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로마사 이야기
박홍규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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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박홍규 교수님이 해설해주신 15세기 피렌체 사람 마키아벨리 (Machiavelli) 정치사상 입문서 입니다.

흔히 ‘로마사 논고’로 알려진 ‘ 리비우스 강연( The Discourses on Livy)’에 대한 해설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진 대표저작 ‘군주론 (The Prince)’을 같이 설명하면서 마키아벨리가 추구했던 정치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기쉽게 설명했습니다.

저자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마키아벨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선대 학자들에 위해 잘못이해된 대표적인 사상가입니다. 즉, 마키아벨리는 현실정치의 교활한 속성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공화정을 모델로 인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정’을 주장한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를 통치한 메디치가의 독재적 통치가 피렌체의 인민들에게 결코 도움이 된 통치체제가 아니었다는 비판적 견지에서 이 ‘리비우스 강연 ‘을 저술했습니다. 이책은 로마의 제정( 帝政 )이 실시되기 이전의 역사인 리비우스의 ‘Early History of Rome’ 제 1권부터 10권까지만을 대상으로 마키아벨리가 15세기 당시 피렌체의 정치상황에 대한 정치비평을 한 책입니다.

학계에서는 군주론과 리비우스 강연 모두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책으로 (16세기 초) 어떤 책이 먼저 저술되었는지에 대한 확인된 사실은 없다고 합니다.

박교수께서 이 책을 저술한 시점이 2017년 1월로 한국은 당시 촛불집회를 통해 대한민국 헌법 1조1항 ( 국민주권조항)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정농단과 기득권 세력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9년 12월 현재 적폐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개혁의 입법을 통한 제도화는 모두 실패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큰소리를 치는 황당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원래 경제에 관심을 가지왔던 제가 정치관련서를 읽기 시작한 것도 ‘정치없는 경제’가 얼마나 공허한 말장난인가를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이고 정치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으면 승자독식사회에서 매장되기 일수인 현 상황에서 현재 서구의 민주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는 것은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아울러 지도자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제대로 다시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 입문서에 딱 맞게 책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별하면,
1. 마키아벨리는 어떤 사람인가? 그가 쓴 책과 르네상스 피렌체는 어떠했는가?
2. 리비우스는 어떤 사람인가? 리비우스 강연은 어떤 책인가? 로마공화정의 성격은 어떠한가?
3. 리비우스 강연의 내용은 무엇인가?
4. 리비우스의 강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따라서 이책을 읽고 번역본이든 영역본이든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초 배경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고전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상식’에 기반한 발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상식’에 맞는 발언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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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패전론 - 전후 일본의 핵심
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이숲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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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에 출간되고 2017년 번역되어 한국에 나온  이 책은 최근 전후(戰後)  최장수 총리로 재임기록을 세운 아베신조 (安倍晋三)총리의 현 자민당 극우 정권이 어떻게 현재와 같은 비정상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비판하는 책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어놓은 천황제 입헌 정체가 사실상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미군의 일본 점령이후 천황의 절대적 권위와 군 통수권을 모두 몰수하고 상징천황제로 형식이 바뀌었지만 일본인들은 아직도 메이지 정부가 만들어 놓은 관료체제와 그 정신세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입헌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정치인들이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고 더구나 근대이후 단 한번의 혁명도 없었던 정체된 나라이기도 하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쇼와의 요괴 (昭和の妖怪 )'로 불리웠던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이자 일본 보수 방계 (保守傍系)를 대표하는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전 일본 총리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 보수 방계계열 일본 보수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천황제 중심의 일본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주장하는 골수 정치인들입니다.

전후 일본은 전후 미국의 점령과 일본의 비무장화와 미군의 일본주둔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보수 본류 (保守本流)는 일본의 패전 직후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가 대표적입니다.
일본은 패전이후 미국의 방위력 우산 아래 경제발전에 집중해 성공한 경제를 이루었지만 1990년대 일본경제의 거품 (Bubble)이 꺼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경기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이 보수본류의 정치인들의 입김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 보수 방계인 아베신조 총리가 장기집권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최근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내정간섭에 상당하는 과격한 발언을 하며 한국에 무례한 공격을 했으며,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전혀 사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을오 2019년 7월에는 한국에 대해 전략물자 수출규제를 자의적으로 시작했고, 국제사회에 약속한 자유무역 수호에 대한 자신들의 약속을 스스로 저버렸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해 한국을 신뢰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더이상 군사정보 교류를 할 수 없다며 2015년 체결되었던 한일간의 지소미아 (GISOMIA) 를 더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이에 중국의 봉쇄를 위해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는 안보벨트를 구상하는 미국과 미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일본이 한국을 외교적, 군사적으로 압박해 왔습니다.

지난 11월 22일 한국은 지소미아에 대한 연장불가 방침을 조건부 연장으로 바꾸었지만 아직도 지소미아협정이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아직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에 대해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일본의 아베정부가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괘변을 늘어놓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책에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1.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敗戰)'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패전보다 '종전 (終戰)'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2. 이렇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전쟁기간 저지를 수많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공식적으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패전을 인정하지 않기 떄문입니다.

3. 그리고 이런 일본의 패전 부인은 결국 일본을 '영속패전(永続敗戦)'의 체제로 이끌어와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4. 일본은 패전을 부인하는 대신 모든 혁신적인 정치적인 개혁방안을 부인하고 미국에 종속되는 길을 택했으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경제번영을 가지고 왔지만 최근의 경제불황 (헤이세이 불황, 잃어버린 20년)을 통해 전후 미국의 방위력 우산아래 경제우선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5. 상징천황제로 상징되는 현재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는 미국의 군정당국이 일본에 적용하도록 요구하여 수용된 것으로 능동적으로 만들어진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본은 미국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굴종적이면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굳이 그 연원을 따진다면 메이지 초기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주장한 후쿠자야 유키치 (福澤諭吉)까지 올라갑니마만, 일본은 1860년대 이후 아시아에 위치하면서도 탈아시아를 지향하며 유럽을 추종하는 분열적 국가성격을 보여왔는데, 이런 전통적 경향이 현재에도 발현하는 것이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무시하는데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6. 현재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일본의 '패전'자체를 인정하지 않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일본인들에게 주입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른 반론이 나오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7. 또한 국체 (国体)라는 표현에 대해 주목하고 싶습니다. 국체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국가체제의 성격이나 원칙을 표현하는 용어이지만 메이지 일본에서 이 국체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즉 전후 (戰後)의 새로운 국체란 일본적 입장에서 제2차세계대전이후 천황제 중심의 일본의 국가체제를 표현하는 용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만든 이는 메이지 일본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의 발명품으로서 일본의 정치인들은 맹목적으로 이를 지키려 애써왔다는 점입니다.

즉 세계대전이후 일본의 천황제 중심 정치체계가 바로 '영속패전'이라는 말은 일본이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이태리와 함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 패배했고, 1945년 미국의 나가사키,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연합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했다' 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는 말로, 일본이 아직도 일본의 정치가들이 패전을 부인하고 은폐하면서 미국으로의 종속을 심화시키고 아울러 일본의 전후체제를 끝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8. 끝으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은 아직도 한국을 식민지 보듯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일본이 박근혜 정부에게 강제징용판결을 늦추어 줄것을 요구해서 결국 사법농단에 이르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그리고 이렇게 늦추어진 대법원 판결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로서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아직도 일본어에 편한 한국의 고위관료와 원로들이 존재하고 일본은 이들을 통해 한국을 조종할 수 있는 나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한 불완전한 국교정상화의 원죄가 있습니다.

미국은 또한 일본과의 전후관계를 맺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맺으면서 일본과만 조약을 맺었고, 한국과 중국, 소련은 당사자로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일부였다는 이유로 조약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역시 미국의 권유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체결한 것이 정설이며,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관계를 기반으로 체결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의 모든 대외관계를 결정하게 된 것이고, 한국이 대외무대에서 여태껏 독립적 변수로 취급되지 못한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미국은 제국이고, 미국이 냉전이래 지속해온 봉쇄정책(containment)는 지금도 지속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로 표방되는 유라시아의 대륙세력이 자신의 이익선인 태평양을 넘보는 것으로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충실한 부하 일본을 필두로 한국와 환태평양의 국가인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인도까지 포괄하여 중국을 더욱 더 압박하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부인해도 이건 미국이 대외적으로 제국 (Empire)의 성격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전후 미국이 봉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기득권 세력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현상유지 정책을 취했고, 이는 이책에 보여주듯 일본의 경우 전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영속패전 체제를 지속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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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음 / 까치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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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한국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초대 통감 (統監)으로 기억되는 일본의 정치가입니다.

또한 1909년 하얼빈 역전에서 안중근 (安重根)의사에게 저격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에 더 촛점이 가 있지 그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사실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 정치가로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의 원훈 (元勳, 임금이 신뢰하는 늙은 신하)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정치 사법체계를 설계한 메이지 (明治)의 설계자입니다.

이책의 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계급사회인 막부(幕府)시대 말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무사 (武士)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슈번 (長州藩) 출신의 번벌(藩閥) 세력의 일원이 되어가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메이지의 설계자로서 메이지 일본의 헌법, 사법제도,의회제도, 정당제도 그리고 외교가로서의 일본의 국제관계에 공헌하는 이토의 모습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떻게 조선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대 조선통감이 되어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기반을 다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보호통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실상의 내정을 장악하고 제도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후임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

 

 

 

 

 

 

셋째, 위의 이런 관점은 그 자체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타자화시켜서 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에서 비서구를 바라보는 문명/비문명, 우등/열등의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통치'라는 정치행위는 철저히 대한제국이 '일본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조선의 정신은 '미개하다'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되고 '일본화'될 것을 추구합니다. 소위 보호통치 시기에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이토의 통치 후반기인 헌병통치기간 더 노골화되고, 이후 대한제국의 병탄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의 '일본화'를 더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일본유학'으로 조선황족의 '일본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일본화'의 영향은 1910년 병탄이후 진행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매우 긴 영향을 남겼습니다.

 

다섯째, 이런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보호통치의 원형을 영국의 이집트 지배모델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이집트 영국영사 크로머경 (Lord Cromer)은 1882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를 식민통치 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크로머경의 식민통치 방식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크로머 경에 대한 문헌을 보아야 다시 확인이 되겠지만 아무튼 이토는 거의 그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상이 제가 좀 더 눈여겨 본 사안들입니다.

 

흥미로운 몇가지를 좀 더 부가하자면, 메이지 초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長州)와 사츠마(薩摩) 출신 인사들이 유럽,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돌아본 이와쿠라 사절단 (岩倉使節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토는 평생동지이던 이노우에 가오루 (

 

또하나, 이 책에는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많이 내용이 부족합니다.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내용 자체가 책 한권에 담기는 무리이지만 아무튼 청일전쟁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과  일본의 중국 랴오둥 반도 점령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열강 3국이 간섭한 삼국간섭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 정계는 최초로 제국주의적 활동을 대외적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열강들의 시각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고 이후 언제나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등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에 더욱 신중해지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모든 과정에서 있어 언제나 열강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확인하는 것을 철저하게 여겼습니다. 뒤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선의 식민화를 실행시키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하얼빈에서도 러시아의 실력자인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그곳을 찿았던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탄정책을 실제로 집행하기 전 중국과 만주의 정세를 살피고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여 외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개인적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러시아는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한국의 극우세력들과 연햡전선을 펴는 듯 보이고,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

 

이책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죠. 과연 조선이 그렇게 미개한 나라였는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측 사료를 보아야 알 수는 있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직도 일본을 너무 표면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메이지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직접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일본의 시각으로 서구를 바라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도 대부분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하기 이전 후기 조선의 '서학'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일본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조선 고유의 시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명이 서학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제일 끝에 나온 몇마디 구절을 소개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통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 중략 --- 

 

"일본 측은 기록에 반대되는 기록은 지워버렸거나 개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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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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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설립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Elite) 교육기관으로 일본 뿐만아니라 조선의 식민지 엘리트도 같이 양성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한 이후 미군정에 의해 '제국대학'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제국대학은 일본제국의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장 뛰어난 수재들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최신의 '근대학문'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철저한 차별교육을 행했던 일제는 조선 땅에서 사실상 '고등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아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은 보통 10여년 넘는 기간동안 일본에서 지내면서 중학교-고등학교- 제국대학의 모든 과정을 배워야 했습니다

10대 감수성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일본어를 통애 시와 소설을 읽게 되니 사실상 이들의 정체성 (identity)는 일본인으로 만들어 집니다.
모든 사고를 일본의 시각을 통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땅과 조선인들을 철저히 '타자'로 인식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도 일제 식민 말기 교육을 받았던 원로라고 불리는 고위 관료 출신들이 아직도 일본을 어려워하고 일본어가 편하다는 발언을 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소위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계 원로라는 분들을 청와대에서 모아 의견을 듣는데 일본의 애로사항을 '일본어'로 청취하고 논의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대법원이 의도적으로 개입해 '강제징용' 관련 판결을 늦추고 행정부와 거래한 사법농단만이 문제가 아니라 원로라는 분들의 이런 태도는 다분히 일제 강점기의 교육이 한국에 남겨놓은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협상이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 (attitude)가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면 한국의 소위 원로들이 보여준 지나치게 협조적인 태도는 일본이 한국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식민지 조선의 엘리듵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제국대학 (帝国大学)은 1886년 근대 일본의 초대 대각 출범 당시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일본제국대학령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총 9개의 학교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도호쿠,나고야,오사카,타이코구 그리고 게이조 혹은 경성)가 세워졌는데, 대만에 설립되었던 타이코구제국대학과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본토에 세워졌습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연구를 위해 프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 개인적으로 당시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를 존경하였기 떄문에 초기 프러시아의 제도를 많이 받아 들이는데, 대학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즉 제국대학들은 모두 프러시아의 대학을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철저하게 차별적 교육정책을 시행했는데 유일한 제국대학인 경성제대를 제외하고는 연희전문, 보성전문으로 대표되는 전문학교들이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 중 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대학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화 '동주(2016, 이준익 감독)'으로 잘 알려진 송몽규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한국에 크게 두가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번째는 현대 한국의 근대적 헌정질서 (憲政秩序)를 수립한데 기여한 것입니다.
한국 '제헌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유진오 박사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인사입니다.
한국의 제헌헌법(制憲憲法)은 유진오 박사와 조선 총독부에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제국대학 졸업생들이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당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밖에 없었고 임시정부 인사들도 일단 이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에 공화국 정체 ( 政體, forms of government)를 구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 현실적 사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들이 근대 한국의 한국과 지식사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에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상당수의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졸업 후 조선 총독부의 관료가 되거나 각급 학교의 교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초기 한국의 지식사회는 이들 제국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됩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을 정립시켰다는 평을 듣는 이병도부터 한글학회를 만들어 국어학의 기틀을 잡은 외솔 최현배 선생까지 모두 제국대학 졸업생들입니다.

한국은 '근대 (Modern)'의 개념을 서양으로보터 직접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어의 흔적과 일본식 번역에 의한 용어들이 일상생활에 존재합니다. 교육을 통한 일제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꼬리를 한국에 그대로 드리우고 있습니다.

최근 기존의 전형적인 역사해석 (conventional interpretation)을 배격하고 좀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학자들으 그저 학문의 소명이란 서양학문 또는 일본으로 들어온 서양학문의 수입으로 알았습니다.
제대로된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고, 그나마 해제가 제대로 달린 책들이 나오기 시작된 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제가 접하게 되는 영어권 학자들의 책을 보면 우선 분량에서 기가 질립니다. 한 주제에 대해 800-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즐비하고 그중 약 200 페이지는 주석과 참고문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책들은 그런 정도의 심도와 근거를 가진 책을 보기 힘듭니다.

한국의 연구환경이 아직 영어권에 비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외부인로서 추정하게 될 뿐입니다.

두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려 합니다.

하나는 어릴 적 보았던 기억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만 해도 잡지와 책은 모두 일본식으로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책은 모두 세로쓰기가 되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문고판과 유사한 작은 문고판 책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렸을 때 기억에 남겨졌던 이런 것들이 모두 일본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일본에 가보고 알았습니다.

두번째로 이책의 성격입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이책은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의 행적을 연구한 첫 연구서로 주로 도쿄/교토제국대학 졸업생들을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한국의 지식인/기득권 층의 기원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시작을 한 것으로 앞으로 후속연구가 필요한 것이지요.

요 근래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둘러싼 공방으로 한국에서 '엘리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국민을 계몽대상으로만 여기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주무른다는 사실이 어느정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이 책에서 언급된 인사들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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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거절당한 정부
이해영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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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사실 매우 슬픕니다.

제목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사회, 특히 미 중 영 소 4대 열강으로 부터 정부로서의 ‘ 승인 ‘ 을 거절당했습니다.

중국 상해(上海)와 충칭 (重慶)에 주재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 해방 당시까지 오랜기간 망명정부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 (趙素昻) 선생이 백방으로 노력을 했음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망명정부로서 열강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는 대외적인 요인과 대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대내적으로 한국독립운동 진영이 열강이 생각과는 반대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연해주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독립 운동 진영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었고 상해 중심의 임시정부 쪽은 망명정부의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력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열강들은 독립운동진영이 ‘분열’되었다고 보았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 영국,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한 세력으로만 보려고 한 것입니다.

소련은 연해주 중심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세력이 향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 볼때 더 선호되기 때문에 상해와 충칭에 있었던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할 이유가 더더욱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는 결국 절대적 패권을 거머쥔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통치를 겪은 나라들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실시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잡았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대표성을 가진 망명 정부도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의 국민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여 이런 정책 방향을 잡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제2차세계대전의 질서를 구축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방어하는 현재의 미국 대 아시아 전략의 기본 틀을 잡습니다.

한국은 그저 전후 처리 대상으로서 일본에 종속된 체 처리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러합니다.

하지만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을 못받았다는 것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무장독립운동이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을 위한 이런 정치활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이 책은 2018년 개최된 망명정부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결과물로 소품과 같은 글입니다.

짧은 글임에도 공식 외교문서를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책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출판된 여러 책 중 하나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대해 나름 간략한 소개는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프랑스의 망명정부였던 자유프랑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런던에 망명해 있던 자유 프랑스는 힘과 실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땅을 연합군보다 먼저 밟았고 이런 행위는 프랑스를 신탁 통치하려던 미국의 프랑스 정책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드골 (Charles De Gaulle)은 연합군과 미국이 꺼려했음에도 전후 프랑스 정치를 이끄는 정치가가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바라던 일이 프랑스에서는 일어났으나 한반도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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