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1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원국 작가의 역작인 ‘춘추전국이야기’11권 중 첫번째 권을 완독했습니다.

워낙 잘 알려진 책이고 이책에 대해서는 작가가 직접 출연한 팟캐스트도 유튜브에 있으니 읽기 전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이 방대한 책을 읽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제가 언론에서 읽은 공원국 작가의 글은 대체로 유목사회에 관련된 글이거나 북방지역에 관련된 글들이었는데, 이 책은 철저하게 서술을 ‘어떻게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원지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중국인들은 화이론(華夷論)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역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고대 중국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중국문명이 생겨났고, 이후 끊임없이 침략을 해오는 북쪽과 서쪽의 오랑캐(융적,戎狄)와 남쪽의 오랑캐(남만,南蠻)를 막아 중국 고유의 역사를 지켜 중국이 만들었다는 철저히 중국 중심적(Sino-centric) 관점의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秦)나라도 서쪽에 살던 융족 (戎族)과 문화적 영향을 받고 융족과 전쟁을 하며 군사력을 키워서 중국을 통일했고, 춘추시대 당시만 해도 사실상 유묵민족인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역사적 시실을 보여줍니다. 저자에 따르면 진나라는 중국의 사서와 여러 문헌에 진융(秦戎)으로 불렸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설명을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최초의 중국통일 왕조가 오랑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춘추시대 당시 중원에 살던 중국인들의 인식입니다.

잘 알려진 남쪽의 초(楚)나라도 중원의 중국인들은 이질적인 민족으로 생각했습니다. 남쪽의 오랑캐로 생각했고 춘추시대의 예법이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동쪽지역에 살던 한국인의 조상은 그저 동쪽의 오랑캐일 뿐입니다.

다만 한반도뿐만 아니라 산동반도와 요동지역을 포괄하는 동북지역에 사는 이들을 지칭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춘추시대가 시작되기 전 중국의 전설시대와 겹치는 초기국가들인 하상주 (夏商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상(商)나라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제사를 위해 사람을 제물(祭物)로 삼는 관습이 있고 왕이 죽으면 노예와 여인들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殉葬)이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서쪽의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내용으로 봐서 상나라가 제대로 체계를 갖춘 국가라기 보다는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이고 군사력으로 운영되는 군국주의 국가 상나라는 무력 이외에 다른 통치수단이 없었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는 무력이외 종법 (宗法)에 의해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영지領地)를 내리는 봉건제를 통해 통치체계를 확립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중시해 인간을 희생으로 쓰는 제사관스블 폐지라고 통치원리로서 예법을 중시하는 전통이 주나라 이후 생겨났고, 중국의 사서는 주나라의 통치모델을 수천년간 이상향으로 지목해왔습니다.

주의 동천(東遷)이후 주나라의 제후국 통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는데도, 종법에 근거한 봉건적 전제정치제도는 지속되었습니다.

오랜기간 중국과 그 주변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관계, 중국의 천자가 주변의 제후를 인정하고 책봉( 冊封)을 해주고 제후국이 책봉국에 조공(朝貢)이 확립된 시기가 바로 춘추시대입니다.

엄밀하게 시작이 된 시기는 서주(西周)시대이지만 주나라의 동천이후에도 이 조공-책봉의 관계는 지속됩니다.


이러한 체제를 수호하는 첫번째 춘추시대의 패자(霸者)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그가 기용한 재상 관중(管仲)이 등장합니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관중의 경제정책, 정치/외교정책, 군사정책, 제환공의 군사정벌 그리고 춘추시대 초기 4강자 ( 齊, 楚, 晉, 秦)들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세계최초의 경제학자로서 농업을 기반으로 상업과 국제무역에 대한 최초의 논설을 낸 관중의 정책에 대한 소개가흥미롭습나다.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통상 알려졌지만 약 2000년 전인 청동기 시대에 아담 스미스보다 정교한 경제정책과 부국강병책의 체계를 세운 고대 중국의 재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습니다.

진한대에 중국이 세계최고의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권짜리 춘추전국시대 전체를 조망하는 대중역사서의 첫책이고 따라서 책은 전체 시리즈의 윤곽을 잡고 춘추시대 이전 시기도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지리에도 상당 부분 서술을 해서 수많은 낯선 이름과 지명에도 각 제후국들의 판세를 읽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역사를 읽는 데 지리의 중요성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200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데는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감되는 것 중 하나는 정치라는 것도 세력 다툼이라는 것도 주어진 자연환경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 역사를 이야기하는데도 중요한 물길인 황하(黃河), 장강(長江), 위수(渭水), 한수 (漢水), 회수(淮水)이 장벽으로서 또 물길로서의 역할이 설명됩니다.

역사를 인문학으로만 알고 있어 자연환경을 역할은 자주 간과되어 왔는데 적절하고 이후 진행되는 전개에도 필요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으로 보면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고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춘추좌전>, <관자>,<논어>,<맹자>,<손자병법> 등을 적재적소에 인용하고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재구성합니다. 믿을 수 없는 자료나 후대에 가필된 자료들은 배제하고 가급적 사실에 근거한 사료를 인용했습니다.

사실 <춘추좌전>이라는 책을 언젠가 읽어보려 마음먹고 있었지만 기약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입문서로 이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춘추시대와 관중이라는 인물이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국역사에 대해 상당히 내공이 있으신 분이 쓰신 글이고 생각보다 중국 역사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대 정주문명에 미친 유목민족의 영향은 알려지지 않아서 더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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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라는 시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중세의 역사를 더구나 유목제국이었던 몽골제국(Mongol)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닐겁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김호동 교수님이 2015년 최초 한국어로 번역한 이 중세 수도사들의 몽골여행기는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나 2021년 현재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책에는 생소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수도사들과 그리스정교 수도사들이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같이 살며 몽골제국의 황제인 구육 칸에게 어떻게 복종하고 사는지 어떤 풍습을 지니고 사는지 자세하게 서술됩니다.

또한 서구유럽에서 선교를 위해 몽골에 온 이방인들이 몽솔인들과 서기를 통해 어떻게 서로다른 언어를 이해했는지의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라틴어가 생소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의사전달을 위해 몽골어의 라틴어 번역 뿐만 아니라 아랍어 또는 패르시아어 그리고 러시아어와 위구르어 등 여러 번역본을 서기로 하여금 적성하게 하고 아를 유럽에 전달했습니다.

꼼곰한 번역과정이 놀랍습니다.

몽골제국의 초기인 1260년대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내용을 서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당대의 역사기술 ( contemporary history)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몽골은 칭기스 칸이후 2대 우구데이 칸 그리고 3대 구육 칸이 러시아와 폴란드 등 동부 유럽지역을 침략하고 복속하고 있었던 시기이고,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치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몽골은 동쪽으로 남송과 전쟁을 일으켰고, 고려를 복속시켜 제후국으로 만들었던 시기이면서, 고려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침범하려 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사실상 두권의 몽골기행문이 합쳐진 책으로 첫번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인 플라노 드 카르피니라는 이탈리아인의 몽골기행이고 두번째가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의 루브룩 출신 수도사 윌리엄의 몽골기행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사신(使臣)은 아니었기에 이 기행이 사행기록(使行 記錄)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리를 몽골제국에 전하려 했다는 덤에서 일종의 선교여행으로 볼 수 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윌리엄) 과 교황 인노켄티우스4세( 카르피니) 를 대신해 그들의 서한을 몽골의 3대 대칸 구육 칸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같이 수행했습니다.

13세기 몽골의 기마병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서유럽 지배자들이 몽골과의 평화를 구하기 위해 대신 이들 수도사를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유목민족의 역사를 읽을 때 항상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장벽입니다.

대표적인 유목민족인 몽골의 경우만 봐도 몽골어와 중국어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면 이해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으로 국경분쟁과 교역 등으로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마찬가지로 포용적인 종교정책과 교류로 서아시아의 이슬람과도 융합되어 상당한 사료들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이란어)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더해 몽골과 만주족( 여진족) 과도 오랜기간 밀접하게 지내 만주어로 된 기록도 존재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세 유럽을 침략한 역사가 있어 몽골에 대한 기록은 유럽의 언어들 뿐만 아니라 중세의 상용 언어였던 라틴어로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책의 각주에도 같은 지역의 지명을 각국의 언어로 다양하게 불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정 지역의 지명이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위구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에서 달리 불려져 지역을 비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잡함때문에 정주 농경사회와 전혀 다른 유목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인 것은 몽골의 경우 몽골을 몽골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한화(漢化)된 제국인 대원(大元)으로 이해하던 중국 중심적인 과거의 접근방식이 몽골을 그 고유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오랫동안 농경 정주문명( settled civilization)이 유목문명( nomadic civilization)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과연 농경정주분명이 더 진보된 문명인지에 대한 회의가 일고 그에 대한 비판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책도 유럽의 중세 수도사들이 쓴 글들이라 몽골인들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이 가감없이 드러납니다.

살고 경험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글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책의 영역본인 ‘Mission to Asia ( Univesity of Toronto Press,1980)’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김호동 교수는 이책을 저본으로 삼지 않으셨지만 현재 아마존에서는 위의 언급한 영역본이 그래도 가장 일반적으로 팔리는 책 같습니다.

몽골의 세계정복이후 몽골의 후대국가에 대한 책으로는 토론토대학의 이주엽 교수가 최근 출판한 ‘몽골제국의 후예들(책과함께,2020)’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방대한 내용이 축약적으로 들어가 있어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중앙아시아 전반에 대한 기행서도 입문시 유용한 데 저는 연호탁 교수님의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글항아리,2016)’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두꺼운 착이지만 컬러사진 도판과 지도가 상당히 잘 들어가 있고 2016년 시점에서 각각 방문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유목문명/ 이슬람 문명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목지역 중 특히 연해주 환동해 지역과 북극권 그리고 만주지역과 일본의 동해안 지역 홋카이도와 사할린 등 지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정짓는다면 훌륭한 레퍼런스로 주강현 교수님의 ‘환동해문명사( 돌베개 ,2015)’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찮게 생각하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오히려 조직적으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야민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시베리아 툰드라 벌판과 연해주 극동지역 그리고 여전히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 요동지역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식하게 미국과 일본 위주로만 한국을 둘러싼 상황을 판간하는 건 따라서 위험이 너무 큰 도박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가 전체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를 탄압한다고 ‘낙인’을 찍은 건 서유럽과 미국 등 영미권 국가들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단순하게 봐서 영미권에서 전쟁에 관련 책들이 많다는 건 이들이 그만큼 수많은 전쟁과 연관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들이 비유럽지역을 가장 많이 수탈한 국가들입니다. 영국과 미국때문에 중동지역이 화약고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인된 정설입니다. 러시아가 동진을 계속해 연해주까지 온 것은 영국이 계속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막아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본인들만 문명국가인척 하는 건 대단히 위선적입니다.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날로 확장되는 최근 미국의 지식인층의 중국혐오( yellow peril)는 도를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미국이 전략 상품으로 생각하는 반도체 생산이 아시아지역 ( 특히 대만과 한국)에 몰려있어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놓기도 합니다.

한 수 아래라고 반도체 생산을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 맡겨 놓았다가 뒤늦게 후회를 하는 중입니다.
그나마 영미권 지식인층은 아니 혐오하지만 일반인들은 바깥세계에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아무튼 상황이 어떠하든 중국인들은 그냥 그들의 길을 갈 것이고 그러면 미국은 더 한 혐오발언울 내놓을 것입니다.

당장 스탠포드 후버연구소( the Hoover Institute)유투브를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확인이 됩니다.

한국인들이 여기 부화뇌동 (附和雷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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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9-14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감사합니다. 13-14세기 유라시아사에 관심이 있던 차였습니다. 김호동 교수의 역작들도 좀 더 접하고 싶어지네요. 마르코폴로 여행기가 감옥에서 구술한 내용이라 정확한 내용도 있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만큼 온전히 믿기는 어려운 점이 아쉬웠어요. 수도사들의 기록은 좀 더 신뢰감이 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제게 아직은 어려워서 읽다가 미루어둔 책이네요 ㅜㅜ

Dennis Kim 2021-09-14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작은 책이지만 내용이 밀도가 있고 저자께서 강의록을 출판하신것이라고 하시니 다른 입문서를 먼저 보시고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속학자이자 해양사 전문이신 주강현 교수의 역작을 소개드립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환동해 연구시리즈 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본문만 711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입니다.
이책에 실려있는 각주의 문헌들이 추가적 정보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완독 시도를 여러번 했으나 오늘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책의 세부내용을 전하기 앞서 총평을 하자면 지역의 해역교류사와 제국주의의 원주민 침탈사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환동해를 둘러싼 역사를 조망한 책으로 충분히 이분야에 대해 더 연구를 하거나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원하신다면 두고 읽을 기본 참고서(reference)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별 주목을 받지 않아 온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의 연해주 점령, 연해주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 간의 세력 다툼, 러시아와 일본이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 쿠릴열도의 영유권과 어장을 가지고 어떻게 이권다툼을 벌였는지 보여줍니다.

북극권에 영토가 몰려있는 러시아에게 부동항 확보는 후발제국인 러시아로서 사횔이 걸린 문제였고, 19세기 중반 크림반도를 면한 흑해(black sea) 를 통해 해양에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시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의 저지로 무산된 이후 (크림전쟁, Crimean War1853-1856) 이후 러시아는 재차 부동항을 얻기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진을 계속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마침내 항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남진을 시도합니다.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인 태국 말레이반도 싱가폴 홍콩을 통해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일본과 협력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합니다.

그 사건이 한국 근대사에서는 ‘거문도 사건 (1885)’으로 알려진 사건입니다. 대한해협에서 환동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문도를 영국 해군이 불법적으로 2년 동안이나 점령하고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한 사건입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Trans -Siberian railway )을 건설해서 시베리아의 영토와 자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시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의 원주민들을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고 러시아 문자를 쓰게 하는 등 소위 ‘문명화 ‘전략을 시도합니다.

또한 환동해 주변의 연해주 지역과 환동해 주변에 나타난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미국의 상인들은 고래 바다사자 수달 등 돈이 될만한 야생동물들을 마구 남획해 상당수의 생물들이 멸종했고 더불어 캄차카 반도애 살던 이텔멘족이 멸종합니다.

일본은 막부시대 이미 북방의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살던 아니누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이들을 일본화 시킨 뒤 복속시켰습니다. 아이누족은 일본민족보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과 혈연적 연관성이 있는 이들이지만 후발 제국 일본의 ‘문명화’과정을 거치며 정체성이 해체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만들어진 일본 정체성’을 무기로 사할린과 쿠릴열도애 대해 일본의 영유권을 러시아에게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시마네현 (島根県)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일제시기 독도애서 강치를 남획해 멸종시킨 것도 환동해를 둘러싼 교류의 맥락을 짚어야 이들 주장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저자의 ‘독도강치멸종사(서해문집,2016)’를 보시면 됩니다. 이책에서 설명된 독도강치잡이 부분과 상당부분 내용이 겹칩니다.

일본의 문호개방의 시작이 된 미국 동인도 함대의 페리제독의 개항요구 (1853)는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같은 시기 러시아도 일본에 같은 요구를 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853년 러시아의 해군증장 푸타틴이 팔라다호와 4척의 군함을 가지고 내항해 일본과 통상협정을 맺었습니다.

푸타틴은 같은 함대로 1884년 조선 근해에 나타나고 거문고와 동해안 일대를 관측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와 조선은 수교상테도 아니었고 이 와중에 세도정치로 인한 압박을 피해 백성들이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국경에 대한 합의도 이루지 못하던 답답한 상태가 이어지고 두만강이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일방적으로 국경으로 결정됩니다.

국내에 관련서가 전혀 없는 것 같은 분야 중 하나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와중에 연합국 ( 미국 영국 프랑스) 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역사입니다.

일본이 막부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에 대만( 臺灣), 류큐( 琉球) 즉 현재의 오키나와(沖繩)를 복속하고 이후 어이누족을 몰아내고 에조치(蝦夷地) 즉 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를 복속시킵니다.

조선반도 침략은 그 다음입니다. 러일전쟁이후 영국과 미국의 묵인 아래 조선반도 침략을 단행해 한일합병(1910)을 이루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꿈꾸던 대륙진출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을 세웁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많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일본이 괴뢰국으로 세웠던 만주국 출신 엘리트들이 1945년 일본 패망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이를 고찰한 연구서도 꽤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발전주의적 국가모델에 만주군 관동군 출신 인사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한국사회에 행한 정책들이 만주국애서 일제가 행한 정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한석정, 만주모던 ( 문학과지성사, 2016)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내전 (1917-1922) 시기에 연합군 ( 영국 미국 프랑스)와 함께 군대를 보내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혁명 세력인 러시아 백군과 연합해 러시아 혁명군( 적군)과 전투를 벌였고 더구나 만주국과 같은 괴뢰국을 시베리아에도 세우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저도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이미 전문가들은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고 제가 이분야를 잘 몰라서 그럴 수 있지만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애서 일본이 패전하고 미국의 사실상의 기지국가가 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 승전국으로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 이외에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말로 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서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국가들은 보수적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쉐비키들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기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이 당시 1950년대 이후 벌어질 극단적 냉전(the Cold War) 의 기원이 싹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시베리아 출병 역시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보입니다. 유튜브애서 미국의 전쟁사 교수가 이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관련서가 영어로는 존재합니다 ( Wolfhounds and Polar Bears, University of Alabama Press,2019)

확실한 것은 1910년대 영국과 미국은 당시 조선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해양세력으로서 일본과 동아시아에서의 이권을 나누고 이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당시 태평양으로 팽창을 하던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얻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미국의 루즈벨트는 철저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해 포츠머츠 조약(1905)를 성사시켰습니다.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국제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냉정합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행동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해도 이들이 한국을 시혜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특히 한국은 주한미군에 대해 돈계산 철저히 하고 각처에 있는 미군부대 정화비용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미국의 이익이 한반도에 있는 한 미군은 철수 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 초기 인류학이 발달하던 19세기 말 , 20 세기 초 ‘원시사회’의 대상으로 관찰되었고, 소위 문명국의 박람회에서 ‘희귀한 볼거리’로서 전시되었던 불편한 역사가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문명인으로 스스로 생걱했던 일본인들도 애조치의 아이누족을 전시하는 작태를 서구인들과 똑같이 행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서구 백인종들이 더 우월하다는 인식은 아직도 우리 무의식에 남아 있어 한국에 정착한 백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에게 차별행위로 일어납니다.

항상 의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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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시간에 단지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평화회의의 ‘특사’의 한 분으로만 알려진 이위종 선생에 대한 평전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책을 읽기 전까지 이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이위종 선생의 아버지는 이범진 선생으로 구한말인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민 왕후를 업고 피난을 가서 왕실에 공을 세운 이후 고종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1895년에는 일본의 경계를 뚫고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시키기 위한 ‘춘생문 사건( 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1896년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경복궁에 연금상태였던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 俄館播遷)을 성공시키고 고종과 조선왕실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일본은 대표적인 친러파 정치인인 이범진을 견제하게 되고 고종은 어쩔수 없이 이범진을 위싱턴 D.C 의 미국 공사로 임명합니다.
사실상 일제와 그 추종세력때문에 조선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의에 의해 이범진의 둘째아들 이위종은 고국을 떠나서 죽울 때까지 영원히 조선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근대적 초중등 교육을 받은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합니다. 프랑스애서부터 대한제국 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던 이위종은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이동해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관애서 외교관으로 일합니다.

이런 성장배경 탓에 이위종 선생은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막힘없이 구사할수 있는 국제인이었으며 근대적 만국공법 ( 국제법) 과 유럽의 군사학을 채계적으로 배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대부 출신 양반자제가 드물게 근대적 지식인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을사조약 당시 (1905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성리학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더구나 이범진/ 이위종 부자가 속해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외세의 동향을 도외시한체 농민들을 수탈해 배를 불리는데 몰두했다면 이위종 선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종의 명으로 네덜란드 해이그에서 열린 만국편화회의에 대한제국을 대표해 참가했지만, 이미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행사한다는 이유로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어 여론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같이 특사직을 수행했던 이준 선생의 죽음은 이후 이위종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전까지 주력하던 외교전이 더이상 조선 독립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자 다른 방식으로 전환합니다.

바로 무장투쟁입니다.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기병 병과를 공부한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다시 졸업합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기본적인 인식하에 사관학교를 다니며 전쟁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익힌 것입니다.

한국역사애서 유일무이하게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이자 국제법 전문가가 이위종 선생입니다.

이후 제정 러시아 육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동부전선 ( the Eastern Front)에서 독일군과 참호전을 경험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한 세대의 젊은 남성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한 전투에서 전사자가 2천만-3 천만이 발생하는 경우가 예사였습니다.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선생은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러시아 군당국이 다시 전투에 출전하도록 명령하여 리투아니아 전선에서 싸우게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제정러시아 육군장교에서 러시아혁명군 장교로 변신한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 혁명이후 시작된 내전에서 제정 러시아군 (백군) 과 러시아 혁명군 (적군)과의 전투에 나섭니다.

러시아 내전에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은 체코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군대를 보냅니다.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혁명군이 승리하게 되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쉐비키들은 소비에트 연방 (소련) 을 출범시킵니다.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 체제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혁명군대에서 러시아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고려인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랄산맥 서쪽에서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까지 약 7,000km를 행군하며 당시 시베리아에 진주해서 연해주에 침략거점을 만들려던 일제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합니다.

러시아 정규혁명군으로 편제된 이후 두만강을 통해 국내진공을 하려던 선생의 계획은 하지만 마지막에서 일제의 공작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1980년대까지 공산주의 세계를 갈수 없는 세계로 알고 살아온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제장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군으로 활약하며 일제에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이위종 선생의 삶은 ‘남한’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 의 영역이었습니다.

전체주의적 군사정부 아래에서 공산주의를 악이라고 배우고 공산주의를 터부시하면서 사실상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한제국이후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치며 수많은 조선인들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연해주와 간도로 이주하는 마당에 그리고 세기말 혁명의 시기를 지나며 공산주의( 사회주의) 를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도,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오랜기간 희안한 형태의 한국형 재벌형 자본주의, 혹은 국가주도형 불균형 성장론에 따른 문어발 확장식의 대기업 독점자본주의만을 유일한 사회경제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편협한 생각일 뿐이고 원래의 자본주의가 어떤 채제였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전체주의적 사회에 너무 익숙하고 그 경험이 체화되어 개개인 각자의 권리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북한에 대한 증오가 아무리 커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일본제국주의 영토침략에 저항한 무장독립운동가들을 단지 공산주의자라고 무시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 소련이 소멸한지 30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얼마전 카자흐스탄에서 영구귀국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일부 몰지각한 극우 유투버들 중에 독립운동 유공자의 현충원 안장을 ‘공산주의자를 현충원에 안장한다 ‘며 헛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식이 아예없는 견해라 듣고 무척 황당했습니다.

구 소련지역에서 왔다고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출신이라는 것도 그냥 역사적 사실입니다. 쉬쉬할 필요가 없죠. 단지 국내서적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나 서구에서 출판된 다른 책에서도 공공연히 나오는 사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재임시 미국신문에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터부시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위종 선생은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본인의 입장에서 최선인 고려인 빨치산 부대를 러시아혁명군 정식으로 편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려인 빨치산부대의 러시아혁명군 편입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들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고려인 빨치산을 상대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군 정규군과 싸운다는 의미는 곧 러시아와의 전쟁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일제의 육군참모본부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를 경계하고 그를 없애기 위해 공작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이위종 선생의 행방불명에 일본제국주의 군부가 개입했다는 점이 사료로서 확인되었다고 저자는 서술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일본 패망이후 한국사회의 상층부를 장악한 일본 제국주의에 친화적 인사들이 많았던 과거 군부정권 시절 그리고 이후 보수정권 시절 이위종 선생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학계에서 이위종 선생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던 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그가 적국 소련의 혁명군 장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일 겁니다.

늦었지만 러시아와 연해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배경으로 무장독립투쟝하던 인물들이 조명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공산주의자였만 현재의 북한과 별 상관도 없습니다.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의 계보를 살피는데 최근에 나온 책 한권이 도움이 됩니다.

조선공산당 평전 ( 서해문집,2017)


이위종 선생이 활약하던 10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현재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도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해양세력인 일본과 미국 그리고 타이완이 서로 대립하고 힘을 겨루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맹목적 친미만을 주장하고 대륙세력을 대표하는 강국 중국을 무시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일부 국우 인사들의 언행은 심히 우려가 됩니다.

한국은 등거리 외교를 해야할 숙명입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심지어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를 맺어왔던 중국과의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건 그냥 무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사실상 아직도 마국의 기지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 미국 편을 드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대륙과 해양세력 틈에 끼어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는 이 두나라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 한국이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일단 한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중국의 기술적 약진에 위기를 느낀 미국이 각종 매체를 통해 강한 중국 폄하 발언을 쏟아내는데 이는 미국의 위기에 대한 반증이지 한국이 그런 반응에 무조건적으로 편승하는 건 바보짓입니다.

우리의 강점을 카드삼아 동맹국과 협상을 할일이지 그냥 동조하는 짓은 배운사람이 할 일이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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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세대를 전후해서 1980-1990년대 20대 청년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작가’,’지식소매상’,’정치인’이라는 이미지 보다는 ‘항소이유서’를 쓴 1980년대 운동권의 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그 항소이유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종편채널의 예능프로인 ‘알쓸신잡’에서 언급되어 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글은 그가 정치인이 되기 전 약 30여년 전에 출간되었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1992)’을 읽은 것이 첫번째입니다.

이 책은 원래 2011년 출간된 초판본의 개정판으로 특이하게도 작가는 초판을 이미 읽었을 경우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고 개정판 서문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책이 홉스와 로크, 루소, 마르크스 등 서양의 대표적인 ‘국가이론 ‘에 대해 서술한 입문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개정신판이 출간된 것도 2016년 겨울에 있었던 ‘촛불시위’와 그 이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과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이후 작가가 문장을 손볼 필요가 있어서 개정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특징을 몇가지 요약합니다.

첫째, 내용이 충실한 ‘국가론’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홉스의 국가론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좋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 2011년-2017년 기준 한국의 현실정치 상황과 이 서양의 학자들이 주장한 국가이론이 어떤 면에서 현실설명이 가능하고 어떤 면에서 한국에 적용될 수 없는지 적절하게 설명됩니다. 알수없는 용어와 정의를 그대로 직역해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책과는 차별되는 점입니다.

셋째, 이 책의 논조와 작가의 시각은 분명하게 ‘중도적 자유주의’의 시각으로 보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등 대한민국 초기의 통치자들과 1-5공화국꺼지의 정부가 극단적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밝혔고 저는 이 평가에 동의합니다.

대통령을 ‘국부’로 떠받들거나,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보고 국민이 국가의 일부로 국민 ‘개인’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목표에 매진하도록 한 박정희 군부정권 모두 전형적인 전체주의, 국가주의 정부였습니다.
한국 군부정권의 통치스타일은 서양과 비교하면 나찌독일의 히틀러, 구 소련의 스탈린과 통치스타일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제국주의 자체가 비스마르크 시절의 프러시아로부터 법률체계와 군사제도 등에서 영향을 받았고 일제가 세운 만주국 출신 엘리트들과 군인들이 초기 대한민국 정치권을 장악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에 1945년 해방이후 1980년대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한국의 정치와 국가를 보는 시각이 ‘국가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초기의 지배 엘리트들이 아직도 민주주의/ 자유주의 대한민국을 만든 지도자들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한국 현대사를 좀더 세밀하게 보셔야 하고 이 책도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소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지는 마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책의 내용은 유시민 작가의 주장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의 철학자들이 오래전에 주장했던 국가에 대한 이론에 비추어 두 보수정권의 성격이 전체주의, 국가주의적 성격이 크다는 겁니다.

냇째, 과거의 보수정부 뿐만 아니라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들 진보세력이 ‘신념’에 의거해 무책임한 정치를 해왔다는 지적은 뼈아픈 지점입니다.
평소 진보정치세력이 구호만 외치고 일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결과를 이룰때까지 끈길기지도 않고 약속을 지키지도 않고 변절하는 행태 모두가 바로 이들이 ‘책임정치 ‘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한 때 진보진영에 몸담고 정당대표도 한 작가의 지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와 같은 제3자가 보기에 진보세력이 책임을 망각하는 건 바로 ‘무능’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다음으로 이 책과 관련하여 현 보수야당세력에 대해 한마디 말할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역사적으로 국가주의를 추구해 왔던 ‘이념형 보수’내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시장형 보수’ 두 부류 밖에 없는데 두 부류의 공통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법치주의’와 무관하다는 점입니다.

고위관료와 사법부 출신들이 기득권층을 형성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가와 재벌을 끌어들여 극단적 저유방임적인 시장주의와 작은정부’만’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말입니다.

이들이 늘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이들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보나 이들의 행태를 보나 전혀 자유민주주의와 맞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일관성조차 상실한 사실이 한국의 ‘보수’세력에 대한 불신의 원인입니다.

항소이유서를 섰던 유명한 586 정치인 출신이지만 분명 유시민 작가는 한국진보세력의 아픈 면을 알고 있고 적절히 지적했으며 책 내용이 결코 과격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끝으로 한국의 복지제도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꼭 읽어보기기 바랍니다. 특히 복지에 보수 진보가 없다는 점과 한국의 복지제도가 보수정권인 박정희 정권과 김영삼 정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힙니다. 약육강식의 경제적 경쟁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가 복지제도이고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국가의 도움으로 남들보다 우위에 선 보수 정치권과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현재의 위치에 왔다고 주장하는 것도 터무니없고, 무턱대고 작은 정부만 주장하는 몰상식을 이번 기회에 버릴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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