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일이다. 격앙되고 힘이 들어 간 상담원의 낯선 전화는 으레 스팸처럼 걸러 내려가기 마련이다. 고객님을 VIP로 모시겠다는 달달한 말로 추켜 세워주던 시대도 지났건만 우직한 목소리에서 뿜어 나오는 간청의 프로포즈는 의외였다. 그것도 나긋나긋한 여성 상담원이 아닌 굵은 테너의 남성이라 더욱 그랬다.

 

그가 던진 제안은 창비의 계간지에 연간구독회원이 되어 달라는 전언이었다. 그네의 사정이 절박한 지 알길 없으나 전화선을 타고 넘는 감정은 절박했다. 창비의 계간이 읽히고 안 읽히고를 떠나 그 상담원에게 할당된 몫은 줄지도 않는 고장 난 눈금의 지침처럼 멈춘 듯 했다. 오늘이 두 번째 전화다. 바쁜 외근 길에 걸려 온 전화는 건성으로 넘기고 고려해 보겠다는 기약 없는 변을 달고 사정없이 끊어 내지 못한 나의 마음 어딘가를 파고들었음은 당연하다.

 

나는 가끔 상담원의 전화가 불편하기 보다 애잔하게 다가 올 때가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보험이 출시되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자동응답기처럼 토해내고 물건을 파는 상담원들의 전화가 저릿할 때가 있다. 상담원의 전화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있다. 내키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부단히 사투하는 찰나의 현장이 치열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난 막연한 적의를 품어 대할 수 없다. 사람 좋아서도 아니고 그네들이 겪을 고통, 숨 가쁘게 달려야 할 불편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화선을 타고 넘어 온다. 신경숙 선생의 전화벨은 결핍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나에게 걸려 오는 상담원의 전화는 처절한 현실이다.

 

그의 전화가 딱 그랬다. 닿을 듯 말 듯 승낙의 언저리에서 달리는 평행선은 긴장이 고조된다. 듣는 이로서는 짜증이 날 테고 지겹게 듣고 닳아빠진 레퍼토리이겠지만 그에게는 긴박하다. 그의 부탁, 난 뿌리치지 못했다. 이유는 3가지다. 창비의 계간이 마음에 흡족할 만큼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들의 동향과 트렌드를 익히기에는 더 없이 좋다는 이유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간절함이었다. 진정성에서 묻어 나오는 간절함과 한 때 문학을 흠모했을 그의 언변에서 풍기는 야릇한 향기에 취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덤으로 끼워 주는 책도 있다는 말에 혹해 내질렀다고 하면 너무 삭막해질게 뻔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뿌리치지 못한 이유는 글 몸살이다. 책을 읽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제대로 쓰는 것에는 소원한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 이렇다 할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글에 대한 생각을 붙들어 매는 연습을 한 것도 아니므로 매번 글을 쓴다는 것은 상당한 진통이 뒤따른다. 해서 계간지에 실린 전문비평가의 매서운 눈을 통해 책을 드려다 보는 연습을 하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다. 누구나 생각을 글로 써 나가기는 쉽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탄탄한 문장력을 기반으로 은유적 작법을 구사하는 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눈으로 익히고 쓰고 반복하기를 숱하게 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시발점은 서평, 리뷰다.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개별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책과 합쳐지는 교차점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문장과 정제되지 못한 글의 행방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로감을 몰고 다니며 반듯한 인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의 신문서평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 윤색되지 못한 개성을 잃은 글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글 몸살은 늘 이러한 깊이를 모르는 늪에 빠져 들기 일쑤다. 일종의 매너리즘처럼 다양화되지 못하고 색깔을 잃은 글로 지지부진해진다. 글은 타자의 시선을 속살같이 끌어안아야 하며 잡은 끈을 통해 매듭을 짓고 풀기를 반복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감상이 되었든 통찰이 되었든 힘이 없는 글은 베낀 글보다 못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마 그의 전화가 나의 이런 빈틈을 제대로 짚어냈지 싶다. 운이 맞았고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도 그것도 진정성이 낳은 결과다. 참고로 창비의 계간은 통권 150호를 발간하고 지난한 역사의 한 가운데를 오도카니 눌러 선 인식 있는 간행물이다. 그러니 나의 이러저러한 이유가 다 소용이 없다할지라도 나는 앞으로 1년 동안 4번의 창비의 소리를 듣고 득음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혹여 공감한다면 구독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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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동감해요...저도 그런 편입니다...전화선 너머 현실. 저릿함. 아아..너무 와닿아요...영업분야가 삶의 현장과 그리고 그 절절한 생존의 무게와 가장 통하는 것 같아요. 할당량. 흑흑. 기억이 스멀스멀. 계간지 저는 문동꺼 한 번 읽어 봤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구요. 곡우님 글 김훈 생각나요. 더 닦으시면 위로 훌쩍 올라가실까 걱정됩니다^^;; 곡우님 글 읽으며 이쁘고 고운 어휘들 많이 발견합니다.

穀雨(곡우) 2010-09-15 08:5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은 제게 박카스같은 넘치는 에너지를 줍니다.
모자란 글도 이쁘다 해 주기를 반복하니 제가 진짜
잘 난 줄 안다니까요...^^
김훈선생님 글처럼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ㅋㅋ

세실 2010-09-1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곡우님도 이리 글에 대해 고민하시는데 저도 더욱....불끈^*^
서평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서평지를 읽으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요 서평지는 어려워서 읽기 힘들어요. 전 그저 쉬운 서평을 쓰고 싶은데...ㅎ
blanc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글 참 맛깔스럽게 쓰세요^*^

穀雨(곡우) 2010-09-15 09:02   좋아요 0 | URL
제글이 어딘지 모르게 싱겁고 객쩍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글이 저 글 같고 개성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해서 제 로망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쉽고 간결하고 임팩트하게....
글을 적는거예요....^^ 한방에 훅~~^^

열시에산다 2010-09-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굵은목소리의 창비 상담원의 전화를 받고 저 역시 구독을 하고 있는데.. 그분 정말 대단하신 듯 합니다. 그후로 가을호까지 3번의 책을 받았고 이제 한 번 남았네요. 그래도 구독하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책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계간지를 읽으며 책을 읽는 사람에서 책을 쓰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곡우님의 정진하시는 모습 멋있습니다. 화이팅!!

穀雨(곡우) 2010-09-17 17:50   좋아요 0 | URL
내공이 부족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혹여 이러다 정말 글이라도
술술 흘러 나올까 싶은 어설픈 마음에.....ㅎㅎㅎ

열시에 사는넘님, 반갑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