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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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와 맞설 때가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로서는 대략 가늠하기 힘든 감정과의 낯선 대면에서 연유한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로 단단히 무장하였음에도 그 치밀한 메트로놈의 정형성을 따라 실재의 경계를 무시로 넘는다. 허구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잰 걸음으로 빠르게 온몸으로 전이되고 나의 삶에 올라탄다.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소설은 서사를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비집고 솟은 무한한 감정들의 총체이자 가면이 수시로 바뀌는 복마 술인지 모른다. 현실과 상상이 용해될 수 없는 성질임에도 이미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일쑤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그것은 있었거나 있음을 예정한 일로 흐려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은 숨겨둔 감정을 허락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화경처럼 신기하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엇비슷한 세대의 눈에 비친 이야기라면 연대감은 더욱 공고해 진다.





        2010년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타이틀이 거창하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신선한 피를 지속적으로 펌프질하겠다는 사뭇 진중한 취지다. 물론 읽는 자의 특권을 오롯이 거머쥔 독자인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고답적임은 피할 수 없다. 나에게는 작가를 괴롭히는 쥐어짜는 창작의 고통과 솎아 내야 하는 인생의 카테고리도 필요치 않는다. 읽고 받아들일 최소한의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이 고르지 못하면 쉽게 끊기고 아웃당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검증의 단계를 거친 묶음 형태의 책을 쥘 때면 선입견이나 가벼움도 동시에 따라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당혹감을 추스르기 위해 경험했던 축적의 관성이 만든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잘 빠진 글은, 어수룩한 나로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데자뷰를 보듯 기시감에 빠지기도 혹은 모종의 동질감에 연민하며 글은 마음껏 나의 마음을 유영한다. 밀고 당기는 사이 울림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소통으로 번진다. 어느 새 수상작으로 뽑힌 7명의 글이 문장과 문장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삶에 지쳐 고독의 숲으로 뒤엉켜 음습해진 나의 마음을 청량한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갓 구워 낸 책의 채취가 이와 같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반문하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를 위무하기에 소설은 더 없이 적합하다. 고독과 번민은 불안에서 유발되었으나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욕망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소설은 범위 내의 현실이 된다.

 




        김중혁 작가의 <1F/B1>은 기발함이 조합한 퍼즐처럼 기묘하다. 어떤 형태나 현상이 상태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의 지배적 의사(疑似)의 심리적 표출장치가 신선하다. 숱해 보고 지나치는 층과 층을 나누는 슬래시를 기점으로 표류한 현상은 단락을 지나 우리 사회가 안은 치명적이고 소외된 문제에 정박한다. 실제 집단공동체 생활의 한 형태인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취약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건물관리자연합, 일명 슬래시메니저(SM)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본에 매수되고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만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부패하기 쉬운 재물처럼 공간은 쉽게 변질되고 오염된다. 매수당한 통제는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상상력은 무방비에 대처하는 현란한 내러티브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구비한 신식건물이라도 관리자의 익숙한 손놀림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거미줄처럼 꼼꼼히 얽히고 지하통로로 이어진 관리자연합의 탄생은 소멸할 수 없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 속에서 관리자인 그는 세상을 꿈꾸고 현실을 다독이는 갈망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소실점 위에서 <1F/B1>은 트위터처럼 너의 일을 실어 나른다.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구애(求愛)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행위다. 문장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열망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이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선 상태는 실연이다. 구애는 위험을 내포한 갈등의 경합상태를 뜻한다. 순조롭거나 험난하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불안한 감정이 유발하는 긴장의 순간을 매끄럽게 포착해 냈다. 고립된 상태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성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등장한 김은 애도와 축하를 전달하는 화환을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혜영은 그를 통해 죽음을 분해하고 구애를 해체한다. 구애의 완성은 서로의 결핍된 순간이 충만해 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죽음 또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상태를 뭉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편혜영은 어색한 감정 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긴장의 대립과 표출로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미완성의 연속이다. <저녁의 구애>를 덮은 후 나는 갓 우려낸 우동의 개운함보다 통조림의 텁텁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를 속이고 살아갈까?

        




        변희봉은 입 언저리 어느 부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낯설기만 하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이 날것처럼 울대를 자극한다. 물론 존재감만으로 묵직한 실존배우다. 윤인호 감독의 <더 게임>에서 변희봉의 연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변희봉이 이장욱에 노출되어 포위당한 것은 우연일까? 변희봉이 삶에 구속당한 연극배우의 눈에 비치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변희봉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이장욱은 모험을 감행하였는지 모른다. 이야기 속 배우는 삶의 극단까지 밀려난 위태로운 상태다. 아내는 오사카로 공예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감행하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삶은 이처럼 지독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을 꿈꾸듯 아버지로부터의 가냘픈 동조는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고단한 세월을 닦아 내는 보상이다. 희망은 절망에서 핀 우아한 꽃처럼 말이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다문화 가정과 불법체류문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감출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지리적인 거리가 인접해 있는 중국인들의 불법체류는 대립과 갈등이 뒤엉킨 채 웅크린 상태다. 매번 불거 터지는 문제의 출현에 나는 정의(正義)에 의문을 갖는다. 규범과 현실을 매조지는 문제의 대처방법은 살벌하다. 분명 명분을 위시하여 처리되었음에도 나의 눈은 불신으로 물든다. 냉혹한 소외의 그림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위세는 연민을 쓰러트린다. 김미월 작가의 <중국어 수업>은 심란한 무대를 짧은 단문으로 밀어냈다. 짜임이나 틀이 빈틈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어 “짜이젠(다시 만나요) “의 은유적 비유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다. 희망은 곧 동기가 될 터이며, 동기는 움직임을 바꾸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준비되어 분출된 정소현 작가의 글에 설익은 응원, 한 자락을 날려 보낸다.




        가족은 이따금 내게 평안한지를 묻는다. 범주에서 벗어난 위태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맞설 수 없는 아픔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가족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내 편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다. 나는 그 중심에 집을 연상한다. 집은 회귀할 생물적 본능처럼 돌아갈 보루다. 기약 없는 소식이 제비처럼 넘나들기를 소망하며 봄꽃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한다. 정소현 작가의 <돌아오다>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비록 해체되고 부서진 가족이지만 정상의 기능을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이야기의 실체는 헛것 또는 유령이 되어 방황하다 가슴을 이내 후벼 판다. 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순간을 통해 침전된 마음을 위무한다. 단절되고 소외된 가족을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 나가는 이 글은,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인상 깊은 이야기다.


        나는 개그맨을 볼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에 감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떠 올린다면 웃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깊이를 당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을 처음 대한 나의 인상은 진부한 역설보다는 아픔이 먼저 전해져 왔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의 편차만큼 사회는 빠르고 간결한 즉각적인 배출을 요구한다. 웃기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존재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스무 살 젊음이 어우러져 풋풋함 가득한 시절 만나 결합되지 못한 사랑의 궤적을 뒤쫓는다. 다소 실험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는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은 쉽게 산화되어 소멸될 성질이 아니다. 곰삭혀 묵힐수록 풍부해지는 홍어처럼 글맛이 강하다. 보트피플을 희망한다는 이 작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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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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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삶은 여행에 비유되곤 한다. 여행의 설렘도 삶의 기대도 엇비슷 닮은꼴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삶의 한 가운데에서 변화무쌍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삶의 대부분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순간 속에서 산다. 선택은 곧 틀이 되고, 틀은 곧 내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더 없이 건조하며 멈춘 듯 부유하는 흐름 속에 나는 갇혀 산다. 오히려 나는 그 틀을 깨트리려 노력하지만 실은 부서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벗어난다는 것은 어색한 불안감에 노출되고 여태껏 붙들어 맨 것으로부터의 회귀할 수 없으며 타협할 수 없는 집착에 사로잡힌다. 나는 흔히 이것을 삶의 굴레 혹은 원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삶의 굴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고 이어진 상태가 다채로움에서 비켜 난 보편적인 상태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안정은 평범하고 적응은 지루한 법이다. 자유는 수동보다는 능동을 연모한다. 무엇이든 열망하고 얼어붙은 정열마저도 자유를 꿈꾸게 하는 것은 비상하는 자아의 태곳적 본능의 기억이다. 비록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멈추어 섰을 지라도 자유를 향해 닮아 가는 삶을 지향하는 이들을 우연이든 필연이든 마주치게 되면 발끝부터 퍼지는 자유의 향기에 온몸이 자극받고 달아오름을 이내 느낀다.




        스무 살 언저리의 그는 세상에 대한 '순정'이 있었다. 이리저리 돌멩이처럼 차이더라도 삶에 대한 어떤 애틋함 하나만은 잃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런 마음마저 없다면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진함을 잃은 세상은 그의 순정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너의 순정도 별거 없고 나의 순정도 별거 없다는 깃털처럼 가벼운 냉소가 사는 데는 한결 편리한 법이다. --- 〈슬픔도 고이면 단단해진다〉 중에서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평범하지 않은 자유를 닮은 이야기다. 청춘에게만 허락된 특별함이라서보다 도전하는 젊음의 푸른 영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 박근영을 흠모하게 만든 느림의 미학과 예찬이 이 책을 추동하는 모든 키워드다. 삶의 속도감에 비례에 느리게 살아가는 이들을 흠모하고 흔적 하나를 건져 올리는 작업은 보편적 관념으로는 정적이며 단조롭게 다가선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을 뚫고 스며 나온 삶의 열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의 끝을 향해 넘쳐나는 에너지를 토해내고 당당히 맞서는 의연함이 더욱 더 강렬한 열기를 내 뿜는다. 나는 그들을 통해 기억의 저편으로 비켜 난 추억을 자극하게 되고 흔적 없이 사라졌던 조련되지 않은 젊음의 그 시절을 소환하는 기쁨을 만끽한다.




        책은 13명의 젊은 영혼을 따라가며 소탈하게 묻고 답하며 소통하고 공유한 흔적의 결과물이다.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 에디터, 만화가, 뮤지션, 여행 작가, 건축가, 시인 등 책에서 소개된 그들은 스스로 삶을 예속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날선 세상에 상처받고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힘의 원천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는 외부적인 압력도 고통이 될 수 없으며 흘러가는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세상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현실의 냉혹함에 꺾이기도 하는 모든 순간이 삶의 또 다른 모습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그들은 달랐다. 비록 먼 길을 돌아서 갈지언정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가려내고 세파의 굴곡을 삶의 한 조각으로 웃어 넘겼다. 바람이 불어오면 부는 쪽으로 나아가는 긍정의 오롯한 힘을 믿었으며, 소소한 일상을 보다 더 멋들어진 날로 바꿀 줄 아는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만화가 김풍이 시크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향해 던져 오는 그미의 말, “삶은 즐겁게 사는 것이 이기는 거다.”라고.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자, 부러움이다.




누구인들 젊은 날 비상을 꿈꾸어보지 않을까. 그러나 언젠가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꿈은 꾸지 않는다. 그런 꿈은 그저 한낱 이상일 뿐이라고 밀어두고 뒤돌아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현실과 꿈 사이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 〈끝까지 부딪치고 넘어본다〉 중에서




        이처럼 누군가에게 삶은 변하지 않는 상태가 아닌 깨어 움직이는 유기체다. 그들의 열정으로 인해 나는 열병처럼 미소 짓던 젊음의 향연에 절로 도취된다.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에 꺼져 가는 자유의 불씨를 지펴 줄 불쏘시개처럼 고무되게 만든다. 불가피하게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고 재단하는 숨 막히는 세상에서 가슴 벅차오르는 무엇으로 채워진다. 그 무엇은 바로 자유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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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삶!
영혼이 자유롭다면 살만하다고 하는 데
요즘은 영혼과 육체가 모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네요.
어떻게 사는 삶이 자유로울까요?

穀雨(곡우) 2010-06-29 13:52   좋아요 0 | URL
와우,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호인님 말씀처럼 요즘은 영혼과 육체의 구속된 이유가 자본주의의 공격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물질에 예속되고 모든 성공의 기준이 부의 서열화가 된 세상에서는 자유 또한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지 싶습니다. 전 자유는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유연한 대처에서 오는 게 아닐까하는 이미 구태의 생각으로 사는 지 모르겠습니다.

라로 2010-06-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리뷰가 더 좋으면 어떻하죠????ㅎㅎㅎ
님의 리뷰보고 이책 찜합니다!!

穀雨(곡우) 2010-06-29 13:53   좋아요 0 | URL
리뷰보고 책 사서 후회하시면 AS해 드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네요.
그래도 칭찬은 듣기 좋은데요.^^
 
<별궁의 노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별궁의 노래 - 잊혀진 여걸 강빈 이야기
김용상 지음 / 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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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를 들여다보면 왕이 되지 못했거나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은 치열하다. 필요에 따라 압축되거나 혹은 삭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빈약한 약전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주춧돌을 쌓고 보와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검은 두건을 쓰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심정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축약되고 매몰된 기록을 바탕으로 잊힌 영웅들의 복원작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이 녹아들어 있다. 발굴자에 의해 소환되어 생생하게 불타오른 뜨거웠던 현장을 토해내기라도 할 때에는 이것으로 모든 긴장과 오류로 점철된 과거는 일시에 무너진다.




        과거는 이렇게 다시 쓰인다. 무너진 그 자리에 새롭게 생명의 빛을 부여받아 든든한 역사의 도량으로 조밀하게 엮이고 뭉쳐진다. 이것은 시간의 물리적 개념을 확장하는 유연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념상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적 정의는 이념이나 명분, 권력에 의해 편향되고 왜곡된 해석은 심각한 오류를 유발한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로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을 유지한다면 이 책 <별궁의 노래>는 버려진 역사의 복원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대개 파란만장한 역사의 복기는 후대에 가서 빛을 발하곤 한다. 조선조를 통틀어 암울했던 시기나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인물이라면 그 후보로 으뜸으로 꼽히고 회자 되는 이유도 그러하다. 게다가 신분, 남녀의 차별이 심했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들의 활약이 더욱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도 호기심을 부추기는 주효한 이유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소현세자는 역사가들의 호기심에 불을 댕기기 좋은 재료다.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여 볼모로 8년간의 모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일신의 명멸을 피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 그였다. 최근 김인숙 작가의 <소현>에서 볼 수 있듯 애환과 번민의 고통은 이러한 시류를 잘 대변해 주는 빼어난 작품 중에 하나다. 해서 이 책 <별궁의 노래>도 그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저자 김용성의 오랜 신문사 기자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원칙과 허구가 완벽한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춘다. 소현세자를 위시하여 주인공인 민희빈 강 씨의 비범한 일화를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살려 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밑천으로 민희빈 강 씨는 여걸로 그려진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합리적인 이성과 기준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향해 경영하는 세자빈의 모습은 시쳇말로 알파 걸의 우상이자 여걸이라고 칭할만하다. 신분의 벽을 온몸으로 밀어 내고 굳건하게 일어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었던 시대다. 그러나 그녀는 부국강병을 위해 무엇보다 실사구시의 경영이 중요하였음을 통감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단한 행보와 실용적 의식은 후대에서야 빛을 발하지만 치명적인 독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인물의 강점과 약점을 교차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갈등의 전조가 모두 하나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역사는 늘 그랬다. 개혁의 중심이 곧 폭풍의 진원지였음을 말이다. 그래서 세자빈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전개방식도 고정된 결말을 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치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영역에 철저하게 구속되고 피할 수 없는 영향력 아래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모든 팩션소설은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외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이 지어지고 얼개가 다듬어지면 실록의 단문은 작가의 상상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게 태어난 팩션소설은 때로는 기대치 못한 변화를 거머쥐기도 한다.




        이 책은 딱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가려지고 숨겨진 이면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심리적 연대의식도 한 몫 했겠으나 진실을 향한 시대적 반영이다. 권력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고 배척당한 아픔을 통해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쓰지 않겠다는 민중의 염원인지 모른다. 실제 강빈이 김수진이라는 묘령의 인물을 거느리고 개성상단에 버금가는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소현세자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였는지 학질에 의해 병사하였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실록에 나타난 모든 기록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의 탄생은 숱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지표가 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고증의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추측이나 과장된 행적의 부풀림은 부작용이 반드시 뒤따른다. 하지만 이 책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다. 명백한 사실성을 배경으로 적절하게 버무려진 상상력이 전체를 장악하였기에 단지 나의 기우에 불과하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김인숙 작가의 <소현>을 함께 읽는다면 재미가 더욱 배가될 것 같다. 김인숙 작가의 글이 짜임새 있게 절제된 아픔을 노래한다면 김용성 작가의 이 책은 끌어안아 분출하는 아픔을 그린다는 차이가 있다. 또 소현세자와 더불어 강빈의 삶도 동시에 접한다면 전체적인 밑그림이 보다 더 입체적으로 형성될 시너지를 제공해 준다. 나아가 두 작가의 상상력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책을 통해 왜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중심에 민희빈 강 씨가 연루되어 일가가 몰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 무성한 추측만 난무하지만 작가가 만든 상상력의 탄탄한 프리즘을 통해 기대치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으로 기대된다.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연리지처럼 한데 얽혀 사랑하자 하였네.

아득히 먼 훗날 이 세상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언정

두 사람 사랑의 한은 영원히 끊이지 않으리라

당나라 백거이의 시 <장한가 비익연리 比翼連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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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6-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도 있었군요. 저는 소현세자랑 사도세자 대목만 접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소현세자는 더하지요. 사실 강빈을 알게 된 것은 한국사전이었는데 마지막에 자막 올라갈 때 울었어요--;; 막연하게 조선왕조가 쇄국의 틀안에 갇혀 있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시대에 벌써 서양문물을 접하고 개혁정치를 펼 저력을 지닌 세자와 세자빈이 있었다는 게 참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야사 같은 것 읽으면 인조가 소현세자 부부를 질투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던데...

곡우님이 저번에 써주신 <소현>에 강빈 얘기가 빠져있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말씀대로 상호보완해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곡우님 글은 참으로 정갈하고 단아합니다.

2010-06-2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06-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현을 읽고 이 책 읽으면 좋겠군요. 소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는데 이 책까지 읽으려면 바쁘겠는걸요.

穀雨(곡우) 2010-06-26 16:48   좋아요 0 | URL
비교되는 대목이 한눈에 보여서 좋더군요. 소현에 부각된 인물과 별궁의 노래에 부각된 인물에 대한 대비도 나름 재밌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대하는 시각이 비슷하나 질감이 다르다는 차이가 인상적입니다.
 
<젊은 날의 깨달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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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에서는 인생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불가의 진언을 떠나 우리의 인생을 조망하는 모습임은 분명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문자에 새겨진 의미처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 현실이든 이상이든 목표를 쫓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이성이 흐트러지고 번뇌, 욕망, 집착, 탐욕, 증오, 불안 등 수 만 가지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이 다반사다.




        무엇보다 외부적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변화에 대한 속도와의 관계다. 변하는 세상만큼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뒤처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 속도와의 간극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번민을 낳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완벽한 존재를 지향하나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한 생각을 이겨내고 명료한 의식을 다 잡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현실이다. 암연처럼 막막함에 처할 때 우리는 간절한 도움을 갈구한다. 혜민스님의 이 잠언집은, 바로 이럴 때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책이다.




        우리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해 착각하고 혼동하는 경향이 심하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혼동이다. 그러므로 사회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상호작용에 대해 철저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으로 대한다. 이러한 수용의 차이는 갈등을 빚는 원인이다. 또한 내부적 욕망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해 심각한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관점과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더 크다. 혜민스님이 선교활동을 통해, 구도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진리를 한데로 포개고 엮으면 대승적 끌어안음의 오롯한 추출물이 빛을 발한다. 그것은 포용包容과 인정認定이다.

 

        이처럼 혜민스님의 잠언집은 쉽게 풀어 쓴 이야기의 행간 속에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다. 아울러 혜민스님의 약력이 독특한 것도 관심이 가지만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수행을 행하는 스님의 행적이 매우 이례적이다. 드러난 외형이 개성 넘치고 뉴웨이브적인 사고로 뭉쳐있으나 근본은 다르지 않다. 시대가 변한만큼 구태의연한 사고는 유연하게 넘고 깨달음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믿음이 미쁘게 보인다. 개성 넘치고 다채로운 세상에 이 정도의 파격은 흠 잡을게 못된다.




        책은 스님의 경험과 사색을 통한 깨달음의 순간들을 모았다. 어떻게 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하버드대학에 진학하고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대학에 정교수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려 냈다. 칼릴 지브란과 김춘수 시인을 사모한다는 젊은 혜민 스님의 이야기는 부박하는 세상살이에 청아한 대숲처럼 청량감을 제공해 준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고 깨쳐야 할 것이 많은 스님의 이야기가 혹자의 가십거리로 폄훼하여 떠내려 보내기에는 아쉽다.




        사소한 사물하나에도 뜻한바가 있듯 칼날에 베인 상처에도 새살이 돋아나는 경험칙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지혜를 통찰하는 진심이 묻어난다. 더불어 사는 의미가 무엇이고 인연의 소중함을 깨우쳐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 날 바른 길을 함께 도모하자는 넓고 바른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적 시각을 떠나 삶에 귀감이 되는 좋은 본보기에 다르지 않다. 결국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자기애의 충족을 통해 남과 나를 살리는 온전한 길이 된다는 말이리라.




        시기하고 다투고 뺏고 질투하는 것도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인지 모른다. 통찰력을 잃고 자제력을 상실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자기애는 이기적인 마음과는 다르다. 혜민 스님의 말씀처럼 우주의 중심이 뉴욕 한 가운데가 아닌 자신을 통해 운행하는 공명의 법칙과 맞닿아 있다. 그 안에서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나쁜 마음들이 자라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브로 단숨에 흘렀다. 눈으로 보았으나 마음으로 환해진 느낌이다. 스님의 용기에 절로 감복되고 미욱한 순간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시인 류시화님은 말한다. "작별을 고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엔 행복 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마지막으로 멀리 떠나 본 적이 언제였는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껴안아 본 적이 언제였는가."




        깨달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 삶도 그러하다. 초심의 의욕도 자세히 드려다 보면 내심에서 반응하는 작용이다. 하지만 초심을 잃고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내심의 취약함과 무름에서 나온다. 대개 우리는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다보면 관계의 중심인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리석음의 유혹으로부터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다. 스님의 말씀처럼 맑고 고운 음악이 분출되기 위해서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처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남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대할 때 긴장은 봄눈처럼 포근하게 사그라지고 사랑은 기쁜 손님처럼 찾아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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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9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6-1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책 방금 표지만 보고 왔는데 절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행복해지라는 과제가 요즘 참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저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려고 해요. 곡우님도 행복한 주말되세요.

穀雨(곡우) 2010-06-19 14:15   좋아요 0 | URL
행복해진다는 게 마음 먹은대로 잘 안되니 늘 노력하고 살아야 하나봅니다.
블랑카님도 에너지 충만한 하루 되세요.

thissa 2010-07-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책을 읽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별로 깊이가 없는 책인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필자가 하버드를 나와서 미국대학교수로 있는건 대단한것 같지만

너무 평범한 에세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가장 인상깊게 남았던것이 그어렵다는(?) 미국 대학의 정교수로
채용이 된 성공스토리, 세계여행을 다니고 세계에 친구들이 있고등 깨닮음과는 거리가 좀 있다고 느껴지는 내용)

출판사의 하버드 마케팅은 성공했다는 생각 밖에 안들던 책이었습니다.(개인적으로 많이 실망한책)

개인의 차에 따라 느껴지는게 다른가 봅니다.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책을 사시는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있다'는 정도로 참고 하시길 바라며 댓글을 남김니다.

그럼 즐독 생활하세요~~

穀雨(곡우) 2010-07-27 13:07   좋아요 0 | URL
thissa님 반갑습니다. 정성어린 댓글에 무엇보다 더 고맙습니다.
혜민스님의 이 책은 저도 그런 면을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깨달음이 주는 깊이에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약력이 또한
눈에 도드라지는 것이 오히려 방해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스님이 체득한
에피소드가 성공일변도로 치닫는 배타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출판사에서의 마케팅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이기에 그걸 나무랄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성찰,
인생을 관조하는 열망 등은 누구나 겪고 넘어야하는 장애요인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 전체적인 취지나 내용이 넓게 고르게 퍼질 수 있는 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좋게 보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답니다. 제가 첨언한 이유는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인정하기에 드리는 말씀이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제 글을 읽고 책을 선택하는 것 또한 개인의 호불호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죽음이 임박했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감정의 동요는 물론이고 삶의 희망마저 꺾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죽음의 키스가 예정된 것도 아니고 불시에 들이닥친다면 더 더욱 그러하다. 삶은 죽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말라붙은 감정처럼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산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후회는 미련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겠으나 들리지 않던 진실한 마음의 소리 또한 동시에 열린다. 어리석음에 대해, 냉혹함에 대해, 탐욕에 대해 선택의 손길을 뻗던 모든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버려진 순수의 감정이 되살아나는지 모른다.




        죽음이 시시각각 덮쳐 오는 상황에서는 예정된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선택의 문제다. 이 책의 시놉시스를 이끌어 가는 정리(定離)의 과정은 충분한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인간이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할지언정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생략할 수는 없다. 죽음 저편의 세계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잊힘이리라. 사라진다는 현상의 의미보다 존재의 상실이 고통이 크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책 <코끼리의 등>에서 나타난 어느 말기 암환자 샐러리맨의 죽음의 여행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예정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불변의 법칙에 예외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최근 접한 일본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건조한 문체에 이렇다 할 반전도 없는 사랑이야기와는 현격한 거리감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를 필두로 펼쳐지는 억눌린 감정의 분출전개방식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화자의 감정에 충실한 사실적인 문체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저자 아키모토 야스시는 마초적 성향에 압도당한 기분이다. 가족 내 갈등을 유발하는 불륜에 대해 지극히 남성적인 고해과정을 답습하는 것을 보면 동정의 시선을 보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용서와 화해를 위해 그 애매모호한 설정을 통해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따라서 정서적 배려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화적 코드는 시대, 배경, 지리에 따라 상대적이다. 일본이라는 보수적 성향과 남성우월주의사회에서의 수용과정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진정한 죽음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용서를 삽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첫사랑을 찾아가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져 버린 절친한 친구를 찾아 고백하는 설정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하지만 혼인의 맹서를 지켜 내지는 못할지라도 죽음의 고통에 더해 배신의 고통을 이중삼중으로 안겨준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물론 작가의 상상으로 지은 이야기지만 어색함과 동시에 산뜻하지는 못하다. 이 책에 설정된 샐러리맨 후지야마 유키히로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직장인을 반영했다는 것이 더욱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자극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었는지 아님 일본의 주류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독특한 접근과 해법임은 분명하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잘 나가던 인물을 설정하고 가족의 의미를 되살피고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은 언제든 심금을 파고드는 법이다. 실제 죽음에 다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와 사랑을 확인한다고 한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고 후회로 점철된 삶일지라도 죽음에 위안을 찾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 찾기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이 책을 가로지르는 테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낳은 욕심에 대한 책망과 힐난이다. 집착과 탐닉이 낳은 쾌락은 갈등을 양산하고 아픔의 날카로움을 새기며 뼈아픈 교훈을 더불어 각인시켜준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든 상황을 선택하고 다시 후회하며 그 후회를 통해 더 나은 길을 모색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최선의 선택에 이르는 통찰의 과정을 찾는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면으로 맞서고 용감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려움의 탈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쉽게 수용할 성질은 아니다. 우리에게 죽음 저편의 세상은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이 낳은 산물이다. 실체 없는 죽음에 우리가 사로잡혀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의연하게 대처하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 훨씬 유의미하다.




        그럼으로 이 책의 내용이 죽음에 이르는 실존의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가능하다. 예정되었든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계기를 만들어 주는 구도적 이야기가 된다. 초로에 접어든 이 작가의 인생 경험이 고스란히 녹은 이 허구의 스토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 또한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은 좀 더 따뜻하고 밝게 보인다는 치유의 물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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