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편찬원에서 출판한 서울역사강좌 중 일제강점기 서울에 대한 강의록입니다.

전반적으로 짤막한 강의록 14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접하기 쉽지 않은 도록과 지도가 있지만 내용 자체는 깊지 않습니다. 입문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뒤에 정리되어 있는 참고문헌은 상당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강의록 중 일제강점기 경성의 공간변화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할까 합니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2강 경복궁 파괴와 조선총독부 박물관 설치
제3강 창덕궁 창경궁 파괴와 창경원의 탄생과정
제4강 경희궁의 훼철과 전각의 향방
제6강 일제강점기 주택지 개발과 서울의 변화
제8강 대한제국과 메이지의 공간충돌, 장충동과 박문사
제11강 남산신궁 건립에 담긴 의미

제2강부터 4강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한제국시절부터 행해온 궁궐파괴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건설하면서 전각을 파괴하는 과정과 순종이 고종 인산이후 정무를 보던 창덕궁과 창경궁을 훼철하는 과정이 현재 남아있던 당시의 지도와 도면을 보여주며 설명되고 있습니다.

고종이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경희궁의 전각의 훼철상황은 더 기가 막힙니다. 일제에 의해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이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되기 전 1980년대까지도 이 궁궐 부지는 학교부지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런 궁궐의 공간변화는 일제가 경관을 변화시켜 통치에 아용하기 위해 조선의 한양을 경성으로 변화시킨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이후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의식적으로 지속됩니다.

특히 법궁인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철하고 이 장소에서 조선물산공진회와 같은 박람회를 오랜기간 개최하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의도적인 공간구성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행했습니다.

이런 공간의 의도적 변화는 조선의 왕실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으로 일제강점 초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공간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궁궐 뿐 아니라 일반 주택지역에서도 일어나 성곽도시인 한양의 도성을 훼철하고 일본인들의 고급 주거지를 만드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제6강이 이에 대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현재의 명동 충무로 등 당시 남촌으로 불리던 지역은 청계천 이남 지역으로 특히 남산 기슭에 일본인들이 대거 모여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던 지역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일제는 총독부 관리들의 주거지를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경복궁 서쪽의 현 서촌 지역과 경희궁 궁궐 안에 관사를 지어 청계천 이북의 조선인 거주지역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내내 지켜져온 국유림을 파괴하고 성곽을 해체시킨 후 일본인들을 위한 고급주택지를 현재 명동 충무로 지역에 대거 건설합니다.

또한 용산지역으로 일본인들을 위한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한편 한강이남를 잇는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건설해 최초의 강남이자 전원도시인 명수대와 노량진을 개발합니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영등포의 공업지역 개발과 더불어 현 흑석동과 노량진을 개발하면서 인천과 연결되는 경인지역 개발도 시작합니다.

일제당시 신도시인 용산과 영등포, 흑석동과 노량진에 대한 내용은 김시덕 작가님의 ‘서울선언 (2018)’과 ‘갈등도시(2019)’에도 현재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남아있는 흔적들과 연계되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강과 11강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강의록인데요 특히 8강은 위에서 설명한 일제 강점기 주택지 개발과도 직접적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충단과 박문사의 위치가 현재 충무로 건너편 남산기슭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1894년 이후 희생된 군인들과 명성황후를 위해 제단을 쌓고 장충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고 제기억에 처음 남은 ‘장충’이라는 지명은 ‘장충체육관 ‘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를 기리고 개항기 순국한 병졸들울 제향하기 위해 만든 장충단은 일본인들이 명동과 충무로에 무리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일제는 안중근이 암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장충단에서 제향을 올리고 이후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는 대한제국의 제향의식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본인들을 위한 행락지로 만들어버리고 장충단 맞은 편에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사당을 건립합니다.

장충단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시설을 남산 기슭에 만든 것이죠.

또한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이라는 일본의 국가신도 종교시설을 건립합니다.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와 메이지 천황, 천황의 충신이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신사등을 남산 주변에 건설합니다.

해방촌에 남아있던 조선신궁의 계단이 얼마전에 모두 사라져버렸고 노기신사의 석재가 아직도 남산 배화여대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일제 강점기 말기에 건설하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조선인들의 황민화에 압장서게 됩니다.

장충동의 박문사 자리는 현재 신라호텔 자리로 이 장소가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을 찿는 귀빈들의 숙소인 영빈관이었다가 박정희 정권이 삼성그룹에 팔아서 현재의 신라호텔이 들어섰다고 하는 기막힌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가 경복궁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남산에 이렇게 신사와 조선신궁을 짓고,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 현 서울도서관)을 잣고 경복궁을 훼철해 남산에 있던 총독부 청사를 1925년 경복궁으로 이전한 것 모두는 공간을 지배해 식민지를 통치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고 이런 흔적들은 아직도 서울의 경관에 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당시 창경원에 놀러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고, 1993년 경 쯤인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텔레비전에서 당시 ‘중앙청’이라고 불리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린 시절 중앙청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뀐 이후 그곳을 방문했던 어렴풋한 기억도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서울의 공간변화는 현재의 서울의 공간에 직접적 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판단여부를 떠나 일제의 경성 도시계획과 당시의 도시개발이 현재 서울의 경관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는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1960년대이후 한국의 경제개발과 도시계획을 주도했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청년 시절 배웠던 일제당시의 지식과 개념을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일본 정치계에서 한국 정치계를 막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 건 한국의 위정자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토지구획정리 사업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일제가 사대문밖 돈암동 등에 새로운 주택지를 건설하던 1937년 대경성계획에서 선택했던 택지개발사업에서 쓰던 그대로의 개념을 가져온 것입니다.

일제때 주택개발로 빈민층인 토막민들이 경성 교외로 말려났는데 같은 개발방식을 채용한 박정희 정권 당시의 판자촌 개발과 아파트 건설도 하층민들을 서울 교외로 밀어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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