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제 엄마와의 사이는 각별하다. 몇 해의 계절을 뒹글며 경험하는 동안 훌쩍 웃자라버린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기만 하다. 그 호기심을 해갈해 주는 통로는 바로 엄마다. 엄마의 표정과 행동에 담긴 틈새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 가 앵무새처럼 느닷없이 엉뚱한 지점으로 아이는 거침없이 뱉어 낸다. 아이의 의식세계의 어느 지점에 걸려 있던 흡수했던 모방의 흔적이 툭 튀어 나온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예측할 수 없다. 어디로 날아 갈 지 행방이 묘연하다.

 

이른 저녁을 끝내고 자기 전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각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 든 새로운 생명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유치원에서 배운 지식과 의문이 겹쳐지는 접점에 이른 모양이었다. 아이는 태연작약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배 속의 아기 씨는 아빠에게 뺏아 온거야?

 아님 아빠가 엄마에게 준 거야?"

 

순간, 몰아치는 황당함, 뒤이어 몰려 오는 엉뚱함이 유발한 폭소.....

 

자지러질 듯 웃음을 선사한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커다란 눈망울만 재빠르게 굴리기에 바쁘다. 아이가 가진 지식의 경험치로는 분명 주고 받는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리라. 아이의 눈에 비친 새 생명의 출현과 사고에 대한 경계는 소화내기 힘든 현실이다. 분명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제 엄마의 신체변화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을테고, 아이의 눈으로는 아빠의 것으로 인식되는 아기 씨를 어떻게 엄마가 가져 왔느냐는 도통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같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소유의 대상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아이의 영악함에 놀랐다기 보다 순수한 생각의 우듬지에서 걸러 나온 엉뚱기발한 생각이 신통방통하다. 한창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이라서 그렇다지만 아이의 세상은 어른의 경직된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므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행위는 아이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주는 리시버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칫 정제되지 못한 말랑말랑한 생각을 기존의 관념으로 자르고 해체하다 보면 아이에게는 저항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는 유아서의 대체법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거리감이 든다.

 

나는 재차 아이의 눈에 담긴 호기심을 곱씹어 본다. 아이의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흘러 나왔을지를 가늠해 보고 아이가 내 놓은 결과치에 딱 부합할 정도의 언어로 다시 보내 주려 노력한다. 아이에게 아기의 탄생은 닭이 알을 쑥쑥 낳는 것과 같은 맥락의 수준이다. 드러난 그 대로 불쑥. 그러니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압축되고 추상적인 대답은 막연하다. 그 막연함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이의 눈망울이 대변해 준다. 아이에게 1+1=2라는 공식보다 1+1=3이 될수도 있다는 불가해의 영역처럼 말이다.

 

"너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의 결실이란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아끼기 때문에

 아빠의 몸에 있는아기 씨를 엄마의 아기 집으로 보내

 준 거란다."

 

성(性)이라는 게 대 놓고 말하기가 참 민망하다. 구성애 여사의 말씀에 의하면 성은 아름답고 솔직해야 된다는 데 나는 한참을 멀었다. 이건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는 더 뒤로 뒤로 밀쳐진 이야기였을테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엄마의 배꼽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왜곡되고 결락된 진실은 가뭇없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솔직함을 요구하고 그렇게해야 제대로 된 부모 구실을 한다. 부모의 의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지겨울만큼 확증된 사실이므로 달리 토를 달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아이에게 성에 대한 관념을 심어 주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한 것은 변함없다. 유치원에서 주워 들은 아빠와 엄마의 신체구조에 따른 성 아이덴티티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직접 대입해 보는 것을 보면 어설픈 은닉은 위험하다. 더불어 생각이 든 한 꼭지. 아이는 이렇게 크고 자라는 구나하는 조화로운 진실에 겸허해진다. 그동안 나의 굳은 생각의 프리즘으로 아이를 재단한 것은 아닌지하는 겸연쩍은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철 지난 광고 하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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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젤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예요, 그쵸?

穀雨(곡우) 2010-09-10 15:24   좋아요 0 | URL
전 크게 웃었습니다...므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