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파사 카페 - 네팔, 그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라얀 와글레 지음, 이루미 옮김 / 문학의숲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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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이 있다면 믿겠는가. 네팔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향력이 훨씬 큰 인도의 문학 작품도 그렇게 많이 출간되지 않았는데. 이 소설이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된 네팔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이후로 네팔 소설이 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아마 유일하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일 것이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네팔 소설은 이것뿐이라는 것에서 벌써 호기심이 생기는데, 네팔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네팔 국내에서 5만 부가 넘게 팔렸다니 더 호기심이 생긴다. 네팔에서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네팔 곳곳에 '팔파사 카페'라는 이름의 카페가 여러 개 생겼다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네팔을 대표하는 소설이라며 이 소설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그런 것들을 떼고 봐도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시기 동안 화가인 남주인공과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인 여주인공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니,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서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두 주인공이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훨씬 결정적이다. 바로 남주인공이 비호감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주인공을 망설임 없이 비호감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주인공의 행적을 살펴보자. 남주인공은 휴양지로 여행을 갔다가, 호텔 주인의 딸이 코코넛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을 따는 것을 지켜본다. 그는 그녀가 바지를 입고 있어 치마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미성년자인 소녀(인 척하는 친구여서 다행이었지만)와 채팅하면서 그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본다. 외국으로 나간 집주인이 맡기고 간 반려견을 집주인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는, 집주인에게는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다. 집주인이 잘 관리해 달라고 한 집을 쥐가 들락거릴 정도로 방치한다. 제 버릇 개 못 줘서 산간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 마주친 반군 소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봤다 사달을 낸다. 스포일러여서 얘기할 수 없지만 더 결정적인 잘못들이 있다. 남주인공이 완전무결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게 남주인공의 성격이고 개성인 양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네팔 문화에서는 그런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이 책의 서평 중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이 이해된다.


내가 남주인공을 견디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여주인공 팔파사와 책 속에 묘사된 네팔 그 자체였다. 팔파사는 주인공에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팔파사는 남주인공과 그의 예술을 사랑하지만, 그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어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아름다움만 찬양할 뿐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팔파사의 이 말 때문에 남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여성혐오를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겪지 않았어야 할 비극과 남주인공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네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저몄다. 네팔 근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떻게 희생되었고, 어떻게 살아남아 슬픔을 떠안게 되었는지 어떤 뉴스나 기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네팔에서는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작물을 기르고 시골과 도시에서는 각각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를 알게 되었다. 네팔의 참상과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초연함,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대비되어 더 서글펐다. 그래서 네팔에 대한 묘사만큼은 다시 읽으면서 곱씹어 보고 싶어진다. 내게는 두 주인공의 사랑보다는 네팔 그 자체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이 이 소설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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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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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한국에서는 많은 여자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남아 선호 때문에 배 속의 아이가 딸인 경우 지우라고 주변에서 종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해는 특히 백말띠의 해라 이 해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팔자가 사납고 드세다는 이유로 더 많은 여자아이들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고 태어난 평행우주가 있다면 어떨까. 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바로 이런 상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상상은 두 가지 면에서 내 흥미를 끌었다. 하나는 나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평행우주를 상상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종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평행우주를 상상했었다. 이 소설에는 두 개의 평행우주가 존재한다. 1990년에 여자아이들이 낙태되지 않고 모두 태어난 평행우주와, 1990년에 여자아이들이 낙태된 우주(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로 보면 될 것이다). 2007A우주에서 평범한 고2로 살아가는 여자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B우주에서는 없는 사람이다. ‘내가 없는 평행우주라는 개념까지만 떠올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상상하지 못했던 나는, 이 두 우주가 어떻게 서로 접하게 되고 충돌하게 될지가 궁금했다.


 또 하나는 ‘1990년의 백말띠 여자아이들과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1990년생은 아니지만 그 또래의 여성이고, 내 친할머니는 내가 딸이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둘째인 나도 딸인 걸 미리 알고 이번 애는 지우자고 며느리인 엄마에게 강요했다면, 나는 ‘1990년의 여자아이들처럼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 자신도 어쩌면 살아남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딸이 아니면 지우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니.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던 주인공 채진리의 일상이 조금씩 뒤틀리더니 결국은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과정은 흥미롭게 그려진다. 다정했던 남자친구와 정다웠던 남자 동급생들이 여자아이들을 갑자기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다. 집에 돌아가니 집 주소와 아버지의 직업이 바뀌어 있다. 누군가 진리와 단짝친구 해라 앞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하더니 갑자기 진리의 눈앞에서 해라가 사라진다. 해라뿐만 아니라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는데, 그 애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부모조차 그런 애는 없다고 한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이다. 진리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진리가 겪는 공포와 혼란은 서서히 차오르다 어느새 턱 밑까지 온 물처럼 독자들을 오싹하게 한다.


 하지만 진리와 달리 현실에서의 1990년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짐작하게 된다. 진리가 사는 세상은 1990년에 낙태됐던 여자아이들이 모두 태어난 평행우주구나. 진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과 출산 통계 자료를 찾아보고, 지하실 냉장고를 통해 원래의 세계, 1990년생 여자아이들이 낙태됐던 B우주에 가 옛날 뉴스와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독자들의 짐작은 사실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A우주는 B우주의 영향을 받아 뒤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진리가 A우주가 B우주의 영향을 받게 된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그런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나는 설명되지만 어떻게 그런 상황이 되게 했나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진리의 노력으로 조정자를 설득한 덕분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90년생 여자아이들의 운명을 건 결정을 바꾸었지만, A우주는 이전의 A우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SF로 보았을 때 과학적인 설정이 구체적이거나 치밀하지 않고, 이야기도 촘촘히 짜여 있다기보다 성큼성큼 진행되는 느낌이다. 장편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중편소설이라고 보는 게 더 좋을 만큼 분량이 적은데, 분량을 좀 더 늘리고 이야기를 더 촘촘하게 짰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상상보다 훨씬 더 탄탄하고 흥미로운 평행우주 이야기를 기대했던 면에서는 아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사히 태어난 사람으로서 무사히 태어나지 못했던아이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작가는 낙태는 생명을 빼앗는 것이니 무조건 나쁜 것이다라며 낙태를 했던 산모 개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1990년이라는 특정 연도에 여자아이들만 그렇게 많이 죽어야 했나라는 의문을 품고, 그런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던 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폭력성이 20여 년이 지난 2007년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7B우주에서 A우주로 넘어온 남자아이들은 원래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들이 설친다는 이유로 A우주의 여자아이들을 무시하고, A우주의 모든 것을 자신들만이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남자아이들만 필요하니 여자아이들은 지워도 그만이다라는 폭력적인 사고방식이, 그다음 세대들에게 이어져 여성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존중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폭력성은 남아 있다. A우주에서 여자아이들과 자신들의 틀에 맞지 않는 소수자들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B우주 아이들의 모습은 소설 밖의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 폭력에 맞서 진리가 한 행동은 어렵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라진 친구들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진심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 것. 진리의 행동이 큰 변화를 이끌어 냈지만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리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좋게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작가가 말하는 희망은 이렇게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분량이 적고 간략한 것의 단점이 여기에서도 드러나기는 한다. 진리와 사라진 친구들의 관계, 같은 우주에 존재할 수 없는 엄마와의 관계, 새로 만나 연대하게 된 친구들과의 관계가 좀 더 쌓였다면 결말 부분의 감동이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90년생 백말띠 여자아이들과 멀지않은 사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는 나름대로 여운이 남는다. A우주의 그들도, 여기 이 세상의 우리도 씩씩하게 잘 살아남고, 잘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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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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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2ch 괴담으로 시작해서 <피케이>로 끝난다

*2ch: 일본의 익명 인터넷 커뮤니티. 이곳의 오컬트 게시판에는 수많은 괴담이 올라온다.

한 서양인 네티즌이 직접 지은 밥에 젓가락을 꽂아 놓은 사진을 올리자, 한국, 중국, 일본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제삿밥이야?" 이처럼 산 사람이 먹는 밥에는 젓가락을 꽂아 놓지 않는 것이 동아시아 공통의 금기다.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은 젓가락을 둘러싼 이 금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본, 대만, 홍콩의 다섯 작가가 젓가락을 소재로 쓴 단편을 한 편씩 썼는데, 이 다섯 편의 단편은 단순히 소재가 같은 게 아니라 다음 이야기로 내용이 이어진다. 초반에는 '어, 앞의 얘기랑은 상관이 없는 얘기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다섯 개의 이야기가 퍼즐처럼 들어맞으며 전체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젓가락님 - 미쓰다 신조(일본)

작가 M 선생이 주최한 모임에서 한 여자가 어린 시절 젓가락과 관련해 겪었던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에 점심 급식에 제삿밥처럼 젓가락을 꽂는 남자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 남자애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 남자애는 84일 동안 하루에 한 번 밥에 젓가락을 꽂고 '젓가락님'한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당시 그녀의 오빠는 학교 일진들에게 괴롭힘당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생을 때리는 것으로 풀고 있었다. 그것도 부모님 눈에 안 띄게 옷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만. 참다못한 주인공은 오빠를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러 젓가락님 챌린지를 시작한다. 그런데 산 사람이 먹는 밥에 제삿밥처럼 젓가락을 꽂는 의식이라니, 어딘지 불길하다. '젓가락님 챌린지'를 시작한 뒤로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5학년 아이들 아홉 명이 모여 있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꿈을 꿀 때마다 아이들은 한 명씩 죽어나간다. 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소원을 젓가락님이 들어준다.

말수가 없는 신비한 아이가 매일 치르는 기묘한 의식이라는 소재 자체가 으스스한데, 거기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꿈 속의 스릴러가 더해진다. 원래 대나무를 직접 꺾어 만든 젓가락으로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주인공은 마트에서 파는 보통 젓가락으로 의식을 치르는 바람에 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화자가 꿈 속 살인 사건의 범인을 나름대로 추리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미스터리가 플리지는 않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소름이 돋는다. 나머지 이야기가 추리물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 이야기는 공포물의 성격이 강하다. 독자들의 흥미를 일으키는 깔끔한 시작이다.

산호 뼈 -* 쉐시쓰(대만)

*'쉐시쓰'는 '크세르크세스'의 중국어 표기법이기에 필명으로 보인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은 자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 도사를 찾아간다. 그녀는 도사에게 자신이 중학생 때 겪었던 일을 도사에게 이야기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도 젓가락과 관련된 괴담 하나를 접한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젓가락 한 짝을 몰래 바꿔서 3개월 안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괴담이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부추겨서 주인공은 반에서 제일 존재감 없고 아이들과 못 어울리는 남자애를 대상으로, 그 괴담이 진짜인지 실험해 보기로 한다. 친구들과의 장난 때문에 그 남자애에게 접근했지만, 생각지 못하게 그 남자애와 진심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애의 젓가락에는 주인공이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다.

주인공에게 젓가락 챌린지를 알려주기만 했던 첫 번째 이야기의 남자아이 '네코'와 달리, 두 번째 이야기의 남자아이는 주인공과 우정인듯 사랑인듯 미묘한 감정을 나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괴이를 감당하기에 주인공은 너무 어리고 나약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는 그녀를 질책하는 대신 예전처럼 박하사탕 두 알을 주며 위로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는 그 박하사탕 두 알을 '각자의 궤도를 돌다 스쳐 지나가는 별들'에 비유한다. 그 별들이 주인공과 남자아이를 빗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릿했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어울리게 으스스하고 기묘하면서도 대만 청춘물 특유의 풋풋함과 아련함이 느껴진다. 다섯 개의 이야기 중 가장 애틋한 이야기였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 예터우쯔(홍콩)

주인공은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절친, 편집자까지 넷이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다. 그런데 한 달 전 남자친구 생방송 중에 죽는 바람에, 매일 하루 종일 네티즌들의 악플과 의심에 시달리게 된다. 홍콩에는 시집 가던 신부가 타고 가던 가마가 연못에 빠져, 죽은 신부가 귀신이 되어 그 연못을 떠돈다는 괴담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 귀신 신부가 나타난다는 연못가에 저주하려는 대상의 이름을 적은 젓가락을 꽂은 쌀밥을 놓으면 저주 대상이 죽는다는 괴담이 얼마 전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괴담은 남자친구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괴담이었다. 주인공 남자친구는 그 사실을 생방송에서 밝히며 사람들을 비웃고, 백만 안티팬을 양성하게 된다. 안티팬들이 어떤 저주를 퍼붓든 개의치 않던 남자친구는 안티들이 보낸 저주 젓가락으로 생방송에서 라면 먹방을 하다 갑자기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죽는다. 살인범이라는 루머로 괴로워하던 주인공에게, 그동안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팀원 네 명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네 명 다 죽을 것이라는 다이렉트 메시지가 온다.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저주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과 두 번째 단편이 '현실을 뛰어넘는 괴이한 존재'에게서 느끼는 공포를 다루는 반면, 이번 단편은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공포를 다룬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 신상이 밝혀지고, 사소한 것으로도 트집을 잡혀 루머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훤히 알고 언제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현실의 독자들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공포이기에 공감할 수 있다. 현실적인 공포라 신비로운 면은 덜하지만 주인공이 사건의 진실을 추리해 가는 재미가 있다.

악어 꿈 - 샤오샹선(대만)

홍등가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거대한 악어가 고향 마을을 통째로 삼키는 꿈을 꿨다고 손님에게 이야기한다. 그 뒤에 한 유명 추리 소설 작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가 서서히 서로를 향해 다가오며 하나의 진실이 드러난다. 작가는 한 기자로부터 자신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수십 년 전 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 아홉 명이 실종된 사건을 함께 파헤쳐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건이 기자와 기자의 아들과 교묘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기자의 아들은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젓가락님' 의식을 시작했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의식을 멈추지 않는다.

앞의 세 개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기묘한 젓가락'과 '젓가락과 관련된 주술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팔에 나타나는 물고기 모양 홍반' 뿐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낼까 궁금했는데 결말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낸 솜씨에 감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네 번째 이야기와 연결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여기에도 등장하는데, 두 번째 작가가 만든 그 인물의 캐릭터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게 한다.

네 번째 단편을 쓴 작가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뿐만 아니라 깊은 한과 그 한을 이기는 사랑과 희망을 그리는 데도 능하다. 세 번째 단편과 같이 사회 비판적인 면도 있다. 그렇기에 다섯 개의 단편 중 가장 높이 평가하고, 두 번째 단편과 함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소박한 의식으로 웃고 울면서 한을 푸는 결말을 읽고 나면 울고 난 것처럼 마음이 개운하다. 딱 여기가 엔딩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해시노어 - 찬호께이(홍콩)

네 번째 단편에서 목숨을 걸고 젓가락님 의식에 나섰던 청년이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이다. 왜 이 청년이 젓가락 챌린지에 나섰느냐 하면, 좋아하는 여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좋아하는 여자가 중학생 여자애다. 도사인 친구의 주술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은 주인공은, '젓가락님 의식' 뒤에 뭔가 더 큰 음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짝사랑 소녀와 도사 친구와 함께 진상을 찾아 나선다.

일단 이 단편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학생인 주인공이 이제 겨우 만 14세인 중학생에게 반해 목숨까지 건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사 친구는 응큼한 놈이라고 놀리면서도 주인공이 그 여자아이와 키스를 하게 유도하는 등 잘되게 계속 밀어주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사실 네 번째 이야기와 거의 연결되지 않았고, 두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의 연결 고리인 여자아이가 중학생이다.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의식을 치르는 동기로 써먹기에 사랑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과 미성년자를 연애 관계로 엮으려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졌다(내가 네 번째 단편의 작가였으면 내가 만든 캐릭터를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 여자애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접근하는 캐릭터로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다섯 번째 이야기로 인해 네 번째 이야기까지 쌓아왔던 신비한 분위기가 결말에서 단번에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하나로 이 책의 장르는 공포에서 SF로 바뀐다. 영화 <피케이>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피케이는 도둑맞은 우주선 리모컨을 찾으려 몇 달을 헤맨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그 리모컨이 신이 내린 성물이라며 고이 모시고 있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의 결론도 그와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신비한 젓가락은 사실 이세계 사람들이 이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여는 장치였는데, 무지몽매한 지구인들은 젓가락의 능력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원한을 푸는 데 이용해 지금까지의 온갖 난리가 난 것이었다. 젓가락과 관련된 주술을 시도하거나 젓가락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팔에 난 홍반도, 사실은 이세계 사람들이 투플러스 A급 가축, 아니 지구인들에게 찍어주는 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추리 소설의 대가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있다. 하지만 찬호께이가 이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진상 하나하나를 꼼꼼히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전까지의 괴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다 날아가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조금 겉돌게 된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네 번째 이야기로 끝내는 것이 더 좋았다. 찬호께이의 마지막 단편은 사족이라는 평들에 깊이 공감한다.

다섯 개의 이야기 모두 추리 소설, 공포 소설로서 가져야 할 재미는 갖추고 있다. 그 덕분에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의 작가가 앞의 작가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가는지, 앞의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서 활용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한다. 한편으로는 같은 젓가락 문화를 공유한 한국 작가가 이 단편집에 참여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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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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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문체도 성격도 다른, 다양한 이야기들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거기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편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퍼즐처럼 착착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 감탄하게 된다. 다섯 번째 단편은 확실히 사족이긴 하지만 찬호께이 작품답게 재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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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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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부모님조차 나를 100퍼센트 이해하진 못 하시니 100퍼센트야 불가능하겠지만, 90퍼센트까지라도. 문학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같은 분야를 사랑하고 그것에 대해 함께 심도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사람. 어떤 얘기든 털어놓을 수 있고 서로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나와 생각과 감정의 결이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서도 때때로 낯설고 이질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런 바람조차 너무 헛된 환상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미국의 작가 테디 웨인의 소설 『아파트먼트』는 그런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을 냉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나'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하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는 첫 합평 때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혹독한 비평을 듣는다. 가차 없는 비판에 상처를 크게 받았던 그는 혼자 자기 작품을 지지해 준 동급생 빌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빌리는 누가 봐도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바텐더로 일하는 술집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 반면 '나'는 대고모의 이름으로 된 넓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고, 아버지가 학비를 대고 있어 돈 걱정할 일이 없다. '나'는 빌리에게 집 청소를 해주는 대신 자신과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빌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나'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서로 경쟁하면서도 좋은 영향을 미쳐 서로가 발전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를 꿈꾸었다. '나'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생활력도 강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닌 빌리에게 매료된다. 빌리도 '나' 덕분에 경제적 문제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마냥 유쾌하고 생산적으로 발전해 갈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상대의 모습이 사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변질되기 시작한다. '나'는 빌리가 보수 세력을 지지하고 국가의 복지 정책을 '국민들의 자립심을 빼앗아가는 지나친 간섭'으로 보며 동성애를 혐오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아예 없고 오만하다는 것도. 거기에 내가 갖지 못한 점을 상대가 갖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열등감이 관계를 갉아먹는다. '나'는 경제적으로만 우위를 지니고 있을 뿐 문학적 재능이나 남성적인 매력, 인간 관계 등 모든 면에서 빌리보다 뒤처진다고 스스스로 느낀다. 게다가 그 경제적 우위조차 대고모와 아버지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얻은 것일 뿐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 돈 문제까지. 한쪽이 무조건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관계에서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망가지고 서로 감정을 상하게 되기 십상이다. 빌리가 돈 걱정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을 순수하게 기뻐하던 '나'는, 이제 빌리가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벌린다고 느낀다. 빌리가 '나'의 아파트에서 처음 청소를 하고 나서 하얗게 빛나던 욕실은 빌리가 점점 청소조차 소홀히 하면서 빌리가 오기 전처럼 물때가 끼어 누렇게 변한다. 그 욕실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변질되다 파국으로 치닫는다.


  빌리를 잃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빌리를 자기 아파트로 들이지 말고 딱 동료 학생 정도로 대했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빌리를 잃지 않고 그로 인해 상처받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는 '나'의 모습과 내 세상의 전부처럼 느꼈던 소중한 관계를 잃은 나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아파트먼트』의 '나'와 현실의 나는 '온전한 나만의 사람'을 꿈꾸었다 너무 상대에게 가까이 갔고, 상대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고 어떤 면은 결코 이해되지도 용납되지도 않으며 그걸 내가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파트먼트』의 '나'의 다른 교우 관계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내 경우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들이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때로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이 관계들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관계들 속에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사람 사이의 관계란 이렇게 지키기가 어렵다.


  '나'는 그 이후 그저 빌리의 소식을 가끔씩 들을 뿐이다. 그 이후로도 '나'와 빌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여기 있어."라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와 그의 삶은 아직 남아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자기 글을 쓰는 것보다 남의 글을 다듬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것(묘하게 이 점이 나와 비슷하다)을 인정하면서 작가라는 꿈과도 멀어졌고, 우정도 떠나가고 상처만 남았지만. 나는 소설 속의 '나'처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의 소식을 가끔 들으며 그저 그 시절에 우리가 나누었던 좋았던 것들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그때 저질렀던 시행착오들을 생각하며 다음 관계에서는 좀 더 나아지려 애쓴다. 그 시행착오들에서 배운 게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자랐을 것이며 다음 관계에서는 좀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결말은 씁쓸하지만 이야기에서 빠져나오고 나서는 왠지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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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1-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스티안님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바스티안 2022-01-23 15:07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