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9년 나온 논문집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류의 중심지이자 당시 경성의 경제 정치 중심지였던 명동일대에 대한 학제적 연구서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 정도의 글모음이고, 한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공부한 외국인 저자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논문들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솔직히 큰 의미를 찿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미주와 참고문헌이 잘 정리되어 도움이 됩니다.

한국의 논픽션 출판의 가장 큰 단점이 주석과 참고문헌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관행이 있는 것이고, 독자들은 저자들의 집필의도와 진정성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흔히 대중적 저서라는 미명하에 각주와 참고문헌을 생략하는데 이는 독자를 무시하는 무례한 처사입니다.

아직도 독자가 계몽의 대상이고 저자는 지식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울 뿐입니다.

각설하고, 8명위 저자가 총 7편의 각기 다른 글을 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글은 ‘명동의 역사성’을 다룬 첫 세편의 글입니다.

그 제목을 일별하면,

1. 명동, 신문화 수용과 발신의 장소

2. 복합영화상영관 메이지좌의 사회사

3. 걸 (Girl) 들의 시대

입니다.

첫번째 논문은 명동에 대한 전반적 개요에 해당하는 글로서명동이 일제 강점기 이후 새로운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미스코시, 미나카이, 히라타 백화점 등 일본계 백화점이 들어서 경성에 첨단 소비문화를 이끌어 오게 된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부분과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명동의 다방과 카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은 세번째 논문의 ‘모던 걸’에 관한 글과 서로 연결됩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백화점 여점원’에 관한 글로 ,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이상 ‘의 학력을 요구하던 백화점 여점원이 아무나 될 수 없었던 세태를 고찰합니다. 글애 나온 당시 통계에는 ‘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이상 ‘되는 여성이 1930년 당시 4천 5백여명에 불과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던 걸’이 되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두번째 논문은 현재도 명동에서 극장으로 기능하는 ‘명동예술극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 전쟁직후 이 극장이 ‘국립극장 ‘으로 사용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극장이 일제 강점기 당시 ‘메이지좌 (明治座 )’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처음 안 사실입니다.

종로의 단성사 등 조선인 전용 극장에서는 외화와 조선영화를 주로 틀었고, 남촌( 충무로와 명동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이서는 주로 일본영화를 틀다가 메이지좌가 설립된 이후 이 뚜렷한 영화상영 기준이 혼재되어가는 상황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매이지좌는 일본인 소유의 극장임에도 관객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고, 따라서 외화와 조선영화 일본어판이 상영되곤 했다고 합니다.

명동에 대한 단행본은 이외로 찿기 어렵습니다.
명동의 소비문화에 대해 김미선 연구자의 ‘명동아가씨(2012)’가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일독할 예정입니다.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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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콘래드 전문가 ( Conrad Scholar) 인 존 스태프( John Stape)가 2007년 출판한 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계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에 대한 평전입니다.

한국에는 단편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로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그의 문학활동과 삶에 대해 조망한 평전으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에 속합니다.

이글을 쓰기 위해 국내 문학사이트를 찿아 보았는데, 콘래드를 소개하는 부분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일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꽤 알려진 문학전문 사이트 세계문학 저자 소개인데도 잘못 소개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사를 잠시만 살펴봐도 알 수 있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소개해 안타깝습니다.


우선 그의 출신을 ‘폴란드 ‘라고 단정하는 건 사실 왜곡의 우려가 있습니다. 콘래드 출생 당시 폴란드라는 독립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중반 동유럽은 러시아 제국( Russian Empire)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 Austria-Habsburg Empire)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지역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출생지는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 (Berdychiv,Ukraine)라고 브리태니커 온라인 판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의 백성 (subject)로서 단지 폴란드 민족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그가 폴란드 출신 문학가라고 소개하는 건 명백히 한국 학계가 나이브 (naive)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콘래드는 영국에서 선원생홯을 하고 선원 자격을 모두 영국에서 취득한 해양전문가이자 영국인임에도 그의 출신지 때문에 생전에도 폴란드계 유대인 ( Polish Jew) 또는 러시아계 유대인 ( Russian Jew)로 오해를 받았습니다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국은 서유럽의 신교국가로 성공회가 16세기 헨리 8세이후 로만 카톨릭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런 영국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이자 로만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콘래드는 종교적으로도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1924년 그의 장례식은 아이러하게도 영국 성공회 주교좌 성당이 있는 캔터베리 지역에서 카톨릭 장례미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콘래드의 영국출신 부인과 유족들이 카톨릭 전례에 따라 미사를 행한 것입니다.

평전에서 그의 출신 배경을 두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슬라브 적 특성과 그의 특이한 영어발음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등 영어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동유럽과 러시아를 후진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평생을 영국을 조국으로 살았고 영어로 문학작품을 집필한 작가임에도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산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에서 1857년 태어난 조지프 콘래드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랍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유아기때부터 배운 프랑스어를 평생 잊지 않고 영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로 보내져 프랑스 상선을 타고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는 그가 평생 동경하던 대상으로 그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은 그가 선원생활을 할 때나 이후 전업작가로 생활할 때 프랑스 문인들과의 교류는 물론 영국 상류사회와의 교류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에게 모국어인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고 그가 평생 사용한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였습니다.

콘래드는 프랑스 작가 중 앙드레 지드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고, 지드는 콘래드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네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콘래드의 생활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와 늘 써야할 작품의 마감으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마감을 거의 지킨 적이 없을만큼 집필이 더딘 인물이었습니다. 이건 그와 아내의 지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통풍 (gout)과 기관지염( bronchitis) 등이 재발하면 병원이나 휴양지에서 요양울 해야했고, 치료비와 요양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집필도 재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런던으로 나와 고급호텔에 투숙하며 아내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거나 프랑스나 스위스의 온천휴양지에 가서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로부터 돈을 빌려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더해 그는 그 주위에 모이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가, 극작가, 저널리스트들과 끊임없이 만찬을 즐겼습니다.

이 평전에서 그의 이런 생활방식을 ‘’사치스럽다(extravagant)’로 표현 했습니다. 이름이 난 작가이고 상당한 수입이 있었지만 언제나 빚에 허덕이고, 돈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두번째,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와 영국상선을 탔던 그의 이력은 19세기 후반 항공이 도입되기 전까지 세계화의 첨단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 전에 이미 남미는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타이티, 싱가폴, 말레이지아, 버마 그리고 아프리카 콩고 등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런 이력으로 그의 소설 전반은 영미 문학의 큰 줄기인 해양모험 장르 ( Sea Adventure)에 속하고, 영미권에서 다른 문화권을 ‘이국적(exotic)’으로 바라보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비평가 애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도 그의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 에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 책을 통해서 보게된 영미 문학계의 작동방식입니다. 콘래드는 첫소설을 영국 Unwin을 통해 출판했고 1890년대 이후에는 Heinemann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미국에서 그의 책은 Doubleday 를 통해 주로 출판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콘래드는 자신의 출판 에이전트와 출판과 관련된 모든 비즈니스 계약을 관리하며 출판 에이전트와 업무적으로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가며 심지어 빚을 내기도 하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책에 따르면 콘래드가 활동하던 당시가 출판 에이전트가 활성화된 초창기이고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적극 활용해서 전업작가로 자신의 소설의 판로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통해 콘래드는 자신의 소설을 시리즈화 ( serialization) 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문학잡지에 실었는데, 이를 위해 기존의 소설 원고를 개작해 분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출판된 소설이나 단편소설집을 개작하며 새로 서문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100여년 전 영미권에서 이루어지던 출판 산업과 출판 에이전트의 여러 상황을 엿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고, 현재도 그들의 비즈니스가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콘래드 생애 후반기와 관련된 것으로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The First World War) 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 Russian Revolution)의 영향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로 현대 영문학의 초창기 작가에 해당되는 콘래드는 다른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보냈는데 그의 큰 아들 보리스 콘래드 ( Borys Conrad)는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보리스는 전장에서 받은 포탄충격(shellshock)로 평생 정신적 충격상태로 살아갑니다. 콘래드의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은 보리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빚더미에 올랐고 부인과 이혼하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보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가 러시아 제국 출신임에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10대에 우크라이나를 떠난 그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정착해 사는 동안 단 두번 고향을 방문했을 뿐이고, 두번째는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으로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던 때 독일 땅에 있던 그와 가족은 이태리를 통해 급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평생 고독하게 혼자 일생을 개척해야 했던 그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고독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의 경험이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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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세대라고 하는 세대는 저자에 따르면 일제의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로서 대체로 192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이들을 말합니다.

2017년 출간된 이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은 제가 김시덕 작가님의 ‘갈등도시( 열린책들, 2019)’를 읽던 중 언급이 되어 찿아 읽게 된 책입니다.

현재처럼 ‘극우 국가주의자 ‘들이 마치 한국 우익 보수세력의 전부인 것처럼 혹세무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 정통 우익 보수파’ 의 계보가 일제강점기 말기 이후 1990년대 초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입문서’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병세대 바로 이후 세대인 아버지와 4.19세대 어머니를 둔 서북지방 월남민 출신의 자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서북(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월남 지식인들의 주장과 삶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을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래 기호지방 ( 경기, 충청)과 더불어 가장 경제적 성공을 거둔 지역이 바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이고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류로 상공업이 발전한 지역이 서북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기호지방 출신들에 비해 정치적 차별을 받아온 지역이었습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이전 이미 이와같은 정치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이 지역은 마국의 북장로교가 전략적으로 기독교 선교를 하게됩니다. 같은 북쪽이지만 함경도와 북간도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선교지역이 됩니다.

따라서 서북지역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 아래에서 ‘보수적 기독교 ‘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후 월남하여 예장( 예수교 장로회)세력을 이루며 현재 한국의 ‘극우 근본주의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반면 이들보다 더 급진적이고 개방적인 함경도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전쟁 이후 김재준 목사의 ‘한신대학교’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고 기장(기독교장로회)을 이끌게 됩니다.

문익환 목사와 강원룡 목사로 대표되는 이 그룹은 기독교 사회운동을 통해 1960-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그룹입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성서조선’사건과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불교에서 스스로 깨우치는 것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신자 스스로가 교회이지 교회라는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무교회주의자들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에 가장 근접해 있습니다. 근래 팬데믹 와중에도 예배를 꼭 대면으로 하겠다는 ‘근본주의 극우 기독교‘와는 정반대의 노선입니다.

종교의 모습이 결국 ‘약자에게 임하는 것’이라는 점은 그들이 속한 교단이 무엇이든 결국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책의 처음과 마지막은 전 고려대 총장이셨던 김준엽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 잡지를 만들어 1950년대부터 해방이후 국가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 고민하신 분이고 일제말기 태평양전쟁 당시 학병으로 끌려갔던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미국 OSS와 국내 진공작전을 하려 했던 그야말로 ‘정통 우익’ 인사입니다.

일제부역세력들이 친미파로 바뀌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에 중국학 기반을 만드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처음과 끝에 소개된 것은 아마도 ‘일제로부터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학병세대로서의 대표성과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이라는 경력이 해방 후 국가 건설에 있어 중도적 자유민주주의를 보여주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책은 한국현대문학 연구자가 쓴 해방이후 한국현대 지성사로서 270여 패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책이지만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성찰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서북출신 인사들이 일제강점기부터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생래적 혐오’가 한국전쟁과 이들의 월남이후 과대 증폭된데다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적 통치를 거치며 한국땅에 ‘정통 보수’ 내지 ‘ 중도’ 정치 세력이 뿌리내린 적이 없었던 이 땅의 정치사를 비추어 볼때 이전에 보수를 저처하던 우파들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이런 언급을 합니다.
친일파들은 해방이후 살기 위해 우파가 되기를 바랬고 이들은 극우 국가주의적 입장을 취했지만 자신들만이 ‘우파’로서 불리길 원했고 다른 세력들이 우파를 자처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정확하게 표현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관련서 몇권 더 언급합니다.

문학연구자가 쓴 한국근현대사로는 근래 가장 인상깊었던 ‘3월1일의 밤(돌베개, 2019)’을 꼽고 싶습니다. 3.1운동 당시 뭍혀졌던 일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격변이 일제 강점기 조선에 미친 영향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도 인용한 ‘ 원형과 변용( 서울대출판부,2007)’도 같이 읽으면 좋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최대 최적이라는 경제개발계획의 기원이 사상계 그룹의 근대화론에 기인하고, 민주당 장면 정권에서 실행하려 했던 계획이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차원에서 경제개발계획에 미국의 영향력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책의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로 근래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일제가 조선인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에 관한 연구서가 나왔습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2019)’입니다. 이책의 학병세대들은 일제의 교육을 받은 거의 마지막 세대이고 학병세대 이전 세대들이 일제에 의해 어떤 교육을 받아 어떻게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이 책은 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들의 삶의 괘적을 추적하며 이들이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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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처음 페이퍼백 버전이 처음 나온 책입니다.

책 타이틀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소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역사적 사건과 소금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음식에 대한 문화사입니다.

‘음식 저술 (Food Writing)’으로 일가를 이룬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이 지은 첫번째 책으로 ‘대구 (Cod)’에 대한 저술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역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소금은 염전에서 생산되기도 하지만 소금광산에서 채취되기도 합니다.

중국 쓰촨지역에서는 4천여년 전부터 땅속에 묻혀있는 암염층에서 소금을 캐왔는데, 20세기 들어와서 채굴을 멈추었습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 해수를 염전에서 증발시키거나 팬 위에서 불을 지펴 수분을 증발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소금제조 방식이었으나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소금을 대량생산하기위해 소금이 가열하는 온도를 낮추어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진공식 증류방식 ( vacuum evaporation)이 도입되고 요오드를 첨가하게 됩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은 위와 같은 소금의 대량생산을 선도했으며, 해외시장 확보를 위해 전통적인 소금 생산지인 인도 벵골만의 소금 생산을 저지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의 생산을 억제시키고 본국의 생산품을 식민지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부를 늘려갔습니다. 인도의 경우 소금 생산을 금지했고, 결국 이 정책은 인도 독립운동의 한 단초가 됩니다.

소금은 생산 자체도 이 책의 주제가 되지만 소금을 이용해 만들어온 수많은 음식이 또한 주제가 됩니다.

중국의 경우 소금으로 만드는 각종 장류가 있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생선 젓갈도 있습니다.

소금은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 생선과 육류를 보관하는데 매우 중요한 식재료였습니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에서 청어 (Herring)을 소금에 절여 보관했었고 , 이태리 시칠리아에서는 지중해의 참치를 잡아 염장해 보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위와 같은 사실 외에 이책에서 처음 읽었던 인상적인 부분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첫째, 중국에서 소금 생산의 역사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은 소금을 요리에 직접 사용하기 보다 간장과 같은 장류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런 장류를 만드는 지역은 지중해 동남아시아 등으로 주로 생선으로 장류를 만들었습니다.

두번째, 소금은 음식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 미이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내부 장기를 모두 제거한 시신을 천연소다(natron)에 며칠간 담가 보존력을 올린 것입니다. 이집트의 미이라들이 5천년이상 지났지만 피부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소금성분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집트 테베(Thebes)와 사콰라 (Saqqara)의 미이라를 카이로로 반출하는데 당국은 미이라를 염장생선(salted fish)로 분류해 세금을 매겼습니다.

셋째, 유럽에서 소금광산에서 소금을 캐서 사용한 대표적인 종족은 켈트 (Celt)족으로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크(Salzburg; 소금도시), 할슈타트(Hallstatt; 소금 도시)등 지명으로 남은 대표적인 소금 생산지가 있습니다.

독일어권에서 생산되는 양배추 소금절인요리인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와 소금에 절인 육류(salted meat도 위의 소금 광산 지역의 암염으로 가공되는 대표적인 이 지역 음식입니다. 한국의 김치에 해당되는 자우어크라우트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약간 달리 불렸지만 레시피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음식이었습니다.

넷째, 대구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매주 금요일 육류 섭취를 금하게 되고 그 대용식으로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추운 바다에서 잡히는 대구는 유럽 전체의 수요 증가로 전 유럽에 공급되었고 염장에 필요한 소금의 수요도 같이 늘었습니다. 프랑스 브리타니 해변에서 수확한 소금은 해수를 증발시킨 것으로 대구 염장 수요 증가로 전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섯째, 청어 염장 발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웨덴의 국민 통조림인 스트뢰밍 (Strömming)에 대한 것으로 북유럽지역에서 청어를 염장발효한 것으로 지독한 냄새로 유명합니다. 서유럽에서는 이 통조림이 발효된 것이 아니라 썩은 것 (rotten)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여섯째, 신대륙, 특히 북미 지역은 독립 초기 영국의 소금 정책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영국은 대표적인 소금인 리버풀 소금 (Liverpool Salt)을 팔 최적의 시장으로 북미 지역을 꼽았고 실제로 많은 양의 리버풀 소금이 이 지역에 팔렸습니다.
문제는 북미 지역도 암염을 비롯한 소금자원이 풍부하게 있어서 영국산 소금을 수입할 이유가 없는데도 영국이 북미지역으로 소금 수출을 강행하고 북미의 소금산업 억제를 강제한 것입니다. 영국은 인도에서와 동일한 정책을 북미지역에도 시행한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케이프 코드(Cape Cod)지역이 대표적인 초기 염전지대라면, 뉴욕주 오논다가 (Onondaga)지역은 육지의 소금 산지로 이후 19세기에 이리 운하(Erie Canal)이 건설되며 이 지역 소금이 최대 국내시장이 뉴욕시로 접근가능해집니다. 이리운하와 허드슨 강을 통해 대량으로 소금을 소비지인 뉴욕시까자 운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버지니아의 카나와 (Kanawha) 소금은 담배농장의 유휴 노예노동력을 사용해 값싼 소금을 미 남부지역에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the Civil War)당시 북부(Union)는 남부(Confederate )지역의 소금 산지를 전략적으로 봉쇄하여 군인들에게 필수적으로 지급되어야 할 소금부족 사태를 일으켜 북부의 전쟁 승리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 당시 영국에서 수입된 소금이 뉴올리언스 항구를 통해 미 남부 전역에 공급되었으나 항구가 북부군에게 봉쇄되어 남부는 전쟁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다 뉴욕과 뉴잉글랜드 등 북부의 소금산지의 소금 생산량이 남부를 앞서 있었던 것도 역시 남부 패배의 한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일곱번째, 산업적인 측면에서 본 소금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마지막 파트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초기 필요에 따라 수많은 영세 소금생산자나 염전업자들이 난립되어 있던 소금 시장은 20세기 들어 거대 소금회사 두곳으로 과점화됩니다( 이 책이 나온 시점이 2003년이므로 17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상황인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거대 곡물기업 카길 (Cargill)과 머턴 (Morton) 두 회사가 현재 세계 소금시장을 양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흔해서 별로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대표적인 식재료가 바로 소금이고 , 다른 식재료와 다르게 인간이 섭취하는 광물질로서 지질학(Geology)의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있는 사해 (the Dead Sea)가 왜 일반 해수보다 염도가 더 높은지 ( 사해 염도 30% 대 일반 해수 3%)에 대한 해답을 찿기 위해 지질학자들이 연구를 해오고 있지만 아직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금없이 생물들은 살수가 없고 그래서 수많은 염장음식과 소금을 이용한 발효음식이 발달하게 됩니다.

아시아지역의 각종 장류와 유럽의 햄, 소시지, 치즈와 각종 염장 생선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오래 저장할 수 있어 먹을 것이 부족한 혹한의 시기를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총 26장 3개 파트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음식이나 식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 누구나 읽어보면 좋을 듯 합니다. 학자가 쓴 책이 아니어서 지나치게 딱딱하지 않고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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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편찬원에서 출판한 서울역사강좌 중 일제강점기 서울에 대한 강의록입니다.

전반적으로 짤막한 강의록 14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접하기 쉽지 않은 도록과 지도가 있지만 내용 자체는 깊지 않습니다. 입문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뒤에 정리되어 있는 참고문헌은 상당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강의록 중 일제강점기 경성의 공간변화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할까 합니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2강 경복궁 파괴와 조선총독부 박물관 설치
제3강 창덕궁 창경궁 파괴와 창경원의 탄생과정
제4강 경희궁의 훼철과 전각의 향방
제6강 일제강점기 주택지 개발과 서울의 변화
제8강 대한제국과 메이지의 공간충돌, 장충동과 박문사
제11강 남산신궁 건립에 담긴 의미

제2강부터 4강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한제국시절부터 행해온 궁궐파괴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건설하면서 전각을 파괴하는 과정과 순종이 고종 인산이후 정무를 보던 창덕궁과 창경궁을 훼철하는 과정이 현재 남아있던 당시의 지도와 도면을 보여주며 설명되고 있습니다.

고종이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경희궁의 전각의 훼철상황은 더 기가 막힙니다. 일제에 의해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이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되기 전 1980년대까지도 이 궁궐 부지는 학교부지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런 궁궐의 공간변화는 일제가 경관을 변화시켜 통치에 아용하기 위해 조선의 한양을 경성으로 변화시킨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이후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의식적으로 지속됩니다.

특히 법궁인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철하고 이 장소에서 조선물산공진회와 같은 박람회를 오랜기간 개최하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의도적인 공간구성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행했습니다.

이런 공간의 의도적 변화는 조선의 왕실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으로 일제강점 초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공간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궁궐 뿐 아니라 일반 주택지역에서도 일어나 성곽도시인 한양의 도성을 훼철하고 일본인들의 고급 주거지를 만드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제6강이 이에 대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현재의 명동 충무로 등 당시 남촌으로 불리던 지역은 청계천 이남 지역으로 특히 남산 기슭에 일본인들이 대거 모여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던 지역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일제는 총독부 관리들의 주거지를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경복궁 서쪽의 현 서촌 지역과 경희궁 궁궐 안에 관사를 지어 청계천 이북의 조선인 거주지역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내내 지켜져온 국유림을 파괴하고 성곽을 해체시킨 후 일본인들을 위한 고급주택지를 현재 명동 충무로 지역에 대거 건설합니다.

또한 용산지역으로 일본인들을 위한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한편 한강이남를 잇는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건설해 최초의 강남이자 전원도시인 명수대와 노량진을 개발합니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영등포의 공업지역 개발과 더불어 현 흑석동과 노량진을 개발하면서 인천과 연결되는 경인지역 개발도 시작합니다.

일제당시 신도시인 용산과 영등포, 흑석동과 노량진에 대한 내용은 김시덕 작가님의 ‘서울선언 (2018)’과 ‘갈등도시(2019)’에도 현재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남아있는 흔적들과 연계되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강과 11강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강의록인데요 특히 8강은 위에서 설명한 일제 강점기 주택지 개발과도 직접적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충단과 박문사의 위치가 현재 충무로 건너편 남산기슭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1894년 이후 희생된 군인들과 명성황후를 위해 제단을 쌓고 장충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고 제기억에 처음 남은 ‘장충’이라는 지명은 ‘장충체육관 ‘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를 기리고 개항기 순국한 병졸들울 제향하기 위해 만든 장충단은 일본인들이 명동과 충무로에 무리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일제는 안중근이 암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장충단에서 제향을 올리고 이후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는 대한제국의 제향의식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본인들을 위한 행락지로 만들어버리고 장충단 맞은 편에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사당을 건립합니다.

장충단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시설을 남산 기슭에 만든 것이죠.

또한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이라는 일본의 국가신도 종교시설을 건립합니다.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와 메이지 천황, 천황의 충신이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신사등을 남산 주변에 건설합니다.

해방촌에 남아있던 조선신궁의 계단이 얼마전에 모두 사라져버렸고 노기신사의 석재가 아직도 남산 배화여대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일제 강점기 말기에 건설하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조선인들의 황민화에 압장서게 됩니다.

장충동의 박문사 자리는 현재 신라호텔 자리로 이 장소가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을 찿는 귀빈들의 숙소인 영빈관이었다가 박정희 정권이 삼성그룹에 팔아서 현재의 신라호텔이 들어섰다고 하는 기막힌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가 경복궁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남산에 이렇게 신사와 조선신궁을 짓고,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 현 서울도서관)을 잣고 경복궁을 훼철해 남산에 있던 총독부 청사를 1925년 경복궁으로 이전한 것 모두는 공간을 지배해 식민지를 통치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고 이런 흔적들은 아직도 서울의 경관에 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당시 창경원에 놀러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고, 1993년 경 쯤인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텔레비전에서 당시 ‘중앙청’이라고 불리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린 시절 중앙청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뀐 이후 그곳을 방문했던 어렴풋한 기억도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서울의 공간변화는 현재의 서울의 공간에 직접적 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판단여부를 떠나 일제의 경성 도시계획과 당시의 도시개발이 현재 서울의 경관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는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1960년대이후 한국의 경제개발과 도시계획을 주도했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청년 시절 배웠던 일제당시의 지식과 개념을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일본 정치계에서 한국 정치계를 막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 건 한국의 위정자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토지구획정리 사업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일제가 사대문밖 돈암동 등에 새로운 주택지를 건설하던 1937년 대경성계획에서 선택했던 택지개발사업에서 쓰던 그대로의 개념을 가져온 것입니다.

일제때 주택개발로 빈민층인 토막민들이 경성 교외로 말려났는데 같은 개발방식을 채용한 박정희 정권 당시의 판자촌 개발과 아파트 건설도 하층민들을 서울 교외로 밀어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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