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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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 때 회의감을 느낀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바르게 살아야 할까.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먼데 왜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할까. 미국의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니클의 소년들』을 읽으며 그 질문의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니클의 소년들』의 주인공 엘우드 커티스는 선하고 정의롭기에,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기에 더 고통받았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1960년대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민권 운동가들이 인종 차별에 저항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는 흑인이었고,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특히 심한 남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사업을 하겠다고 집을 나간 부모 대신 외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흑인이라 받는 차별과 모욕은 일상이었다. 백인 아이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놀이공원에 흑인 아이들은 입장할 수 없었고, 백인 학교에서 보낸 중고 교과서에는 '죽어라, 검둥이' 같은 욕설이 잔뜩 적혀 있었다. 가난과 차별, 폭력 속에서도 그는 올곧고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고, 온 동네 사람들이 그의 장래를 기대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또래들과 달리, 엘우드는 대학에 진학하고 민권 운동에 참여해 흑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 못한 불행이 닥쳐왔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고등학생을 위한 대학 강의를 들으러 가던 길에, 엘우드는 한 흑인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하필 그 차는 도난 차량이었고, 엘우드는 흑인이고 그 차에 탔다는 이유로 차 도둑과 공범으로 몰렸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모범생 엘우드는 하루아침에 소년범이 되어 니클 아카데미라는 소년원으로 끌려갔다.

  심지 굳은 엘우드는 절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착실하게 생활하면 빨리 출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 엘우드의 상식이었으니까. 문제는 니클이 그런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엘우드는 니클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작고 약한 하급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엘우드가 그들을 막아섰지만, 백인 교사들은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가죽 채찍으로 수십 대나 때렸다. 니클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용소였고, 교사들은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과 차별당하며 더 심한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니클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히거나 학교에 불이익을 입힌 학생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어 학교 뒤편 비밀 묘지에 묻혔다.

  니클에서 일어나는 일은 법적으로도, 엘우드의 가치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고 묵인한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엘우드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어설 수 있다고 동급생 터너에게 말하자, 터너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서도 살아남는 요령은 밖에 있을 때랑 똑같아. 남들이 어떻게 구는지 보고, 장애물 경주를 하듯이 놈들을 피해서 돌아가는 길을 알아내는 거지. 여기서 걸어 나가고 싶다면."(p. 108.) 터너는 니클에서 자신만의 요령으로 버텨 왔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산 덕분에 한 번도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고, 제일 쉽고 편한 일을 맡았다. 일을 하기 싫을 때는 숨겨둔 가루비누를 먹고 병동으로 실려가 며칠씩 쉬고 왔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엘우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엘우드와 터너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니클에서의 삶을 버텨냈다.

  바로 곁에서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아이들이 새벽에 끌려가 폭행당하거나 성적으로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해도 일상은 흘러갔다. 엘우드도 이제는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엘우드의 내면은 위축되고 망가져 가고 있었고, 엘우드는 그렇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형량을 채우거나 열여덟 살이 되면 이곳을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엘우드는 조용히 니클을 졸업하는 대신, 니클 자체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정부에서 보낸 감사관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 니클의 실상을 폭로하는 쪽지를 전달하겠다는 엘우드의 말에 터너가 경악하자, 엘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틀렸어, 터너. 이건 장애물 경주가 아니야.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돼.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야 돼."(p. 218.)


  터너는 엘우드가 니클에 순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내면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엘우드에게 영향을 받아 왔다. 그는 대책 없이 이상만 좇는 엘우드가 짜증나기도 했지만 엘우드가 누구보다 굳건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 교사의 심부름 때문에 엘우드가 쪽지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터너는 감사관에게 신문을 건네는 척하며 그 속에 쪽지를 넣어 전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엘우드와 터너는 목숨을 걸고 감사관에게 쪽지를 건넸지만, 니클 문제는 몇 주 동안만 의회에서 논의되고 곧바로 잊힌다. 쪽지를 쓴 것이 엘우드라는 것이 밝혀지자 백인 교사들은 엘우드를 채찍질한 뒤 3주 동안이나 독방에 가두었다.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엘우드마저 누구도 자신을 위해 와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다. 좌절할 때마다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킹 목사의 말을 떠올리지만,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다. 그때 터너가 나타나 엘우드를 독방에서 구출한다. 그리고 함께 니클을 탈출한다.


​  두 소년 모두 무사히 탈출하고 살아남았다면 이 소설은 완벽하게 희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소년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했던 터너였다. 소설의 1부에서 그렇게 공을 들여 니클에 오기 전 엘우드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게다가 3부에서는 성인이 된 엘우드의 시점과 아직 니클에 있는 엘우드의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사람이 터너일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도망을 쳤지만 엘우드는 그들을 추격해 온 백인 교사의 총에 맞아 숨졌다. 터너는 엘우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계속 도망쳐야 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엘우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터너는 엘우드의 이름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성인이 된 엘우드라고 생각한 사람은 사실 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터너였다.


​  그렇게도 선하고 정의로웠던 엘우드가, 외할머니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엘우드가 허무하게 죽었다.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대학 강의 한 번 듣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더 깊이 학문을 연구하고 흑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꿈도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가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도, 그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정의와 사랑도 그를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바쳐 감사관에서 건넸던 쪽지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고, 니클은 50여 년 뒤에나 폐교되었다. 니클에서 학생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고 살해했던 백인 교사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면 엘우드가 바르게 살려고 했던 것, 마음속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했던 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었을까?


​  엘우드는 간절히 바라 왔던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굳건한 의지는 터너의 삶을 바꾸었다. 그저 세상에 순응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터너는 죽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지만 그 또한 니클이 남긴 트라우마로 내면이 망가져 있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그를 제대로 살게 한 것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터너는 건실한 업체의 사장이자 지역 사회의 원로로 존경받게 되었고, 죽은 엘우드 대신 니클에서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니클 관련 기자회견이 열리는 탤러해시로 떠난다. 그곳은 엘우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어린 엘우드가 언젠가 흑인이 직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호텔에, 터너가 손님으로 찾아오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터너는 자신이 오랜 친구의 소망을 이루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덤덤했지만, 독자들은 엘우드의 소망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먹먹해진다.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 같았다. 나무는 개울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수면에 자기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낸다.(p. 76.)


​  이것이 엘우드가 느낀 터너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위축되어 있는 니클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묘한 자신감을 가지고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터너에게서 강렬한 존재감을 느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가 엘우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자신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내는 사람. 터너의 존재감은 사실 터너가 마음속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허세였다. 반면에 엘우드의 존재감은 그의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터너의 삶에, 이 세상에 계속해서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나는 이미 죽었는데 다른 누군가의 삶에, 이 세상에 잔물결을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세상이 내가 한 옳은 행동으로 달라졌지만 나는 그 결실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고통만 받다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한 선한 행동이 항상 보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한 번도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증명한 나 자신의 의미와 가치, 그로 인해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은 누구도 빼앗을 수도 손상시킬 수도 없다. 『니클의 소년들』은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을 위해 누구보다 고결하게 살았던 소년의 삶을 통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우리가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이상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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