엘우드를 독방에서 구출한다. 그리고 함께 니클을 탈출한다.


​  두 소년 모두 무사히 탈출하고 살아남았다면 이 소설은 완벽하게 희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소년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했던 터너였다. 소설의 1부에서 그렇게 공을 들여 니클에 오기 전 엘우드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게다가 3부에서는 성인이 된 엘우드의 시점과 아직 니클에 있는 엘우드의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사람이 터너일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도망을 쳤지만 엘우드는 그들을 추격해 온 백인 교사의 총에 맞아 숨졌다. 터너는 엘우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계속 도망쳐야 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엘우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터너는 엘우드의 이름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성인이 된 엘우드라고 생각한 사람은 사실 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터너였다.


​  그렇게도 선하고 정의로웠던 엘우드가, 외할머니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엘우드가 허무하게 죽었다.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대학 강의 한 번 듣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더 깊이 학문을 연구하고 흑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꿈도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가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도, 그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정의와 사랑도 그를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바쳐 감사관에서 건넸던 쪽지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고, 니클은 50여 년 뒤에나 폐교되었다. 니클에서 학생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고 살해했던 백인 교사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면 엘우드가 바르게 살려고 했던 것, 마음속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했던 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었을까?


​  엘우드는 간절히 바라 왔던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굳건한 의지는 터너의 삶을 바꾸었다. 그저 세상에 순응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터너는 죽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지만 그 또한 니클이 남긴 트라우마로 내면이 망가져 있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그를 제대로 살게 한 것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터너는 건실한 업체의 사장이자 지역 사회의 원로로 존경받게 되었고, 죽은 엘우드 대신 니클에서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니클 관련 기자회견이 열리는 탤러해시로 떠난다. 그곳은 엘우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어린 엘우드가 언젠가 흑인이 직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호텔에, 터너가 손님으로 찾아오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터너는 자신이 오랜 친구의 소망을 이루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덤덤했지만, 독자들은 엘우드의 소망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먹먹해진다.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 같았다. 나무는 개울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수면에 자기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낸다.(p. 76.)


​  이것이 엘우드가 느낀 터너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위축되어 있는 니클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묘한 자신감을 가지고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터너에게서 강렬한 존재감을 느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가 엘우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자신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내는 사람. 터너의 존재감은 사실 터너가 마음속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허세였다. 반면에 엘우드의 존재감은 그의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터너의 삶에, 이 세상에 계속해서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나는 이미 죽었는데 다른 누군가의 삶에, 이 세상에 잔물결을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세상이 내가 한 옳은 행동으로 달라졌지만 나는 그 결실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고통만 받다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한 선한 행동이 항상 보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한 번도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증명한 나 자신의 의미와 가치, 그로 인해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은 누구도 빼앗을 수도 손상시킬 수도 없다. 『니클의 소년들』은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을 위해 누구보다 고결하게 살았던 소년의 삶을 통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우리가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이상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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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전
이서영 지음, 신중철 그림, 채수 원작 / 솔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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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이』, 『다시 쓰는 설공찬전』스포일러 포함


  두 달 전 도서관에서 『다시 쓰는 설공찬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가 쓴 공포 소설 <설공찬전>을 현대 작가가 다시 쓴 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필사되어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당나라에 반역해 후량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장군 주전충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주전충에 중종을 빗대어 비판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저승에서는 여자여도 글을 알면 좋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대목, 명나라 성화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노여움만 샀다는 대목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유학자들에게 노여움을 샀다. 사헌부에서는 저자인 채수를 처형하고 간언했지만, 중종은 너무 과한 처사라며 채수를 파직하는 데 그쳤다. 


  금서가 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소설의 한글 필사본이 1996년 발견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00여 년 앞선 소설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선비 설공찬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되어 저승 이야기를 한다는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이 필사되지 않아 미완성 형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빙의와 저승 세계라는 환상적인 소재를 다룬 덕분인지 설공찬전을 원작으로 연극도 만들어졌고, 설공찬전을 모티브로 한 웹툰, 웹소설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순창 지역에서는 설공찬전을 재해석해 다시 쓰는 프로젝트 두 가지를 진행했다.


  그 중 김재석 작가가 쓴 『다시 쓰는 설공찬이』는 전문 작가가 쓴 소설답게 소설 자체의 퀄리티는 괜찮은 편이다. 홍보용 소설답게 우리나라, 특히 순창 지역의 자연과 민속, 저승관을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꽤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설공찬이 빙의되기 전 잠깐 설공침의 몸에 깃들었다 박수무당 김석산에게 쫓겨나는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설공찬의 누이에게 '초희'라는 이름과 그녀만의 서사를 준 것이 흥미로웠다.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깊이 이해했지만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부딪쳐야 했던 공찬과 초희 남매의 모습을 애틋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설공찬은 인간으로 환생하고 설초희는 저승에서 명부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는 결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공찬은 원작에서 사촌동생 설공침을 괴롭히지만, 김재석 작가는 그런 공찬의 행동이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재해석했다. 공찬은 당시 사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살아가길, 더 선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공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자신과 동갑내기지만 훨씬 더 총명한 사촌 공찬을 질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사촌누이 초희를 무시하던 공침은 다소 단순한 악역처럼 보였지만, 공찬의 혼이 빙의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초희는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된다'는 원작의 구절을 스스로 증명했다. 원작의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넘어서 두 남매가 새로운 삶을 찾고, 남은 사람들도 그들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결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가 설공찬과 설초희 남매에 집중한 반면, 이서영 작가의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이들의 영혼이 빙의되는 설공침에게 집중한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침이 다소 단순한 악역으로 나왔던 것과 달리(이 소설에서도 나중에는 설공침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 설공침은 악하다기보다는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어 아무렇게나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설공찬과 설공심(『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는 설공찬의 누이가 '설공심'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매의 빙의는 설공침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빙의가 풀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설공찬의 저승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과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찬이 저승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통로로만 활용되었던 설공침을, 빙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으로 해석한 것이 신선하다. 빙의가 풀린 뒤 설공찬이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느끼는 자신의 몸과, 그 몸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 같은 작은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새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심리 묘사가 특히 섬세하다. 


  하지만 서사 전개에서는 역시 중견 작가인 김재석 작가가 더 노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서영 작가가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풀어 쓰면서 설공찬과 설공심, 설공찬은 이런 사람이라고 직접 설명하는 반면, 김재석 작가는 원작에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내 설공찬, 설초희 남매의 서사를 엮어나가고 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둘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준다. 이서영 작가는 살구나무에 내려앉는 공심 혼령의 옷자락에서 살구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완성하지만, 설공침에게 빙의된 설공찬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설공침의 아버지 설충수를 농락하는 장면에서의 공포감은 김재석 작가가 더욱 더 스릴 있게 그려낸다. 모든 인물이 표준어를 쓰는『다시 쓰는 설공찬이』와 달리『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순창 토박이 주민의 감수를 받아서 순창 방언을 쓴 정성이 돋보이지만, 설공찬 남매, 설공침은 순창 방언을 쓰는데 주인공들의 부모 세대는 표준어를 쓰고 있어 일관성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모 세대가 한양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다. 설씨 일가는 몇 대째 순창에서 살아 왔으니 순창 방언을 쓰려면 부모 세대도 쓰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만든다면 김재석 작가 버전을 원작으로 하거나 두 작가 버전을 모두 활용하되 이서영 작가 버전에서는 설공침의 내면 부분을 가져올 것이다. 


  관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답게 두 책의 만듦새 모두 투박하다. 문제집만큼 큰 판형에 동화책만큼 여백이 넓고 글씨가 커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서문에 영어 번역을 병기했는데, 영어 실력이 좋지 않은 나도 서문의 영문 번역이 딱딱한 직역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영문 텍스트에서 단행본 제목은 보통 이탤릭체로 표기하는데 영문 버전에서도 단행본 제목을 중괄호([]) 안에 넣어 영문 텍스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경험이 많은 출판사에 맡겨서 세련된 편집과 디자인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고전의 재해석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해석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많이 늘어나고 질적으로도 더 발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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