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하는 열매라고 한다. 여행은 시간을 멎게 하고 오직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만드는 멋이 있다. 여행을 통해 얻은 시간은 자신이 가진 시간의 규칙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보석과 같다. 삶에서 여행을 뺀다면 푸석하게 말라 붙은 건조한 상태와 같을테다. 하지만 일정한 삶의 틀이 생기고 규칙에 얽매이다보면 여행을 거창한 행위의 범주로 놓기 마련이다. 여행을 어딘론가 떠날 수 있는 낭만적인 감성의 행위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여행은 계획되어야 하고 습관의 인에 의해 형성된 범주에 놓이는 관습에 구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여행이 머뭇거리게 되고 재고 따지는 일이 되는 모양이다.
나에게 여행은 늘 어딘론가의 막연한 동경에서부터다. 동경의 근원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노마드의 끝 간 곳 없는, 그 원대한 설렘을 소망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여행이 비어 버린 감성을 채워주고 재깍재깍 돌아가던 삶의 바퀴를 윤기나게 해 줄런지 모른다는 희망이 숨어 있어서다. 그런데 나는 여행을 잊어 버렸다. 여행이 나의 몸을 변화시키고 억눌린 감정의 물꼬를 틔워준다는 당연한 이치를 혼탁해진 공기에 의해 제압당했다. 막상 떠나면 이렇게 쉬운것을......
계획없이 떠난 제주여행은 8할의 설렘과 2할의 기대로 가득찼다. 그 여행의 대부분을 채워준 설렘만으로도 호르몬이 급격하게 분비되고 인생이 바뀌는 기분이다. 기분을 변화시키는 물질은 보이지 않음에도 사물의 정경을 전혀 새롭게 그린다. 매번 똑같은 일상도 설렘은 빠르게 촉수를 뻗어 나가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설렘, 그 순간의 공기는 가볍다.
제주의 하늘
제주 하늘은 맑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알길 없었으며 세상은 온통 푸르렀다. 작렬하는 태양도 푸름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지척에 있다는 잴 수 없는 거리감이 적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히려 내 마음이 멀었음을 실감하는 거리였다.
출발하기 전 온전히 안겨 있다 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일정을 느슨하게 잡았다. 외지인이 제주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거치는 렌트카를 픽업하고 관광지쿠폰을 찾는 일정은 대개가 같다. 요즘은 미리 인터넷에서 관광후보지에 대한 정보와 할인쿠폰을 구매할 수 있으며 미처 방문하지 못한 관광상품은 환불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느영나영의 안내를 통해 구매했지만 거의 할인률은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사전에 정보를 취합해서 어떻게 제주를 둘러 볼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싶다. 관광이든 휴양이든 테마를 담는 것이 제주의 풍광을 담는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상태와 아이들의 기대를 적절히 배합하는 차원에서 첫날은 늦은 아침으로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유명한 식당인 "올레국수"로 이동했다. 올레국수는 사골육수처럼 진하게 우려낸 국물과 국수를 양껏 담아 푸짐한 흑돼지수육을 소담하게 얹어 먹는 음식이다. 어디서나 맛 볼 수 없는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제주에 오면 한번은 맛보아야 하는 음식이란다. 가격도 맛도 꼭꼭 채워주는 든든한 음식이다.
올레국수
첫 출발부터 막힘없이 술술 풀린다. 여행지에서 낯선 음식과의 조우는 명성에 비해 초라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에너지가 절로 충만해 진다. 제주 시내를 벗어나는 동안 마음은 절로 풍성하게 차오른다. 곧게 뻗은 고속국도를 막힘없이 내달리는 청량감으로 인해 더 더욱 차고 넘친다. 이제 든든히 먹었으니 첫 목적지는 아이들을 위해 테디움박물관으로 고고싱.....^^
테디움박물관은 서부권역에 새로 개장한 아담한 인형 박물관으로 곰인형을 메인 테마로 동물인형을 전시하고 직접 만질 수 있는 곳으로 중문에 위치한 테디베어박물관과는 차이를 둔다. 아이들의 감성에 맞게 직접 만지고 올라타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유아가 있는 가족여행에는 꽤 호응이 좋은 곳이다. 물론 어른은 한껏 부푼 기대감을 잠시 호주머니에 넣어두어야함은 필수다.^^
아이들 위주의 사진을 찍다 보니 쓸만한 이미지가 별로다. 찍을 때는 쉴새없이 셔터를 누른 것 같은데 막상 펼쳐 보니 건질게 없다. 하지만 신나게 떠들고 놀던 아이의 표정에 허접한 사진실력은 자취를 감춘다. 형편없는 사진 실력이므로 넓은 양해를 바란다.^^
엄청난 곰, 출현. 테지움에서 가장 인기있는 곰이다. 실내가 어두워 이미지가 어둡게 나오는 것이 흠이지만 아이의 마음은 온통 곰에게 쏠린다. 미끄럼처럼 올라타고 굴러도 곰은 큼직막하고 넓은 등으로 포근하게 감싸준다. 곰의 환한 웃음이 금세 전염되는 기분이다. 한바탕 왁작찌껄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나는 다시 달렸다. 협재해수욕장을 지나 서부해안도로의 천혜의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을 시리게 담았다. 하지만 이 날 제주의 날씨는 34도를 오르내리는 찌는 듯한 폭염이 난무했다. 아쉽게도 아이들의 컨디션 난조와 옆지기의 피곤함을 이유로 차를 돌려 국내 최대 녹차 재배지 오설록으로 돌렸다. 오설록은 사시사철 푸르름이 오롯이 떠도는 곳으로 대양에서부터 불어 오는 바람과 제주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청정의 녹차가 자란다는 곳이다. 언젠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필수방문코스가 되다시피한 찌든 눈이 맑아지는 곳이다.
오설록박물관은 2층 현대식 구조로 지어 녹차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곳은 입장료가 없는 대신 상품을 파는 수익금으로 대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녹차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롤케잌이 인기만점이다. 허겁지겁 먹는 통에 제대로 된 사진은 이미 실종되었지만 대신 이것으로 대신한다.^^ 녹차 케잌의 속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달고 맛나다. 아마 재료가 신선했고 땀 흘린 후 먹는 탓에 더욱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 달콤한 부드러움이 선명하다.
오설록에서 만난 녹차의 풍광은 어마어마하다. 처음과 끝을 종잡을 수 없는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녹차의 행렬에 압도되고 폐부 깊숙히 덮쳐 오는 향기에 취한다. 어른 허리춤까지 자란 녹차의 도열이 마치 잘 가꿔진 유럽식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이는 이랑과 이랑 사이의 통로가 모두 놀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자기는 이제 두더지가 되었으니 어서 찾아 달란다. 영락없이 푸름에 빠진 모습이다.
여행은 추억을 담는다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의 궤적에서 비켜 선다는 행위가 이처럼 세상을 전혀 다르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곳이 어디든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면 나에게 부여된 삶의 선택의 방향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소통의 오랜 길에 다름 아니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자유롭다는 관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욕망이나 집착의 무게를 조금 내려 놓는다면 그 길 위에 여행이 포개진다면 삶은 여유로워지리라. 뒤처진다는 두려움, 각박한 세상으로부터의 숨막힘, 치열한 경쟁에 대한 불안감 등 모든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위안은 여행이 가진 넉넉한 치유와 사색의 힘으로 충만해진다. 여행은 삶을 겸손하게 바꾸는 법을 알려줄 것이므로.
첫날의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설록을 끝으로 근처의 유리의 성을 지나 간선도로를 따라 중문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했다. 이번 여행은 어렵사리 거머쥔 시간인지라 숙소는 조금 많이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중문 숙박지내에서 가장 서비스가 좋다는 신라호텔에서 갖은 할인방법(?)을 동원하여 정원이 딸린 패밀리형 룸으로 정했다. 값비싼 서비스요금만큼 호텔 직원들은 모두 한결같이 친절했으며 있는 듯 없는 듯 편하게 한다. 배정 받은 룸은 호텔에 딸린 야외수영장과 가까워 호텔 내 부대시설을 누리기에 아주 흡족했으며 지나칠만큼의 여유를 마음껏 누렸다.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