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시간에 단지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평화회의의 ‘특사’의 한 분으로만 알려진 이위종 선생에 대한 평전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책을 읽기 전까지 이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이위종 선생의 아버지는 이범진 선생으로 구한말인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민 왕후를 업고 피난을 가서 왕실에 공을 세운 이후 고종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1895년에는 일본의 경계를 뚫고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시키기 위한 ‘춘생문 사건( 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1896년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경복궁에 연금상태였던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 俄館播遷)을 성공시키고 고종과 조선왕실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일본은 대표적인 친러파 정치인인 이범진을 견제하게 되고 고종은 어쩔수 없이 이범진을 위싱턴 D.C 의 미국 공사로 임명합니다.
사실상 일제와 그 추종세력때문에 조선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의에 의해 이범진의 둘째아들 이위종은 고국을 떠나서 죽울 때까지 영원히 조선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근대적 초중등 교육을 받은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합니다. 프랑스애서부터 대한제국 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던 이위종은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이동해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관애서 외교관으로 일합니다.

이런 성장배경 탓에 이위종 선생은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막힘없이 구사할수 있는 국제인이었으며 근대적 만국공법 ( 국제법) 과 유럽의 군사학을 채계적으로 배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대부 출신 양반자제가 드물게 근대적 지식인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을사조약 당시 (1905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성리학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더구나 이범진/ 이위종 부자가 속해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외세의 동향을 도외시한체 농민들을 수탈해 배를 불리는데 몰두했다면 이위종 선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종의 명으로 네덜란드 해이그에서 열린 만국편화회의에 대한제국을 대표해 참가했지만, 이미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행사한다는 이유로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어 여론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같이 특사직을 수행했던 이준 선생의 죽음은 이후 이위종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전까지 주력하던 외교전이 더이상 조선 독립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자 다른 방식으로 전환합니다.

바로 무장투쟁입니다.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기병 병과를 공부한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다시 졸업합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기본적인 인식하에 사관학교를 다니며 전쟁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익힌 것입니다.

한국역사애서 유일무이하게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이자 국제법 전문가가 이위종 선생입니다.

이후 제정 러시아 육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동부전선 ( the Eastern Front)에서 독일군과 참호전을 경험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한 세대의 젊은 남성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한 전투에서 전사자가 2천만-3 천만이 발생하는 경우가 예사였습니다.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선생은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러시아 군당국이 다시 전투에 출전하도록 명령하여 리투아니아 전선에서 싸우게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제정러시아 육군장교에서 러시아혁명군 장교로 변신한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 혁명이후 시작된 내전에서 제정 러시아군 (백군) 과 러시아 혁명군 (적군)과의 전투에 나섭니다.

러시아 내전에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은 체코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군대를 보냅니다.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혁명군이 승리하게 되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쉐비키들은 소비에트 연방 (소련) 을 출범시킵니다.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 체제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혁명군대에서 러시아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고려인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랄산맥 서쪽에서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까지 약 7,000km를 행군하며 당시 시베리아에 진주해서 연해주에 침략거점을 만들려던 일제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합니다.

러시아 정규혁명군으로 편제된 이후 두만강을 통해 국내진공을 하려던 선생의 계획은 하지만 마지막에서 일제의 공작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1980년대까지 공산주의 세계를 갈수 없는 세계로 알고 살아온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제장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군으로 활약하며 일제에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이위종 선생의 삶은 ‘남한’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 의 영역이었습니다.

전체주의적 군사정부 아래에서 공산주의를 악이라고 배우고 공산주의를 터부시하면서 사실상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한제국이후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치며 수많은 조선인들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연해주와 간도로 이주하는 마당에 그리고 세기말 혁명의 시기를 지나며 공산주의( 사회주의) 를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도,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오랜기간 희안한 형태의 한국형 재벌형 자본주의, 혹은 국가주도형 불균형 성장론에 따른 문어발 확장식의 대기업 독점자본주의만을 유일한 사회경제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편협한 생각일 뿐이고 원래의 자본주의가 어떤 채제였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전체주의적 사회에 너무 익숙하고 그 경험이 체화되어 개개인 각자의 권리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북한에 대한 증오가 아무리 커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일본제국주의 영토침략에 저항한 무장독립운동가들을 단지 공산주의자라고 무시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 소련이 소멸한지 30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얼마전 카자흐스탄에서 영구귀국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일부 몰지각한 극우 유투버들 중에 독립운동 유공자의 현충원 안장을 ‘공산주의자를 현충원에 안장한다 ‘며 헛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식이 아예없는 견해라 듣고 무척 황당했습니다.

구 소련지역에서 왔다고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출신이라는 것도 그냥 역사적 사실입니다. 쉬쉬할 필요가 없죠. 단지 국내서적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나 서구에서 출판된 다른 책에서도 공공연히 나오는 사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재임시 미국신문에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터부시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위종 선생은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본인의 입장에서 최선인 고려인 빨치산 부대를 러시아혁명군 정식으로 편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려인 빨치산부대의 러시아혁명군 편입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들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고려인 빨치산을 상대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군 정규군과 싸운다는 의미는 곧 러시아와의 전쟁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일제의 육군참모본부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를 경계하고 그를 없애기 위해 공작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이위종 선생의 행방불명에 일본제국주의 군부가 개입했다는 점이 사료로서 확인되었다고 저자는 서술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일본 패망이후 한국사회의 상층부를 장악한 일본 제국주의에 친화적 인사들이 많았던 과거 군부정권 시절 그리고 이후 보수정권 시절 이위종 선생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학계에서 이위종 선생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던 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그가 적국 소련의 혁명군 장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일 겁니다.

늦었지만 러시아와 연해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배경으로 무장독립투쟝하던 인물들이 조명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공산주의자였만 현재의 북한과 별 상관도 없습니다.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의 계보를 살피는데 최근에 나온 책 한권이 도움이 됩니다.

조선공산당 평전 ( 서해문집,2017)


이위종 선생이 활약하던 10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현재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도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해양세력인 일본과 미국 그리고 타이완이 서로 대립하고 힘을 겨루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맹목적 친미만을 주장하고 대륙세력을 대표하는 강국 중국을 무시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일부 국우 인사들의 언행은 심히 우려가 됩니다.

한국은 등거리 외교를 해야할 숙명입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심지어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를 맺어왔던 중국과의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건 그냥 무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사실상 아직도 마국의 기지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 미국 편을 드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대륙과 해양세력 틈에 끼어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는 이 두나라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 한국이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일단 한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중국의 기술적 약진에 위기를 느낀 미국이 각종 매체를 통해 강한 중국 폄하 발언을 쏟아내는데 이는 미국의 위기에 대한 반증이지 한국이 그런 반응에 무조건적으로 편승하는 건 바보짓입니다.

우리의 강점을 카드삼아 동맹국과 협상을 할일이지 그냥 동조하는 짓은 배운사람이 할 일이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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