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콘래드 전문가 ( Conrad Scholar) 인 존 스태프( John Stape)가 2007년 출판한 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계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에 대한 평전입니다.

한국에는 단편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로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그의 문학활동과 삶에 대해 조망한 평전으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에 속합니다.

이글을 쓰기 위해 국내 문학사이트를 찿아 보았는데, 콘래드를 소개하는 부분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일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꽤 알려진 문학전문 사이트 세계문학 저자 소개인데도 잘못 소개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사를 잠시만 살펴봐도 알 수 있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소개해 안타깝습니다.


우선 그의 출신을 ‘폴란드 ‘라고 단정하는 건 사실 왜곡의 우려가 있습니다. 콘래드 출생 당시 폴란드라는 독립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중반 동유럽은 러시아 제국( Russian Empire)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 Austria-Habsburg Empire)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지역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출생지는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 (Berdychiv,Ukraine)라고 브리태니커 온라인 판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의 백성 (subject)로서 단지 폴란드 민족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그가 폴란드 출신 문학가라고 소개하는 건 명백히 한국 학계가 나이브 (naive)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콘래드는 영국에서 선원생홯을 하고 선원 자격을 모두 영국에서 취득한 해양전문가이자 영국인임에도 그의 출신지 때문에 생전에도 폴란드계 유대인 ( Polish Jew) 또는 러시아계 유대인 ( Russian Jew)로 오해를 받았습니다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국은 서유럽의 신교국가로 성공회가 16세기 헨리 8세이후 로만 카톨릭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런 영국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이자 로만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콘래드는 종교적으로도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1924년 그의 장례식은 아이러하게도 영국 성공회 주교좌 성당이 있는 캔터베리 지역에서 카톨릭 장례미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콘래드의 영국출신 부인과 유족들이 카톨릭 전례에 따라 미사를 행한 것입니다.

평전에서 그의 출신 배경을 두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슬라브 적 특성과 그의 특이한 영어발음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등 영어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동유럽과 러시아를 후진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평생을 영국을 조국으로 살았고 영어로 문학작품을 집필한 작가임에도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산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에서 1857년 태어난 조지프 콘래드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랍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유아기때부터 배운 프랑스어를 평생 잊지 않고 영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로 보내져 프랑스 상선을 타고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는 그가 평생 동경하던 대상으로 그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은 그가 선원생활을 할 때나 이후 전업작가로 생활할 때 프랑스 문인들과의 교류는 물론 영국 상류사회와의 교류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에게 모국어인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고 그가 평생 사용한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였습니다.

콘래드는 프랑스 작가 중 앙드레 지드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고, 지드는 콘래드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네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콘래드의 생활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와 늘 써야할 작품의 마감으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마감을 거의 지킨 적이 없을만큼 집필이 더딘 인물이었습니다. 이건 그와 아내의 지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통풍 (gout)과 기관지염( bronchitis) 등이 재발하면 병원이나 휴양지에서 요양울 해야했고, 치료비와 요양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집필도 재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런던으로 나와 고급호텔에 투숙하며 아내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거나 프랑스나 스위스의 온천휴양지에 가서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로부터 돈을 빌려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더해 그는 그 주위에 모이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가, 극작가, 저널리스트들과 끊임없이 만찬을 즐겼습니다.

이 평전에서 그의 이런 생활방식을 ‘’사치스럽다(extravagant)’로 표현 했습니다. 이름이 난 작가이고 상당한 수입이 있었지만 언제나 빚에 허덕이고, 돈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두번째,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와 영국상선을 탔던 그의 이력은 19세기 후반 항공이 도입되기 전까지 세계화의 첨단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 전에 이미 남미는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타이티, 싱가폴, 말레이지아, 버마 그리고 아프리카 콩고 등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런 이력으로 그의 소설 전반은 영미 문학의 큰 줄기인 해양모험 장르 ( Sea Adventure)에 속하고, 영미권에서 다른 문화권을 ‘이국적(exotic)’으로 바라보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비평가 애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도 그의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 에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 책을 통해서 보게된 영미 문학계의 작동방식입니다. 콘래드는 첫소설을 영국 Unwin을 통해 출판했고 1890년대 이후에는 Heinemann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미국에서 그의 책은 Doubleday 를 통해 주로 출판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콘래드는 자신의 출판 에이전트와 출판과 관련된 모든 비즈니스 계약을 관리하며 출판 에이전트와 업무적으로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가며 심지어 빚을 내기도 하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책에 따르면 콘래드가 활동하던 당시가 출판 에이전트가 활성화된 초창기이고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적극 활용해서 전업작가로 자신의 소설의 판로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통해 콘래드는 자신의 소설을 시리즈화 ( serialization) 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문학잡지에 실었는데, 이를 위해 기존의 소설 원고를 개작해 분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출판된 소설이나 단편소설집을 개작하며 새로 서문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100여년 전 영미권에서 이루어지던 출판 산업과 출판 에이전트의 여러 상황을 엿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고, 현재도 그들의 비즈니스가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콘래드 생애 후반기와 관련된 것으로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The First World War) 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 Russian Revolution)의 영향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로 현대 영문학의 초창기 작가에 해당되는 콘래드는 다른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보냈는데 그의 큰 아들 보리스 콘래드 ( Borys Conrad)는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보리스는 전장에서 받은 포탄충격(shellshock)로 평생 정신적 충격상태로 살아갑니다. 콘래드의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은 보리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빚더미에 올랐고 부인과 이혼하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보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가 러시아 제국 출신임에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10대에 우크라이나를 떠난 그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정착해 사는 동안 단 두번 고향을 방문했을 뿐이고, 두번째는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으로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던 때 독일 땅에 있던 그와 가족은 이태리를 통해 급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평생 고독하게 혼자 일생을 개척해야 했던 그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고독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의 경험이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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