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하는 열매라고 한다. 여행은 시간을 멎게 하고 오직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만드는 멋이 있다. 여행을 통해 얻은 시간은 자신이 가진 시간의 규칙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보석과 같다. 삶에서 여행을 뺀다면 푸석하게 말라 붙은 건조한 상태와 같을테다. 하지만 일정한 삶의 틀이 생기고 규칙에 얽매이다보면 여행을 거창한 행위의 범주로 놓기 마련이다. 여행을 어딘론가 떠날 수 있는 낭만적인 감성의 행위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여행은 계획되어야 하고 습관의 인에 의해 형성된 범주에 놓이는 관습에 구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여행이 머뭇거리게 되고 재고 따지는 일이 되는 모양이다. 
 

나에게 여행은 늘 어딘론가의 막연한 동경에서부터다. 동경의 근원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노마드의 끝 간 곳 없는, 그 원대한 설렘을 소망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여행이 비어 버린 감성을 채워주고 재깍재깍 돌아가던 삶의 바퀴를 윤기나게 해 줄런지 모른다는 희망이 숨어 있어서다. 그런데 나는 여행을 잊어 버렸다. 여행이 나의 몸을 변화시키고 억눌린 감정의 물꼬를 틔워준다는 당연한 이치를 혼탁해진 공기에 의해 제압당했다. 막상 떠나면 이렇게 쉬운것을......
 

계획없이 떠난 제주여행은 8할의 설렘과 2할의 기대로 가득찼다. 그 여행의 대부분을 채워준 설렘만으로도 호르몬이 급격하게 분비되고 인생이 바뀌는 기분이다. 기분을 변화시키는 물질은 보이지 않음에도 사물의 정경을 전혀 새롭게 그린다. 매번 똑같은 일상도 설렘은 빠르게 촉수를 뻗어 나가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설렘, 그 순간의 공기는 가볍다. 
 

 

 

                                                                              제주의 하늘 

 

제주 하늘은 맑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알길 없었으며 세상은 온통 푸르렀다. 작렬하는 태양도 푸름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지척에 있다는 잴 수 없는 거리감이 적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히려 내 마음이 멀었음을 실감하는 거리였다.

 

출발하기 전 온전히 안겨 있다 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일정을 느슨하게 잡았다. 외지인이 제주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거치는 렌트카를 픽업하고 관광지쿠폰을 찾는 일정은 대개가 같다. 요즘은 미리 인터넷에서 관광후보지에 대한 정보와 할인쿠폰을 구매할 수 있으며 미처 방문하지 못한 관광상품은 환불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느영나영의 안내를 통해 구매했지만 거의 할인률은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사전에 정보를 취합해서 어떻게 제주를 둘러 볼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싶다. 관광이든 휴양이든 테마를 담는 것이 제주의 풍광을 담는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상태와 아이들의 기대를 적절히 배합하는 차원에서 첫날은 늦은 아침으로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유명한 식당인 "올레국수"로 이동했다. 올레국수는 사골육수처럼 진하게 우려낸 국물과 국수를 양껏 담아 푸짐한 흑돼지수육을 소담하게 얹어 먹는 음식이다. 어디서나 맛 볼 수 없는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제주에 오면 한번은 맛보아야 하는 음식이란다. 가격도 맛도 꼭꼭 채워주는 든든한 음식이다.

 





                                                                            올레국수

 
 
첫 출발부터 막힘없이 술술 풀린다. 여행지에서 낯선 음식과의 조우는 명성에 비해 초라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에너지가 절로 충만해 진다. 제주 시내를 벗어나는 동안 마음은 절로 풍성하게 차오른다. 곧게 뻗은 고속국도를 막힘없이 내달리는 청량감으로 인해 더 더욱 차고 넘친다. 이제 든든히 먹었으니 첫 목적지는 아이들을 위해 테디움박물관으로 고고싱.....^^
 
테디움박물관은 서부권역에 새로 개장한 아담한 인형 박물관으로 곰인형을 메인 테마로 동물인형을 전시하고 직접 만질 수 있는 곳으로 중문에 위치한 테디베어박물관과는 차이를 둔다. 아이들의 감성에 맞게 직접 만지고 올라타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유아가 있는 가족여행에는 꽤 호응이 좋은 곳이다. 물론 어른은 한껏 부푼 기대감을 잠시 호주머니에 넣어두어야함은 필수다.^^
 



 



 

아이들 위주의 사진을 찍다 보니 쓸만한 이미지가 별로다. 찍을 때는 쉴새없이 셔터를 누른 것 같은데 막상 펼쳐 보니 건질게 없다. 하지만 신나게 떠들고 놀던 아이의 표정에 허접한 사진실력은 자취를 감춘다. 형편없는 사진 실력이므로 넓은 양해를 바란다.^^

 



 

엄청난 곰, 출현. 테지움에서 가장 인기있는 곰이다. 실내가 어두워 이미지가 어둡게 나오는 것이 흠이지만 아이의 마음은 온통 곰에게 쏠린다. 미끄럼처럼 올라타고 굴러도 곰은 큼직막하고 넓은 등으로 포근하게 감싸준다. 곰의 환한 웃음이 금세 전염되는 기분이다. 한바탕 왁작찌껄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나는 다시 달렸다. 협재해수욕장을 지나 서부해안도로의 천혜의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을 시리게 담았다. 하지만 이 날 제주의 날씨는 34도를 오르내리는 찌는 듯한 폭염이 난무했다. 아쉽게도 아이들의 컨디션 난조와 옆지기의 피곤함을 이유로 차를 돌려 국내 최대 녹차 재배지 오설록으로 돌렸다. 오설록은 사시사철 푸르름이 오롯이 떠도는 곳으로 대양에서부터 불어 오는 바람과 제주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청정의 녹차가 자란다는 곳이다. 언젠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필수방문코스가 되다시피한 찌든 눈이 맑아지는 곳이다.




 

오설록박물관은 2층 현대식 구조로 지어 녹차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곳은 입장료가 없는 대신 상품을 파는 수익금으로 대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녹차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롤케잌이 인기만점이다. 허겁지겁 먹는 통에 제대로 된 사진은 이미 실종되었지만 대신 이것으로 대신한다.^^ 녹차 케잌의 속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달고 맛나다. 아마 재료가 신선했고 땀 흘린 후 먹는 탓에 더욱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 달콤한 부드러움이 선명하다.
 



 
 

오설록에서 만난 녹차의 풍광은 어마어마하다. 처음과 끝을 종잡을 수 없는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녹차의 행렬에 압도되고 폐부 깊숙히 덮쳐 오는 향기에 취한다. 어른 허리춤까지 자란 녹차의 도열이 마치 잘 가꿔진 유럽식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이는 이랑과 이랑 사이의 통로가 모두 놀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자기는 이제 두더지가 되었으니 어서 찾아 달란다. 영락없이 푸름에 빠진 모습이다.

 



 

 

여행은 추억을 담는다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의 궤적에서 비켜 선다는 행위가 이처럼 세상을 전혀 다르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곳이 어디든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면 나에게 부여된 삶의 선택의 방향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소통의 오랜 길에 다름 아니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자유롭다는 관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욕망이나 집착의 무게를 조금 내려 놓는다면 그 길 위에 여행이 포개진다면 삶은 여유로워지리라. 뒤처진다는 두려움, 각박한 세상으로부터의 숨막힘, 치열한 경쟁에 대한 불안감 등 모든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위안은 여행이 가진 넉넉한 치유와 사색의 힘으로 충만해진다. 여행은 삶을 겸손하게 바꾸는 법을 알려줄 것이므로.


첫날의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설록을 끝으로 근처의 유리의 성을 지나 간선도로를 따라 중문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했다. 이번 여행은 어렵사리 거머쥔 시간인지라 숙소는 조금 많이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중문 숙박지내에서 가장 서비스가 좋다는 신라호텔에서 갖은 할인방법(?)을 동원하여 정원이 딸린 패밀리형 룸으로 정했다. 값비싼 서비스요금만큼 호텔 직원들은 모두 한결같이 친절했으며 있는 듯 없는 듯 편하게 한다. 배정 받은 룸은 호텔에 딸린 야외수영장과 가까워 호텔 내 부대시설을 누리기에 아주 흡족했으며 지나칠만큼의 여유를 마음껏 누렸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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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9-2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주 풍광이 기가 막힌데요.
그리고 올레 국수는 첨 듣는데다 한번도 못 먹어봤어요. 이런.
눈에 익은 테디베어 박물관이 보이는군요.
대신 눈으로 보는 제주도..... 이것도 설레네요. 역시 멋진 섬입니다.

穀雨(곡우) 2010-09-28 19:50   좋아요 0 | URL
올레국수, 맛납니다. 그리고 인형박물관이 비슷비슷한게 많이 생겼어요.
마고님 말씀하시는 곳은 아마 중문에 있는 테디베어박물관이지 싶어요.
또 어딘지 모르겠지만 조안베어라는 곳도 있다는군요. 얄팍한 상술이지만
아이들은 어찌나 좋아라하던지....
그래도 제주는 머무는 것만으로도 설렙니다.^^

blanca 2010-09-2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야심한 시각에 올레국수와 오설록 롤케잌 얘기는 잔인합니다.^^;; 남편과 아이 없을 때 몇 번 다녀 온 그곳이 곡우님의 기행문으로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아이들이 참 이뻐요. 테디움 박물관에 저희 아이도 꼭 데려가고 싶어요. 제가 갔을 때는 없었는데. 태어날 아기도 함께 가족이 참 행복한 여행을 다녀오셨군요...

穀雨(곡우) 2010-09-28 22:54   좋아요 0 | URL
음..제가 봐도 잔인하네요..ㅋㅋ
담번엔 블랑카님도 아이 데리고 다녀 오세요.
모든 게 새록새록 좋았어요..^^
 

 
일상에서 비켜난다는 것은 때론 자극이 되는 일입니다. 도시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일정한 틀 속에서 매일 쳇바퀴돌듯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 틀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지만 한 번 즈음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9월의 달콤한 휴가와 일상의 이탈은 매혹적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세상이 차오르고 마음은 혼곤히 젖어 들었습니다. 잠시 궤도를 수정해서 달려 보는 것도 결코 허투루 사는 것이 아님을 체득합니다. 이처럼 여행은 삶의 완급을 조절하고 쉼을 통해 비워진 감성의 에너지를 채우는 멋진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행 내내 제주의 하늘을 높고 푸르렀습니다. 가을을 시샘하듯 뒤 늦은 폭염이 쏟아졌지만 모처럼의 여행에 장애가 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가는 곳, 보는 곳마다 눈길이 머물고 마음은 평온에 휩싸였습니다. 제주도의 그 푸르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푸름입니다. 

대양의 원대한 공기를 마음껏 채우기위해 가슴이 벅차 올랐지만 시간은 참으로 속살같습니다. 시간의 요상한 관념의 사이, 아쉽기도 야속하기도 하지만 마음만은 추억을 담고 기약없는 날을 헤아려 봅니다.  

다시, 일상입니다.

부러 밀쳐 냈던 책도, 글쓰기도,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빈집이지만 관심을 갖고 들러 주신 님들에게도 부족한 글이나마 트위터처럼 굴러야겠습니다. 
 

덕분에 달콤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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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달콤한 여행이셨다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ㅎㅎ가을처럼 찰진 글...기대하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9-28 09:25   좋아요 0 | URL
모처럼 쉬었으니 찰지진 못해도 한 걸음 나간 글이 되었음 하는
바람입니다. 마기님도 추억이 가득한 가을 되시기를....^^

2010-09-27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9-2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름 휴가 다녀오셨군요?
제주도라..... 덥긴 하지만 싱그러웠겠어요.

그러나 일상의 복귀! 환영합니다.

穀雨(곡우) 2010-09-28 09:27   좋아요 0 | URL
네. 아주 늦은 여름 휴가였지만 날씨만큼은 한여름이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어요. 쭉~~~

blanca 2010-09-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가는 시간은 정말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아요. 얼마나 아쉬운지. 그래도 일상에서 그 기억을 곱씹어 보며 또 힘이 되더라구요. 곡우님도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하늘 맘껏 기억 속에 저장해 두시고 수시로 꺼내 보시며 힘차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穀雨(곡우) 2010-09-28 09:29   좋아요 0 | URL
힘차게 살아가려 하는데 고갈된 에너지를 푸름으로 가득 채워서 인지
일이 손에 잘 안 잡혀요...ㅋㅋ
블랑카님도 행복하고 풍성한 가을 되시길 바랄께요...^^
 

이번 추석은 모처럼 연휴가 길어서 여유의 폭이 긴장을 늦춥니다.

이래저래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테지만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가족과 친구 소식에 흐뭇하기만 합니다.

 

저는 자고 나란 곳에서 줄곧 살았기에 귀성길 전쟁을 대하면 사뭇

거리감이 듭니다. 그 고생이야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마는 한번은

어딘가로 달려가 반겨줄 고향이 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면

배 부른 소리로 들리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손이 귀한 집안이라 일가친척이 드문드문해 시끌벅적한

명절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연휴에 저는 늦은

여름휴가를 이제사 가려고 합니다. 물론 추석 전에 돌아오는

일정이라 크게 무리없이 추석이 주는 막간의 여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주의 푸른 하늘 속과 넓은 바다의 안에서 이글을

포스팅합니다. 이국적이라는 판이 박힌 말이 듣던 것과 보는 것의

경계에서 황홀하게 무너집니다. 제주의 풍광은 바람이 빚고

태양이 채웠음을 피부 깊숙히 스며듭니다.

 

아이들은 새벽 잠 부비고 일어나 첫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지치지도

않는지 에너지가 넘칩니다. 옆지기의 완연한 미소, 입덫으로 인해

고생하던 거뭇한 눈가가 펴짐에 여유가 찾아듬을 압니다.

 

여행은 경직된 눈매를 풀어 주고 뭉친 마음을 느슨하게 이완시켜주는

것임은 다시금 느낍니다. 저 혼자만 흥겨운 여유에 빠져 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들지만 제대로 잘 쉬었다 돌아 가는 것이

나으리란 믿음으로 푹 취했따 돌아 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추석은 평안하고 즐거운 한가위 명절이 되시기를

바라며 부족한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행복한 추석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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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9-1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평안하고 행복한 추석이 되시길요~.^^

穀雨(곡우) 2010-09-27 17:55   좋아요 0 | URL
이제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추석 긴 연휴, 아쉽지만 행복했습니다.^^

pjy 2010-09-2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둥이랑 즐겁게 더 재미난 추석이 되시길 바랍니다^^

穀雨(곡우) 2010-09-27 17: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재미난 추석이 되었습니다.^^

비로그인 2010-09-2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중이신가요?
행복한 명절 보내신거죠?!

穀雨(곡우) 2010-09-27 17:56   좋아요 0 | URL
여행에는 진즉에 돌아왔건만 인터넷을 도통 할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사 복귀합니다.^^
 

 

늦은 오후의 일이다. 격앙되고 힘이 들어 간 상담원의 낯선 전화는 으레 스팸처럼 걸러 내려가기 마련이다. 고객님을 VIP로 모시겠다는 달달한 말로 추켜 세워주던 시대도 지났건만 우직한 목소리에서 뿜어 나오는 간청의 프로포즈는 의외였다. 그것도 나긋나긋한 여성 상담원이 아닌 굵은 테너의 남성이라 더욱 그랬다.

 

그가 던진 제안은 창비의 계간지에 연간구독회원이 되어 달라는 전언이었다. 그네의 사정이 절박한 지 알길 없으나 전화선을 타고 넘는 감정은 절박했다. 창비의 계간이 읽히고 안 읽히고를 떠나 그 상담원에게 할당된 몫은 줄지도 않는 고장 난 눈금의 지침처럼 멈춘 듯 했다. 오늘이 두 번째 전화다. 바쁜 외근 길에 걸려 온 전화는 건성으로 넘기고 고려해 보겠다는 기약 없는 변을 달고 사정없이 끊어 내지 못한 나의 마음 어딘가를 파고들었음은 당연하다.

 

나는 가끔 상담원의 전화가 불편하기 보다 애잔하게 다가 올 때가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보험이 출시되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자동응답기처럼 토해내고 물건을 파는 상담원들의 전화가 저릿할 때가 있다. 상담원의 전화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있다. 내키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부단히 사투하는 찰나의 현장이 치열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난 막연한 적의를 품어 대할 수 없다. 사람 좋아서도 아니고 그네들이 겪을 고통, 숨 가쁘게 달려야 할 불편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화선을 타고 넘어 온다. 신경숙 선생의 전화벨은 결핍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나에게 걸려 오는 상담원의 전화는 처절한 현실이다.

 

그의 전화가 딱 그랬다. 닿을 듯 말 듯 승낙의 언저리에서 달리는 평행선은 긴장이 고조된다. 듣는 이로서는 짜증이 날 테고 지겹게 듣고 닳아빠진 레퍼토리이겠지만 그에게는 긴박하다. 그의 부탁, 난 뿌리치지 못했다. 이유는 3가지다. 창비의 계간이 마음에 흡족할 만큼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들의 동향과 트렌드를 익히기에는 더 없이 좋다는 이유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간절함이었다. 진정성에서 묻어 나오는 간절함과 한 때 문학을 흠모했을 그의 언변에서 풍기는 야릇한 향기에 취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덤으로 끼워 주는 책도 있다는 말에 혹해 내질렀다고 하면 너무 삭막해질게 뻔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뿌리치지 못한 이유는 글 몸살이다. 책을 읽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제대로 쓰는 것에는 소원한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 이렇다 할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글에 대한 생각을 붙들어 매는 연습을 한 것도 아니므로 매번 글을 쓴다는 것은 상당한 진통이 뒤따른다. 해서 계간지에 실린 전문비평가의 매서운 눈을 통해 책을 드려다 보는 연습을 하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다. 누구나 생각을 글로 써 나가기는 쉽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탄탄한 문장력을 기반으로 은유적 작법을 구사하는 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눈으로 익히고 쓰고 반복하기를 숱하게 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시발점은 서평, 리뷰다.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개별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책과 합쳐지는 교차점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문장과 정제되지 못한 글의 행방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로감을 몰고 다니며 반듯한 인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의 신문서평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 윤색되지 못한 개성을 잃은 글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글 몸살은 늘 이러한 깊이를 모르는 늪에 빠져 들기 일쑤다. 일종의 매너리즘처럼 다양화되지 못하고 색깔을 잃은 글로 지지부진해진다. 글은 타자의 시선을 속살같이 끌어안아야 하며 잡은 끈을 통해 매듭을 짓고 풀기를 반복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감상이 되었든 통찰이 되었든 힘이 없는 글은 베낀 글보다 못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마 그의 전화가 나의 이런 빈틈을 제대로 짚어냈지 싶다. 운이 맞았고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도 그것도 진정성이 낳은 결과다. 참고로 창비의 계간은 통권 150호를 발간하고 지난한 역사의 한 가운데를 오도카니 눌러 선 인식 있는 간행물이다. 그러니 나의 이러저러한 이유가 다 소용이 없다할지라도 나는 앞으로 1년 동안 4번의 창비의 소리를 듣고 득음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혹여 공감한다면 구독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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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동감해요...저도 그런 편입니다...전화선 너머 현실. 저릿함. 아아..너무 와닿아요...영업분야가 삶의 현장과 그리고 그 절절한 생존의 무게와 가장 통하는 것 같아요. 할당량. 흑흑. 기억이 스멀스멀. 계간지 저는 문동꺼 한 번 읽어 봤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구요. 곡우님 글 김훈 생각나요. 더 닦으시면 위로 훌쩍 올라가실까 걱정됩니다^^;; 곡우님 글 읽으며 이쁘고 고운 어휘들 많이 발견합니다.

穀雨(곡우) 2010-09-15 08:5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은 제게 박카스같은 넘치는 에너지를 줍니다.
모자란 글도 이쁘다 해 주기를 반복하니 제가 진짜
잘 난 줄 안다니까요...^^
김훈선생님 글처럼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ㅋㅋ

세실 2010-09-1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곡우님도 이리 글에 대해 고민하시는데 저도 더욱....불끈^*^
서평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서평지를 읽으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요 서평지는 어려워서 읽기 힘들어요. 전 그저 쉬운 서평을 쓰고 싶은데...ㅎ
blanc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글 참 맛깔스럽게 쓰세요^*^

穀雨(곡우) 2010-09-15 09:02   좋아요 0 | URL
제글이 어딘지 모르게 싱겁고 객쩍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글이 저 글 같고 개성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해서 제 로망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쉽고 간결하고 임팩트하게....
글을 적는거예요....^^ 한방에 훅~~^^

열시에산다 2010-09-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굵은목소리의 창비 상담원의 전화를 받고 저 역시 구독을 하고 있는데.. 그분 정말 대단하신 듯 합니다. 그후로 가을호까지 3번의 책을 받았고 이제 한 번 남았네요. 그래도 구독하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책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계간지를 읽으며 책을 읽는 사람에서 책을 쓰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곡우님의 정진하시는 모습 멋있습니다. 화이팅!!

穀雨(곡우) 2010-09-17 17:50   좋아요 0 | URL
내공이 부족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혹여 이러다 정말 글이라도
술술 흘러 나올까 싶은 어설픈 마음에.....ㅎㅎㅎ

열시에 사는넘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딸아이와 제 엄마와의 사이는 각별하다. 몇 해의 계절을 뒹글며 경험하는 동안 훌쩍 웃자라버린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기만 하다. 그 호기심을 해갈해 주는 통로는 바로 엄마다. 엄마의 표정과 행동에 담긴 틈새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 가 앵무새처럼 느닷없이 엉뚱한 지점으로 아이는 거침없이 뱉어 낸다. 아이의 의식세계의 어느 지점에 걸려 있던 흡수했던 모방의 흔적이 툭 튀어 나온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예측할 수 없다. 어디로 날아 갈 지 행방이 묘연하다.

 

이른 저녁을 끝내고 자기 전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각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 든 새로운 생명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유치원에서 배운 지식과 의문이 겹쳐지는 접점에 이른 모양이었다. 아이는 태연작약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배 속의 아기 씨는 아빠에게 뺏아 온거야?

 아님 아빠가 엄마에게 준 거야?"

 

순간, 몰아치는 황당함, 뒤이어 몰려 오는 엉뚱함이 유발한 폭소.....

 

자지러질 듯 웃음을 선사한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커다란 눈망울만 재빠르게 굴리기에 바쁘다. 아이가 가진 지식의 경험치로는 분명 주고 받는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리라. 아이의 눈에 비친 새 생명의 출현과 사고에 대한 경계는 소화내기 힘든 현실이다. 분명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제 엄마의 신체변화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을테고, 아이의 눈으로는 아빠의 것으로 인식되는 아기 씨를 어떻게 엄마가 가져 왔느냐는 도통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같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소유의 대상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아이의 영악함에 놀랐다기 보다 순수한 생각의 우듬지에서 걸러 나온 엉뚱기발한 생각이 신통방통하다. 한창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이라서 그렇다지만 아이의 세상은 어른의 경직된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므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행위는 아이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주는 리시버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칫 정제되지 못한 말랑말랑한 생각을 기존의 관념으로 자르고 해체하다 보면 아이에게는 저항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는 유아서의 대체법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거리감이 든다.

 

나는 재차 아이의 눈에 담긴 호기심을 곱씹어 본다. 아이의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흘러 나왔을지를 가늠해 보고 아이가 내 놓은 결과치에 딱 부합할 정도의 언어로 다시 보내 주려 노력한다. 아이에게 아기의 탄생은 닭이 알을 쑥쑥 낳는 것과 같은 맥락의 수준이다. 드러난 그 대로 불쑥. 그러니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압축되고 추상적인 대답은 막연하다. 그 막연함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이의 눈망울이 대변해 준다. 아이에게 1+1=2라는 공식보다 1+1=3이 될수도 있다는 불가해의 영역처럼 말이다.

 

"너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의 결실이란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아끼기 때문에

 아빠의 몸에 있는아기 씨를 엄마의 아기 집으로 보내

 준 거란다."

 

성(性)이라는 게 대 놓고 말하기가 참 민망하다. 구성애 여사의 말씀에 의하면 성은 아름답고 솔직해야 된다는 데 나는 한참을 멀었다. 이건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는 더 뒤로 뒤로 밀쳐진 이야기였을테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엄마의 배꼽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왜곡되고 결락된 진실은 가뭇없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솔직함을 요구하고 그렇게해야 제대로 된 부모 구실을 한다. 부모의 의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지겨울만큼 확증된 사실이므로 달리 토를 달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아이에게 성에 대한 관념을 심어 주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한 것은 변함없다. 유치원에서 주워 들은 아빠와 엄마의 신체구조에 따른 성 아이덴티티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직접 대입해 보는 것을 보면 어설픈 은닉은 위험하다. 더불어 생각이 든 한 꼭지. 아이는 이렇게 크고 자라는 구나하는 조화로운 진실에 겸허해진다. 그동안 나의 굳은 생각의 프리즘으로 아이를 재단한 것은 아닌지하는 겸연쩍은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철 지난 광고 하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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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젤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예요, 그쵸?

穀雨(곡우) 2010-09-10 15:24   좋아요 0 | URL
전 크게 웃었습니다...므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