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도시 모습은 식민지 시기 도시의 경관이 직접적으로 이어내려온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도시계획과 그 개발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한 이 논문집은 크게 두부분으로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어떻게 도시가 계획되고 개발되었는지를 고찰한 전반부와 천황제 국가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국가신사를 지은 이유를 추적한 후반부로 나뉘어집니다. 물론 후반부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어떻게 일제가 기념공간을 조성했는지도 추적합니다.

하지만 주목하는 부분은 4개의 논문입니다.

1. 1920년대 경성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운동

2. 식민지 도시 인천의 도시계획과 도시공간의 확장

3. 조선신궁과 식민지 동화주의의 공간정치

4. 인천대신궁의 공간변용과 재인천 일본인


모두 일본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공간변화에 관한 글로 특히 첫번째와 세번째 논문은 1910년 한일병합이후 서울의 공간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해방이전 서울의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줍니다.

한일병합이후 일제는 시구개정사업울 추진하는데 특히 경성의 경우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조선의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성부의 공간을 식민권력애 맞게 재조정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적 공간을 만들어 경성이 가진 정통성과 저항성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권의 전시적 목적 이외에 한강의 수해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용산 일대의 치수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식민당국은 급격한 도시화로 경성에 조선인 빈민뮨제가 삼삭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서 개조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식민관료들은 도시빈민문제를 도시의’미관’문제로만 바라보고 ‘복지’의 문제는 간과해 왔습니다. 이 불합리한 전통은 21세기 서울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관료들이 빈민들을 도시외곽으로 집단이주시켰듯이 현재 한국의 관료들도 빈민들을 끊임없이 도시 외곽으로 몰아냅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 거주지인 북촌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관사를 짓는 방식으로 이 곳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항하여 건설업자 정세권이 북촌에 소형개량한옥을 대량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의 개량한옥건설사업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궐등 공유지에 관사를 짓고 총독부와 같은 공공건축물울 지으며 북촌을 침탈해 온 일제를 당시 건축업자인 정세권 선생이 어떻게 이들의 공간침탈을 막았는지 보여줍니다. 익선동과 북촌의 개량한옥촌의 숨은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식민관료들은 1920년대 내내 ‘대경성’이라는 허황된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탁상공론으로 일관했으며, 도시계획운동에 따라 도시계획의 법제화의 계기는 마련했으나 실제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고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본격화할 뿐 조선의 도시빈민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1920년대 실현되지 못했던 경성도시계획은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령>과 1936년 <대경성계획>으로 그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일제가 경성도시계획을 세우면서 도입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강남개발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한국이 일제의 영향을 해방이후에도 받았었다는 실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일제 만주군 출신 전직 대통령은 본인이 일제 강점기 얻은 지식을 해방후 그대로 적용한 겁니다.

일제는 경성의 남산 아래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었던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남산에 그들만의 공간을 조성합니다.
개항이후 최초의 일본영사관도, 그리고 조선통감부도 남산아래 있었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최초의 신사인 경성신사 ( 또는 남산대신궁)도 조선 거류 일본인들이 남산에 지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신사를 남산에 건립하기 시작해 1925년 조선신궁을 완공합니다.

이미 을사늑약이후 최초의 현충원이던 장충단을 파괴하고 신사를 건립한 일본인들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해 일본색을 강하게 남산에 이식합니다.

일제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 황민화정책을 시행해 강제적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을 단행합니다.

조선신궁이 초기 단순한 통합의 장소로서 기능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집단의례를 통한 대중동원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조선신궁은 1940년대 일제 말기 일상생활에 엄숙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전체를 집단적 규율화로 몰아가는 전시체제의 공간적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방이후 이 공간들이 그동안 억압받아온 조선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파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국가신사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경성 공간통치, 특히 대표적 관가인 광화문 일대의 공간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한 책이 이순우 작가의’광화문 육조앞길(2012)’입니다. 조선 말기 이후 한양의 육조앞길이 어떻게 일제의 경성부 ‘광화문통’이 되어가는지 특히 북촌지역의 변화를 위주로 상세히 추적한 책입니다.

일제 패망이후 조선을 ‘점령 (occupied)’한 미군정당국은 광화문통의 조선총독부 중앙관가를 사실상 그대로 유지한 체 미국대사관을 이 자리에 건립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은 일본 땅이었고, 일본이 점령된 상황에선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팩트는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도 구한말이후 시작된 서울의 공간변화가 현재에 미친 영향을 지속적으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을 알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도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최근 특히 해방 이후의 자료는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요즘 1980년대 말 1990년대에 발행된 책을 찿아보려 하지만 겨우 30여년 밖에 안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록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하다는데 매우 놀랐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겠지만 아무튼 충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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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쩰’이라는 생소한 러시아말의 의미는 281쪽 에필로그에서 언급됩니다.

282쪽에 달하는 연구서에서 저자는 1890년대 말 일어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기의 조선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심한 ‘눈보라’의 시기로 표현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전 1894년 갑오경장과 1882년 임오군란까지 있었으니 정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격동기였습니다.

그래서 ‘미쩰’의 시기라는 표현은 문학적이지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9년전인 2012년 출판된 이 책은 메이지 일본의 명성황후의 암살과 그로인해 발생한 고종의 러시아대사관 파천(播遷), 즉 임금이 피난하는 일이 발생한 격변기를 다룹니다.

기본적으로 고종시대의 정치사이자 외교사를 다룬 책으로 이전까지 한국학계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러시아의 사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이 연구의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을미사변이 친러파로 알려진 명성황후 민씨를 매이지 일본이 제거한 사건이고 당시 상황을 조선에 주재했던 일본 뿐만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이 주시하고 있었던 정변(政變)이라는 점에서 일본, 한국의 사료뿐만 아니라 각국의 사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을미사변을 너무 일본측 자료에 의지해 설명해 온 것이 기존 연구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정변입니다.

일본정계와 외교가에 충격을 준 이 사건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고종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외교 및 군사관계 문서를 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로 인용된 사료들을 주로 일본 측 사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990년대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의 접근이 가능한데도 한국에서 러시아 문서 관련 연구가 그리 많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첫째, 근대사 연구자들이 일본의 영향력을 기본으로 생각해 최우선으로 일본자료를 우선 고려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니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선학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둘째, 비록 한러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에 접근이 가능해도 실제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연구자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한국풍토에서 러시아 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미 개항기 이래 조선에 러시아어 통역관이 존재했었지만 일제 해방 후 상당 기간 남한에서 러시아 관련 발언 자체가 금기시되어 상당 부분 러시아 관련 연구도 영미권 연구의 번역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직접 연관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대한 연구도 러시아 사료의 직접 이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합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종은 전근대적 왕권주의자로서 전통적인 ‘절대왕권’을 추구한 군주로서 비록 조선에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고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지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미열강과 러시아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던 인물이지만 절대 근대적 인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관파천이후 왕권강화를 위해 보수적인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의 김병시를 기용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당시 친러파로 을미사변 관련자를 체포하며 영향력을 확대해오던 법부대신 이범선은 이후 주미공사로 임명되며 조선정계에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고종은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활동이 자신의 왕권강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이들을 탄압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왕권강화로 정국이 안정될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어떤 논의도 하지 못한체 정치변화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맞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성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고종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상반되는 건 그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을 유지하려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절대왕권만을 추구해 상황과 인식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갑오경장을 ‘갑오왜란’으로 아관파천을 ‘아관망명’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친일개혁세력들이 일본의 힘을 빌어 근대화를 이루려 한 것으로 알려진 ‘갑오경장’을 16세기 임진왜란에 이은 제2의 임란으로 인식했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파천을 사실상의 ‘국내망명’으로 인식한 책으로 역사를 보는데 해석과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연구자 김영수씨는 아관파천관련 저서를 한권 더 출간했는데 본서와 비교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시간이 되면 읽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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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중 한분인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경성에서 활약하신 부동산 디벨로퍼( Real Estate Developer)입니다.

부동산 디벨로퍼란 말 그대로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그 토지를 시장 활황시 그대로 매각하거나 그 토지에 건물을 지어 부사가치를 올린후 그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를 말하지요.

2017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가 쓴 이 책은 20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이지만 흔히 ‘집장사’로 폄하되어온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일생을 당시 신문기사, 정세권의 아들, 딸, 외손녀 등 후손들을 인터뷰해 다시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도시공간이나 도시의 역사,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분야가 토지의 경제적 측면을 보는 부동산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촛점을 맞춘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김시덕교수의 ‘갈등도시 ( 열린책들,2019)’에서 이 책을 처음 소개하셨고,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일독을 한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 이책의 1부와 2부는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과 1920-30년 당시 경성의 일본인 진출상황에 관련된 내용이고 3부는 정세권이 본업인 부동산 개발 이외 참여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후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숭리한 이후 사실상 서구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공인받고 인천지역인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에 진출하여 남산 아래 통감부를 세우고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조선신사를 세우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사실상 남촌을 장악했습니다.

‘명동길거리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9)’에서는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정과 명동에서 일본 백화점들이 진출해 일제시대 어떻게 이곳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당시 명동의 메이지좌 ( 현재 명동예술극장)가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명확하던 남촌의 일본인 관객과 북촌의 조선인 관객의 경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분명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객들이 남촌과 북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불분명해지는 것은 이 당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완공된 것을 기회로 일제는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를 짓는 수법으로 지금의 북촌과 서촌일대 그리고 서소문 경희궁을 비롯한 관화문 주위의 ‘북촌지역 ‘에 그들의 거주지를 확대해 갑니다.

광화문 일대 관청가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이순우 작가의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201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소위 서양식 ‘문화주택’의 개발에만 집중하고 조선인 중하층 인구에 대해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아 토막민(土幕民)으로 불리는 영세민들이 열악한 토굴과 같은 오두막에 사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는데도 일제는 그냥 무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에 ‘개량한옥’을 개발해서 중하층 조선인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했습니다. 일본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조선인들이 고급주택을 살수는 없어 기존의 한옥을 규모가 작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개량해서 공급한 것입니다.

그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성북동, 혜화동, 창신동,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전통한옥마을로 알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의 풍경은 모두 정세권이라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시절 보았던 개량한옥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생각납니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명륜동의 한옥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삼선교로 가는 길목에도 한옥들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래 익선동이 힙한 카페들로 다시 뜨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무조건 새것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살기 불편한 집이라고 다 밀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닙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호불호와 관련없이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그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 가옥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일제 유산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일부라도 보존해 일제가 한국에 어떤일을 벌였는지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하고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자비한 철거는 과거의 위정자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3부에서 정세권이 안재홍과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이극로와 함께 동참한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들이 노선투쟁이나 하고 뜬구름잡는 이론을 잡지에 내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말아먹다가 정세권의 합류로 이 운동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보기 상당히 안쓰럽습니다. 물산장려화관을 지어서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정세권 사비로 건축비를 츙당했다는 에피소드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세권을 ‘집장사’라고 폄하했다니 황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의식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히 당시 신문기사 등 일차사료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정세권의 딸 아들 등 후손들과 직접 인터뷰해 당시 상황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현재 서울의 공간이 일률적으로 모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형태로 재편되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이전,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형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이후 한국을 통치한 이들이 수도 서울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집장사라고 폄하되었던 정세권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 완공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된 것 만큼 서울에 존재하던 수많은 개량한옥들이 1920-30년대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한옥들이 필요에 위해 헐려나갔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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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전 서울의 도심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광복이전까지 경성에 자리잡았던 일제 강점기 당시 어떤 건물들이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말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었던 관청가인 경복궁 앞 육조(六曹)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이들의 통치기구 설치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일차사료인 당시의 신문과 관보, 실록 등과 같은 기록자료를 통해 그 변천사를 추적합니다.

2012년 출판된 책으로 약 39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근대건축물, 특히 근대이후 중앙 관청의 공간변천사를 기록한 책은 이 책을 제외하고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조선 말 왕조의 수도 한양이 어떻게 일제의 식민지 도시 경성으로 바뀌어 갔는지, 일제 식민 당국은 어떤 필요에 위해 어떤 장소에서 그들의 행정부서를 세웠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간의 ‘정치사’이자 ‘ 행정조직 변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칭하는 이유는 인용문헌의 출처가 대부분 <조선총독부 관보> 또는 <통감부 관보>그리고 <고종실록 >,<승정원 일기>등 통치기관의 공식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첫째, 갑오경장이후 을사늑약 전까지 기존의 육조 자리에 자리를 잡았던 대한제국기 관청들은 나라의 힘이 열강에 달리고, 정세가 불안정 한 탓에 수많은 자리바꿈이 일어나게 됩니다.

둘째, 1910년 을사늑약이후 일본은 통치권 강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육조거리에 그들의 관청을 세우기 시작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육조거리의 틀을 변화시킵니다. 대한제국기 일본인 거리였던 남산의 충무로 근방에 있던 통감부는 후일 총독부로 확대되어 약 10여년의 공사 끝에 경복궁 내의 신청사로 1926년 옮겨오며 육조거리 변화의 정점을 찍습니다.

일제는 1910-1920년대를 통해 서양식 관청 청사를 속속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건립합니다. 일제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투영된 거리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일제강점기 때 구획이 나뉘어졌던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이 도심의 구조가 무너진 결정적 계기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후 약 10여년간 복구를 하지 못하던 이 거리는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대적 도로확장과 함께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이후 2009년 경 광화문 광장 공사로 이일대의 공간구조는 완전히 변모했고 일제시기까지 유지되던 ‘육조거리’의 모습은 현재 찿을 길이 없습니다.

넷째, 이 책은 서울의 특정한 공간 즉 광화문 서쪽의 세종로 77번지,78번지, 79번지, 80번지, 81번지 그리고 광화문 동쪽의 76번지,82번지, 84번지, 149번지의 공간이 1880년대부터 1945년까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고찰합니다. 이렇게 특정 장소에 대한 변천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적한 문헌은 처음이고 다소 딱딱한 감도 있지만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이 책에서 보았던 공간 변천의 특징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변화보다 해방이후 거리의 변화가 더 컸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같습니다.

도시개발관련 제가 당국에 느끼는 점은 이들이 개발을 너무 물질적인 잣대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볼 수 있는 브랜드를 입점시킨 고급 쇼핑몰이나 화려한 건물들로만 가득찬 도심공간개발만이 도심개발은 아닐텐데, 현재까지 서울의 도심개발은 모두 ‘돈’만을 위해 진행되어 과거의 역사와 흔적을 등한시해 온 것입니다.

서울대 김시덕 교수께서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에서 언급하셨던 ‘일제시대의 근대건축물’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현재 광화문 세종로에서 전혀 수용되지 않은 것은 좀 유감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일제시대 고등교육을 받았던 대한민국 정부 초기 인사들( 상당한 수가 친일경력이 있습니다)이 해방 후에도 일본어로 일본의 전범 후예들과 협상을 하고, 정보를 통제한체 국민들에게’경제성장’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친일적 흔적을 지우듯이 일제가 이 땅에 세워놓았던 수많은 근대건축물을 ‘철거’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19세기부터 서양열강이 차지했던 중구 정동을 제외하고 세종로와 명동 등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축물은 그 흔적을 찿을 수 없습니다.

결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건축물들이 전부 보전가치가 있다는 점은 아니지만 정치 중심가인 세종로에 표지석만이 아닌 관공서 건물 몇채는 넘겨두어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인데 과연 전문 학자가 아닌 다음에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100여년도 더 된 옛 문헌과 사진을 보면서 흔적을 찿을지 의문입니다.

역사는 기억에 관한 학문이고 따라서 일제 강점기는 ‘지워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비판적 수용이 ‘추종’이 아니라는 것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에 아픈 기억이지만 분명 현재까지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대이고 그 흔적이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그들이 남긴 유산이외 스스로 어떤 물질적 정신적 발전을 이루었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과연 맹목적 조선추종이나 맹목적 일본/미국 추종이외 다른 정신적 발전이 있었는지 말이죠.

한국의 경제가 아직도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문헌들과 지도와 사진자료 출처가 오직 각주로만 표기되어 아쉬웠습니다. 책 말미에 참고문헌목록이 붙어야 제대로 완성된 책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논픽션이나 역사서 같은 책들의 필수항목(requirement )인데도 누락된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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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출간된 책이니 이미 10년이나 지난 책입니다.
오래전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었는데, 오늘 완독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책을 동시에 읽는 독서 습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본문 총 334쪽으로 대중적인 논픽션에 적당한 분량의 책입니다.

디자인적 시각이 반영되어 시각문화에 대한 논의가 큰 줄기를 이룹니다. 특히 인테리어와 사물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책은 전반부는 ‘픽션 ‘이라는 제목으로, 후반부는 ‘팩트’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두 부분은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픽션이 팩트로 보완된 듯한 구성입니다.

이 책이 커버하는 기간은 주로 1962년경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 초까지의 기간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시작해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 그리고 분당과 용인 신도시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 책이 ‘강남’관련 연구나 ‘아파트’관련 연구에 인용이 많이 되는 책이기는 하나 이 책은 ‘강남’에 대한 책은 아니고 오히려 ‘주거의 현대화’ 담론에서 ‘ 아파트 ‘를 비롯한 ‘현대적 주거양식’이 1960년대 이후 한국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를 ‘디자인’ 관점에서 고찰한 책입니다.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인테리어 ‘애 관한 정보가 풍부한 것도 그래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1960-1990년대 한국의 중산층 또는 중상층 주부들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공동주거형태인 아파트에서 자신들만의 개성을 살리기 위한 인테리어를 추구했는지 수많은 여성지와 신문기사들을 인용하며 보여줍니다.

표준적 설계로 획일화될 수 밖에 없는 아파트 공간에 각 가정의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 인테리어는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아파트가 도입되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1930년대 지어졌던 개량한옥에서 주로 살았던 1930년대생 혹은 1940년대 생 주부들은 ‘근대화’로 새로운 생활공간이 된 서양식 단독 주택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아파트에 살면서 난생 처음 입식 생활양식에 적응하며 ‘블록 키친’과 ‘시스템 키친’으로 진화하는 주거양식에 적응하며 새로운 주거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했습니다.

이 책이 비교적 잘 읽혔던 이유는 저 자신이 위에 언급된 1940년대생 주부의 자녀로 자랐기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집안 사물의 변화를 실제 보고 겪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1960년대 후반까지 한국 중상류충 상당히 많은 외제 가전을 비롯한 ‘미제’상품을 소비했었다는 점이고, 196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의 경제가 사실상 미국에 예속되어 주한미군 ‘피엑스’가 각종 생활용품과 가전기기의 공급처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도 1970년대 초까지도 생산기술이나 디자인 관련 지식이 전혀 없어 일본으로 부터 부품을 조달받아 단순 조립을 하거나 생산이 필요한 금형마저도 수입할 수 밖에 없었던 심각한 기술종속 상태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최초 입안이 학병 세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당 장면 정권에서 입안 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 계획을 사실상 그대로 가져다가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했기, 이 과정에서도 미국의 대외전략의 큰 틀안에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 현재까지 이루어진 여러 연구를 성과입니다.

한국의 아파트 공급은 위에서 언급한 경제개발계획을 배경으로 그 맥락속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군인 출신 위정자는 속도전식으로 주거개선을 이루기 위해 공동주택인 아파트를 도입하고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해 부동산 소득을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아파트 당첨자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런 정책의 틀은 주공이 주도하던 공공주도 방식에서 민관합동 또는 민간주도 방식으로 주체의 변화만 있을 뿐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방식입니다.

초기 아파트 입주자들이 ‘겉치레’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지금 생각하면 읏픕니다. 전통적인 습속에서 벗어나 좀더 모던한 생활을 하고 싶었던 1960-70년대의 주부들은 획일적으로 설계된 공동주거공간인 아파트에 자신들만의 개성을 보이기 위해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고, 경제적으로 먹넉했던 중상류충은 이를 위해 비싼 외제 가구를 구입하고 외제가전제품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주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지어졌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 획일적 공간의 생산으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책의 제목도 이 책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의미는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유토피아’ 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아파트에 ‘모던함 ‘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외제 가구와 가전으로 둘러싸인 ‘연출된’ 유토피아 말이죠.

과연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던함을 추구하기 위해 그 전까지 살아왔던 습속을 버리는 것이 과연 맞는 선택일지 말이죠.

이미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20여년 이상을 살아온 저로서는 이미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이 삶이 저의 삶이지만 부모세대가 과연 급하게 모든 생활방식을 ‘모던’하게 바꾸는 길만이 최선이었는지는 곱씹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1960년대가 후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는 가장 가깝게 현재의 우리를 만든 모든 기반이 이루어진 시기로 단순히 인프라와 생활 환경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시작된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전에 소개해 드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 과 ‘ 1960년을 묻다 (2012)’가 이 시기를 일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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