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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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되고 나서 좋아진 음식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입에도 못 대던 신김치가 이제는 겉절이보다 더 좋아졌고, 밍밍하다고 싫어했던 두유가 이제는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콩나물국밥, 깻잎, 마늘쫑무침처럼 어렸을 때는 먹어보려는 시도도 안 했다가, 어른이 된 이후에 먹어 보고 '생각보다 괜찮네' 싶어서 먹게 된 음식들도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의 다양한 맛들을 알게 되었고, 기억 속에 그 맛들이 쌓여 왔다. 일본의 작가 히라마쓰 요코의 음식 에세이집 『어른의 맛』은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 맛들, 세월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 쌓여 온 맛들을 이야기한다. 

  코 끝이 찡해질 정도록 알싸한 와사비의 맛, 온갖 감칠맛이 응축된 말린 음식의 맛, 더운 여름날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까지, 작가는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맛들을 예찬한다. 사실 나는 이런 맛들을 아직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영영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일본 음식들 중 아는 것은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일본인 독자라면 공감했겠지만 나는 공감하는 대신 상상했다. "유부의 안쪽으로부터 맛이 스며 나온다. 온화해 보이지만 야만적이다. 조용한 척하고 있지만 수다쟁이다. 변변찮아 보이는 모양인데 무척이나 풍요롭다." 음식 하나에서도 그 음식이 자아내는 맛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맛의 묘사 덕분에 맛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의 계절감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낸 묘사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자아내는 열기와 정감이 흐르는 이자카야(일본식 술집)부터 비를 맞아 녹음이 더욱 짙어진 여름날 산골 여관, 온갖 길거리 간식들이 모여 맛있는 냄새를 내는 축제날 거리까지. 무더운 여름날에 읽어서 그런지 특히 여름에 먹는 음식들 이야기에 더 몰입이 되었다. 특히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 먹었던 간식들 이야기에서는 여름 특유의 청량감이 느껴졌다.


여름에 먹는 간식 미츠마메. 삶은 완두콩에 우무와 꿀을 넣어 만든다. 

사진 출처: https://dolcevita-sana.blogspot.com/2015/07/blog-post_11.html


"낮잠에서 깨면 반드시 차가운 보리차를 마셨다. ... 컵 표면이 순식간에 물방울을 두른다. 잠시 기다린 다음 손가락을 대고 직 그어 투명한 창을 만든다. ... 오후 세 시의 간식은 수박, 아이스캔디. 빙수, 차가운 찹쌀 경단, 미츠마메(みつ豆, 삶은 완두콩에 깍둑썰기 한 우무를 넣고 꿀을 친 음식-역주). 이것들 중 하나를 번갈아 내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미츠마메가 나온 날은 뛸 듯이 기뻤다. 우무의 사각 단면이 정오를 조금 넘긴 여름빛에 반짝였다."

  미츠마메라는 음식을 잘 모르는데도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간식을 먹을 때 느끼는 여유와 상쾌함, 청량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튀김을 튀겨내는 세세한 타이밍에 맞춰 함께 튀김을 먹으며 이야기하려면 두 사람이 적당하고, 세 명 이상은 무리라는 부분에서는 "아니, 뭘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전에는 거래처 손님을 대접할 때 어느 계절에는 어느 식당에 가고,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까지 신입사원에게 깐깐하게 가르쳤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만 먹고 마시니 그럴 수가 없다는 어느 중년 회사원의 이야기도 공감되지는 않았다. 그런 가르침에 얽매이기보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 맞는 사람들과 먹는 것이 더 좋으니까.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하면 뭘 골라야 할지 정해진다는 마음가짐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일본적인 정서는 이름도 낯선 일본 음식들만큼이나 낯설지만, 책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일본적인 정서가 책 전체에 짙게 배어 있음에도 음식을 통해 작은 위로와 행복, 즐거움을 얻는다는 메시지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음식으로 누리는 작은 호사에 공감했다.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이 호사가 아니다. 평소에는 가격이나 칼로리 때문에 선뜻 손을 대지 못했던 음식들을 어느 날 마음껏 먹어보는 것. 이런 호사에는 "평소 해 오던 억제와 인내를 힘껏 걷어치우면서" 느끼는 쾌감이 숨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숨막힐 듯 단조로운 일상에서 이런 작은 기쁨이 막혀 있던 숨을 틔워주곤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음식을 먹어 왔고, 다양한 맛을 알게 되었다. 그 맛들이 쌓여 우리의 추억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를 이루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맛을 알아가는 것, 맛이 쌓여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쌓여 온 맛들이 소중하고, 앞으로 만날 맛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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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죽은 그녀
로사 몰리아소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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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3월 13일, 뉴욕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제노비스는 죽기 직전까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38명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괜히 나섰다가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공포를 이기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나서주길 바라지 않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아름답고 죽은 그녀』는 이탈리아 어느 도시의 강가에서 발견된 한 여인의 시체를 통해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다섯 사람이 여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첫 번째 사람은 명품 매장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는 전직 모델. 그녀는 명문가의 자제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심하게 말다툼을 해 헤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이런 일로 경찰서에서 고초를 겪고 싶지 않아 신고하지 않는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데이트 하러 나온 고등학생 커플. 그들은 대마초를 피우려 했기 때문에 경찰에 들킬까 봐 신고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정신이상이 있는 노숙자. 그에게는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들을 구덩이 안에 숨겨 놓는 버릇이 있는데, 노숙자는 죽은 여자가 자신에게 점퍼를 건네주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시신에서 핸드백과 구두만 벗겨 구덩이에 묻어둔다. 다섯 번째 사람은 기 치료사. 그는 기 치료와 안마를 해서 번 돈으로 감옥에 있는 동성 연인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자신까지 범죄에 휘말리면 감옥에 있는 동성 연인에게 해가 갈까 신고를 하지 않는다. 


 죽은 여인의 시신으로 인해 이야기가 시작하지만, 작가는 죽은 여인이 아닌, 죽은 여인을 발견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시체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하지만 일상에서 크고 작은 고민을 겪으면서 그들은 양심의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지금 약혼자와 헤어지게 생겼는데, 경찰서에 갔다가 내가 대마초를 피운 것을 들킬 수도 있는데, 내 인생이 엉망인데 다른 누군가를 신경쓸 여력이 어디 있어? 각자의 걱정과 고민거리에 밀려 다른 사람의 곤경은 외면해 버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책 속 다양한 인간들의 비루하고 찌질한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비루함과 찌질함 또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저러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하지만 실천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P.S. 이탈리아어 번역가들도 있는데 왜 굳이 프랑스어판을 중역했는지 모르겠다. 번역도 나쁘지 않고 역주도 꼼꼼히 잘 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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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C. 라자고파라차리 지음, 허정 옮김 / 한얼미디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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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라마야나는 어떤 작품인가


  최근 개봉한 인도 영화 <바라나시>에서는 바라나시에 온 순례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라마'와 '시타'라는 이름이 들린다. <바라나시>뿐만 아니라 많은 인도 영화들에서 이 두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이 두 사람은 인도의 고대 대서사시  『라마야나』 의 주인공이다.  『라마야나』 는   『마하바라타』 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대서사시로,  고대부터 내려오던 코살라 왕국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들을 기원전 3세기에 시인 발미키가 정리한 것이다. 발미키 이후로도 수천 년 동안 여러 문인들이  『라마야나』 를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정리하고 썼기 때문에   『라마야나』 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수많은 버전의 『라마야나』  중 가장 오래된 버전인 발미키의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라마야나』 가 올해 4월부터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그 버전은 아직 구하지 못해서, 20세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파라차리가 소설로 재구성한 버전의  『라마야나』 를 읽었다. 고대 시인이 아닌 현대 작가가 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쓴 데다, 영문판(라자고파라차리가 쓴 원문은 타밀어(인도 타밀나두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을 중역한 것이니 고대의  『라마야나』 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발미키의   『라마야나』 가 가장 널리 인정받는  『라마야나』 의 표준이긴 해도 유일한 원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라자고파라차리의  『라마야나』 를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라자고파라차리가 현대인의 입장에서 A시인 버전에서는 이 장면이 이렇게 묘사된 반면, B시인의 버전에서는 저렇게 묘사되었다고 여러 버전의 『라마야나』를 비교 분석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힌두교의 정신을 담은 고전 라마야나


  라자고파라차리는 저자 서문에서 "카스트, 지역, 언어의 차이를 넘어 수많은 인도 국민들을 한 민족으로 결속시키는 것은  『라마야나』 와   『마하바라타』"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두 책이 인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더 나아가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 종교의 가르침, 법, 정의, 도리)를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라마야나』 의 주인공 라마는 다르마를 지키며 힌두교에서 말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도인들도 라마를 닮으려 하고 그를 인생 모델로 삼는다고 한다. 

  라마는 힌두교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이다. 비슈누 신은 
세상의 질서이자 정의인 다르마를 수호하고 인류를 보호하는 존재인데, 악마들의 왕 라바나가 인간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라바나는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서 어떤 신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신 대신 라바나를 죽일 인간이 필요했고, 비슈누 신은 다사라타 왕의 네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 그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맏아들 라마였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외모까지 잘생긴, 완벽한 왕재였다. 부왕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라마가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모 카이케이 왕비의 음모로 라마는 아무 죄도 없이 추방되어 14년 동안 숲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거친 숲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 시타, 동생 락슈마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시타의 미모 이야기를 들은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한다.  라마는 동생 락슈마나, 원숭이 종족인 바나라 족과 힘을 합쳐 시타를 구하러 간다. 


  
저자 서문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러분에게 더 큰 용기와 더 강한 의지, 더 순수한 정신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책에서는 라마의 용기와 의지, 정신력을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는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크샤트리아(카스트 중 둘째 계급. 왕, 귀족 계급으로 전쟁에 임해 백성들을 보호한다.)로서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카이케이 왕비 소생으로 자기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된 이복동생 바라타가 다시 왕위를 돌려준다고 해도,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며 유배생활을 스스로 계속하니, 사람이 아니라 보살로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완벽한 라마가 시타에 관한 일에는 이성을 잃는다. 여러 가지 고난들로 시타를 구하는 일이 자꾸 늦어지자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또한 그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한계들도 있다. 라마가 인간으로서 겪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내가 닮아갈 수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서사와 생생한 캐릭터들, 아름다운 묘사


  원래도 교훈적인 내용인데다 라자고파라차리가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러저러하다"는 코멘트를 자꾸 집어넣으니 도덕 교과서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라마야나』 는 이야기의 재미와 문학적인 완성도도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하고, 라마가 시타를 구하기 위해 준비하고 전쟁을 치르는 과정의 서사는 기승전결이 잘 짜여 있다. 라바나가 어떻게 라마와 락슈마나의 눈을 피해 시타를 납치했는지, 어떻게 라마가 납치된 시타의 행방을 알게 되었는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바나라 족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인과관계들이 착착 맞물리며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라마와 라바나의 전쟁에서도 라마 쪽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라, 라마가 위기를 겪기도 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날아서 인도 본토에서 스리랑카 섬까지 바다를 건너가고, 부상당한 동료들을 위해 약초가 있는 산을 통째로 뽑아오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것은 생생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처럼 보였던 라마도 아내의 실종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라마의 동생 락슈마나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형 대신 화를 내면서, 형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리사가 쓴 채소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듯이, 훌륭한 시인은 악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기교를 발휘한다."는 라자고파라차리의 말처럼, 악역인 라바나도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악마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 정도로 유능한 군주이고 스스로 노력해 신도 꺾을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시타의 마음을 얻고 싶기 때문에 그녀를 강제로 취하지 않고 시타를 설득하려 한다.(물론 시타가 끝까지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서, 시타가 자기를 좋아하길 바라는 건 어리석다.) 라자고파라차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나태한 기질을 지닌 독자들이 악한 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쉽다고 또 잔소리를 하지만, 잘 만든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뿐인 독자들을 매도하지는 말자. 

  그리고 아름다운 묘사들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서사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쓰였고, 영문판을 한 번 더 거쳐 한국어로 옮겨졌으니 언어의 울림이나 운율 같은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숲의 아름다운 풍경, 시타의 아름다운 모습, 라마와 시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갖가지 비유들은 『라마야나』 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보는 『라마야나』

  
  라마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었다. 동맹군을 얻기 위해 적을 뒤에서 공격해 죽이는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타의 정절을 의심해 죄없는 그녀가 온갖 고초를 겪게 했다. 라자고파라차리는 『라마야나』 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증오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라마의 결점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라마의 미덕을 받아들이면 된다면서. 하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이 증오만 표출하는 것과 달리, 건설적인 비판은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한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라마야나』 를 소설로 재구성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넣은 것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의 일이다.(1957년) 그렇기 때문에 그의 관점도 지금의 우리와는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라자고파라차리는 모든 남자가 라마처럼 여성들의 구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억압하는 남성보다는 훨씬 낫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성이 여성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라마가 시타의 정절을 의심한 것은 후대에 힌두교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내용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이 부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라마야나의 결말은 라마와 시타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해피엔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 힌두교인들은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시타에게 시련을 더 겪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안겼다. 라자고파라차리 버전 『라마야나』 에서는 시타가 한 번의 시련만 겪고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정절을 증명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많은 버전들에서 시타는 라마와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정절을 의심받아 숲으로 쫓겨나고, 결국에는 대지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애니메이션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에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현대 여성 니나가 남편에게 의심 받고 버림 받은 시타에게 공감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현대의 우리로서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는데도 가부장 제도의 질서 안에서 희생된 시타에게 연민을 가지고,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태도가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보는 등, 새로운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볼 수 있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말했듯이, 인도의 고전들은 모든 면에서 인도인들의 국민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라마야나』 는 인도 사람들의 종교관과 가치관을 그대로 담고 있고, 그 중 많은 것들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우리도 공감하고 본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인도인이 아니더라도 『라마야나』  자체의 재미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라마야나』 는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낳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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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낭만픽션 7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북스피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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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스포일러 포함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표지의 예쁜 일본 인형 그림과 독특한 제목에 끌렸다. 그리고 "원치 않던 혼담으로 괴로워하던 언니가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동생은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는 인형 하나히메를 찾아간다."는 줄거리 소개에 호기심이 들었다. 책을 펼쳐보니, 그 동생이 언니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서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계속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설의 주인공 오나츠는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지배하던 시기, 1603~1867) 에도(지금의 도쿄)의 스마다가와 강 료고쿠바시 다리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행수의 열세 살 난 딸이다. 오나츠의 언니 오소노는 남 몰래 사귀는 남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하자 무척이나 슬퍼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스미다가와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언니를 죽인 게 아닐까 의심하던 오나츠는, 료고쿠바시 다리 일대에서 복화술 인형 공연을 하는 츠키쿠사를 찾아간다. 츠키쿠사의 인형 오하나('하나히메'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진실을 말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오나츠와 하나히메, 아니 하나히메를 조종하는 복화술사 츠키쿠사는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간다.


 나는 줄거리 소개와 오나츠가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는 부분만 읽고 이 책 전체가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긴 여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린 다섯 가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언니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비정한 아버지, 복잡한 사연, 이런 걸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가 명예살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언니의 죽음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비정함, 폭력성을 다룬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섯 가지 이야기 모두 옛날 민담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복화술사 탐정' 츠키쿠사는 진실을 파헤쳐가고, 하나히메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오나츠는 언니의 죽음의 진상을 거의 혼자 밝혀내고, 다른 이야기들에서 간간이 단서를 잡아내긴 하지만 왓슨 박사 같은 조력자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다. 츠키쿠사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주 치밀하거나 스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슬프고 감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츠키쿠사와, 그의 제2의 자아지만 발랄하고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하는 하나히메의 매력이 돋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히메는 츠키쿠사가 조종하는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츠키쿠사와 하나히메를 다른 사람처럼 대하고 심지어 하나히메를 츠키쿠사보다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에도시대 당시의 에도 풍경과 풍속을 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이렇게 에도시대를 다루는 일본 소설들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시고 입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놀았는지 당시의 일상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어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재미를 준다. 


 이 책을 읽을 때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한창 연등축제가 열리고 있고, 푸드트럭들도 여기저기 세워져 있던 청계천에 갔었다. 지금의 한국과 에도시대의 일본은 서로 다르고, 청계천과 스미다가와 강은 크기부터 서로 다르다. 하지만 츠키쿠사의 인형극 공연을 비롯한 각종 공연들이 펼쳐지고, 온갖 먹거리들이 가득했던 에도시대의 스미다가와 강변의 분위기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깊은 감동이나 슬픔, 치밀한 트릭은 없지만 에도시대 에도의 저녁 풍경을 상상하며 읽는다면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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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포함

  상상해 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들의 정권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은 모든 권리를 잃는다. 은행계좌가 막히고,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해고된다. 여성이 책을 읽으면 손목을 자르기 때문에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도 없다. 여성은 오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낳을 수 없느냐는 기준으로 분류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은 자녀가 없는 고위층 가정에 배정되어, 그 집 남편과 성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 '시녀'가 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은 핵폐기물 처리 등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에게 그나마 나은 선택지는, '시녀'들을 감시하는 통제 요원인 '아주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시녀 이야기』속 가상의 국가 '길리어드'의 모습이다. 이 소설 속의 20세기 말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장악하고 '길리어드'라는 정권을 세웠다.(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세운 정권의 이름답게 '길리어드(Gilead)'는 성경 속의 지명인 '길르앗'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남편과 어린 딸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주인공 준은, 직장을 잃고 가족들과 강제로 헤어진 뒤 다리가 달린 자궁 그 자체인 시녀로 전락한다. 자신과 남편이 초혼이 아니라 재혼한 부부고,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변해 버린 세상 속에서도 일상은 흘러간다. 길리어드의 실체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준의 독백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괴물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배란일마다 사령관과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폐기처분되는 삶. 그런 삶 속에서 준은 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자유와 가족을 되찾겠다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 준은 길리어드를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소설은 저항 세력인지 저항 세력을 가장한 정부의 감시자들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준을 데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준이 살아가던 시대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2195년의 어느 역사 학회의 기록을 통해 그녀의 결말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준이 길리어드의 처참한 현실을 증언한 테이프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길리어드는 내부 분열과 온갖 사회 모순으로 인해 붕괴했다. 하지만 준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로 망명해 자유로워졌을지, 다시 길리어드 정권에 붙잡혔을지. 길리어드가 결국에는 무너졌다 해도, 준도, 또 다른 많은 여성들도 고통 받고 희생당했을 수 있다.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이곳이 길리어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길리어드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녀 이야기』같은 일은 여기선 벌어지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없어요. 어디서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 자신도 이렇게 이야기했다.『시녀 이야기』 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들은 현실 속에도 숨어 있다. 자기가 입고 싶은 옷차림, 하고 싶은 머리 모양을 하고 활발하게 사회 생활을 하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부르카 속에, 집안에 갇히게 되었다. 여성들이 히잡을 제대로 썼는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옷차림을 하지 않았는지 감시하는 이란의 지도원들은 소설 속 '아주머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살아가다 종교 근본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자유를 잃은 것이 현실이다. 

  길리어드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같은 먼 나라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숨어 있다. 2016년 말 한국 행정자치부는 전국의 가임기 여성 분포를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했다. 올해 5월 24일에는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 소원의 공개 변론이 진행되었다. 법무부는 헌법재판소에 낸 의견서에서 여성이 성관계를 가지고서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다며, 남성도 함께 성관계를 가졌는데 낙태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모순은 외면했다. 『시녀 이야기』가 3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작품이고, 먼 가상의 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말대로 길리어드는 어느 곳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길리어드 같은 세상이 오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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