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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평점 :
불가에서는 인생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불가의 진언을 떠나 우리의 인생을 조망하는 모습임은 분명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문자에 새겨진 의미처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 현실이든 이상이든 목표를 쫓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이성이 흐트러지고 번뇌, 욕망, 집착, 탐욕, 증오, 불안 등 수 만 가지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이 다반사다.
무엇보다 외부적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변화에 대한 속도와의 관계다. 변하는 세상만큼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뒤처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 속도와의 간극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번민을 낳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완벽한 존재를 지향하나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한 생각을 이겨내고 명료한 의식을 다 잡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현실이다. 암연처럼 막막함에 처할 때 우리는 간절한 도움을 갈구한다. 혜민스님의 이 잠언집은, 바로 이럴 때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책이다.
우리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해 착각하고 혼동하는 경향이 심하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혼동이다. 그러므로 사회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상호작용에 대해 철저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으로 대한다. 이러한 수용의 차이는 갈등을 빚는 원인이다. 또한 내부적 욕망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해 심각한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관점과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더 크다. 혜민스님이 선교활동을 통해, 구도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진리를 한데로 포개고 엮으면 대승적 끌어안음의 오롯한 추출물이 빛을 발한다. 그것은 포용包容과 인정認定이다.
이처럼 혜민스님의 잠언집은 쉽게 풀어 쓴 이야기의 행간 속에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다. 아울러 혜민스님의 약력이 독특한 것도 관심이 가지만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수행을 행하는 스님의 행적이 매우 이례적이다. 드러난 외형이 개성 넘치고 뉴웨이브적인 사고로 뭉쳐있으나 근본은 다르지 않다. 시대가 변한만큼 구태의연한 사고는 유연하게 넘고 깨달음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믿음이 미쁘게 보인다. 개성 넘치고 다채로운 세상에 이 정도의 파격은 흠 잡을게 못된다.
책은 스님의 경험과 사색을 통한 깨달음의 순간들을 모았다. 어떻게 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하버드대학에 진학하고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대학에 정교수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그려 냈다. 칼릴 지브란과 김춘수 시인을 사모한다는 젊은 혜민 스님의 이야기는 부박하는 세상살이에 청아한 대숲처럼 청량감을 제공해 준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고 깨쳐야 할 것이 많은 스님의 이야기가 혹자의 가십거리로 폄훼하여 떠내려 보내기에는 아쉽다.
사소한 사물하나에도 뜻한바가 있듯 칼날에 베인 상처에도 새살이 돋아나는 경험칙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지혜를 통찰하는 진심이 묻어난다. 더불어 사는 의미가 무엇이고 인연의 소중함을 깨우쳐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 날 바른 길을 함께 도모하자는 넓고 바른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적 시각을 떠나 삶에 귀감이 되는 좋은 본보기에 다르지 않다. 결국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자기애의 충족을 통해 남과 나를 살리는 온전한 길이 된다는 말이리라.
시기하고 다투고 뺏고 질투하는 것도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인지 모른다. 통찰력을 잃고 자제력을 상실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자기애는 이기적인 마음과는 다르다. 혜민 스님의 말씀처럼 우주의 중심이 뉴욕 한 가운데가 아닌 자신을 통해 운행하는 공명의 법칙과 맞닿아 있다. 그 안에서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나쁜 마음들이 자라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브로 단숨에 흘렀다. 눈으로 보았으나 마음으로 환해진 느낌이다. 스님의 용기에 절로 감복되고 미욱한 순간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시인 류시화님은 말한다. "작별을 고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엔 행복 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마지막으로 멀리 떠나 본 적이 언제였는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껴안아 본 적이 언제였는가."
깨달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 삶도 그러하다. 초심의 의욕도 자세히 드려다 보면 내심에서 반응하는 작용이다. 하지만 초심을 잃고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내심의 취약함과 무름에서 나온다. 대개 우리는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다보면 관계의 중심인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리석음의 유혹으로부터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다. 스님의 말씀처럼 맑고 고운 음악이 분출되기 위해서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처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남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대할 때 긴장은 봄눈처럼 포근하게 사그라지고 사랑은 기쁜 손님처럼 찾아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