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포함 270여쪽에 불과한 작은 책이지만 생태적 관점에서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 (島根縣) 오키 제도(隠岐諸島)간의 장기적 역사관계를 조망한 책입니다.

보통의 독도관련서가 국제법적 해양법적 관점에서 국가간의 경계와 그에 따른 분쟁에 촛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독도에 서식하던 독도 강치(Zalophus japonicus, 학명 일본강치)의 멸종과 이를 초래한 일본의 남획과 그에 따른 분쟁과 그 흔적을 따라갑니다.

시간대가 고대 중세 근세 근대를 아우르는데다 한반도 독도의 지방사와 시마네현 오키 제도의 지방사를 아우르는 등 정치사에 가려져 있던 미시사와 구술사가 서술의 일부를 차지합니다.

이 모든 점을 떠나서 황당한 것은 시마네현이라는 일본의 일개 지방 혹은 막부 시대 소국이 자신들 편의대로 ‘자의적으로’ 독도를 자신들의 관할로 정하고 자신들 판단대로 도항 및 어업허가를 내주며 기록을 만들어간 점입니다.

이미 조선시대 안용복이 일본에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를 주장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울릉도 독도의 거리가 더 가깝고 을릉도에서 육안관찰이 가능한데도 조선이 취해온 공도정책 (空島政策)을 빌미로 빈 섬에 일본인들이 먼저 들어가서 살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정황 상 오키의 어민들은 어족자원이 고갈되어 독도 인근에서 조업을 했을 따름이지만 이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행적을 근거로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합니다.

막부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성립했던 여러 왕조들과 조선으로부터 을릉도 독도 연안의 조업과 무단 상륙에 대한 경고, 그리고 일본 정치가들이 스스로 을릉도 독도 연안에서 조업을 하지 말도록 금지를 했는데도 동해에 가까운 시마네현은 10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끊임없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오는 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더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독도를 병합시킨 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은 저자 주강현 교수가 이전에 지은 ‘환동해 문명사(돌베게,2015)’를 추가로 읽어야 그 전체적인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가 드물게도 한국에서 ‘해양사(Maritime History)분야를 연구해 오신 분이라 책의 관점을 눈여겨 봐야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환동해 지역은 일본 열도의 북쪽 한반도 동쪽에서 러시아의 오오츠크 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짐작되는데 이 지역은 일본의 강치 남획뿐만 아니라 19세기 당시 미국과 일본의 포경업자들이 고래잡이를 하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한국사람들에게 북쪽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홋가이도와 러시아의 경계지역인 사할린과 그 위쪽 캄차카 반도와 배링해협 그리고 이와 연결된 알래스카 지역은 미지의 땅입니다.

러시아 바이칼호 연안이나 알타이 산맥 부근과 몽골지역 그리고 여하를 중심으로 하는 요동지역 등에 대해서는 연구서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 이외 다른 북쪽 지방, 북극을 포함해서 전혀 연구가 이루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경계’지역 또는 소위 주변부라고 생각되는 지역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정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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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관계사 전문가인 김영수 교수의 책으로는 두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후기 포함 310쪽 가량되는 책이고 뒤에 약 60쪽에 걸친 각주 목록이 있습니다. 참고도서 서지를 마지막에 정리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이책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인 1896년 명성황후 민씨의 외척이자 고종의 심복인 민영환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의 모스크바 대관식에 러시아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됩니다. 민영환을 보좌하기 위해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윤치호, 러시아 국적의 김도일, 조선사절단의 사행기록을 위해 유학자 김도련, 그리고 주한러시아공사관 소속 외교관 쉬떼인, 그리고 손희영을 파견합니다.

여기까지는 공식사절단이고 명목상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조선사절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외 한러비밀교섭을 위해 비공식 비밀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이 사절단은 성기운, 주석면, 민경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기 위해 인천, 상하이, 요코하마, 도쿄,밴쿠버, 몬트리올, 뉴욕,리버풀, 런던,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합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와 기차로 하는 고된 여행이었죠.

민영환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고종의 ‘신변보장’을 위해 러시아의 병력 파견을 위한 것과 러시아의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군대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점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해서 러시아와 더 밀착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민영환의 러시아 파견은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을미사변(乙未事變,1895) 그리고 같은해 일어난 아관파천(1896)과 연속성 상에 있습니다.

을미사변에 관해서는 저자의 ‘미젤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보시면 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시기에 이전 연구가 일본 측 사료에 근거했던 것과 다르게 러시아 측 사료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은 건천궁에서 황후가 시행될 당시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습니다.

고종이 외세에 의탁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사실은 조선 말 19세기 100여년간의 세도정치 (勢道政治) 시기부터 생겨난 지배층의 수탈과 부패 그리고 빈약했던 병력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19세기는 14세기 정도전이 생각했던 이상적 유교정치가 얼마나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할 수 있는지 유교적 관료정치의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860년대 유신 이후 부지런히 프로이센의 현대적 군사제도를 배우는 동안 조선은 대의명분론에 사로잡혀 사실상 군사재도에 손을 넣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조선을 침략하려 하고 동시에 류큐(琉球)와 애조치(蝦夷地)를 복속시키는 와중이어서 고종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전에 읽었던 신용하교수님의 ‘한국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에서 척족인 민씨 세력 모두 단순히 수구파라고 주당하는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대한제국은 엄연히 군주국이고, 주권이 군주에게 있기 때문에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주의 ‘신변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바로 전해 일본인들에게 경복궁에서 황후가 살해되는 참변이 있었기 때문에 군주의 신변보장은 국가의 안보상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때 대한제국 신하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불가피한 사안으로 생각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협조 내지 방조한 이들과 민영환처럼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러시아 사행길에 오르고 을사늑약이후 스스로 자결한 신하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시각, 즉 민주주의 체제인 2021년 기준으로 민영환과 민씨 척족들의 일들을 단순히 수구파로 매도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권력구조에서 북촌을 장악했던 세도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정치사적 측면에서 정밀한 해부를 시도한 책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정조 사후 63년(창비,2011)이 유일합니다. 이 책은 정조시대와 그 이후 언관(言官)제도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어떻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규장각 각신이던 김조순(金祖淳)초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민영환의 러시아행 조선사절단의 사행록에 대해 언급할 차례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이들의 사행일지는 김득련이 꼼곰히 작성했습니다. ‘환구일록 (環璆日錄,1896)’이라는 글이 말하자면 이 책의 저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득련은 한학자답게 사행을 하며 느낀 감상을 한시로 남겼는데, 이 시집은 ‘환구음초 (環璆唫艸,1896)’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사행을 했던 윤치호도 ‘윤치호 일기’라는 방대한 일기를 남겼습니다. 그의 일기는 현재도 국역이 되어 출판된 것으로 압니다.
초기 기독교인으로 미국유학과 파리유학을 경험한 윤치호는 이후 친일로 돌아서는 데, 이미 이 러시아 사행에서도 그 징조가 보입니다. 이 문제적 인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영환이 김득련의 ‘환구일록’을 기반으로 고쳐 쓴 ‘해천주범(海天秋帆,1896)’ 이 있습니다. 김교수에 따르면 이 두책은 내용이 거의 똑같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메이지 초기 있었던 구미사절단의 행적을 기록한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米歐回覽實記,1878)’과 비교될만한 이런 기록이 왜 번역되고 연구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난후 19세기 말 조선이 처한 난처한 상황과 한편으로 전근대적인 고종의 시각과 바깥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정황을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7-18세기 중국 사행을 통해 일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조선은 정조 이후 세도정치기에 서학을 탄압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반면, 일본은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이후 네덜란드와 나가사키를 통해 교류를 지속한 것이 일단 눈에 띄게 다른 두 나라의 외세에 대한 입장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16세기 병자호란 이후에도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을 유지하고 내부 정치투쟁에 매몰되었던 사실은 매우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결과적으로 군사제도의 근본인 농민들을 수탈하기만 할 뿐 그 어떤 제대로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를 맞아 결국 20세기 들어 나라를 일본이 빼앗기게 됩니다.

따라서 척족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가문들이 아직도 명문이라고 칭송받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멸망에 일정한 부분 지분이 있습니다. 소위 이들 명문가문들은 말이죠. 자신의 이익만 챙겼는데 왜 존경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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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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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한 책으로 ‘한국 출신’일본인들의 ‘일본이주 ‘와 패전이후 이들이 기억하던 ‘식민지 조선’이 1965년 한일정상화 이후의 한국을 통해 어떻게 인식되어지는지 인터뷰와 동창회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의 회고록, 이들과 동창 관계에 있던 소수의 조선인 동창과의 교류를 살펴 봅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살 때 인식하지 못했던 ‘식민자 ‘로서의 자각을 일본의 패망이후 일본으로 다시 이주한후 일본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또 다른 존재로 바라 보았을 때 비로소 느꼈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흔히 일제 강점기를 볼 때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인데 비해 당시 일본 본토( 내지, 內地라고 불리던)에서 조선으로 ‘이주’해온 재조 일본인에 주목한 점은 그래서 참신합니다.

인터뷰를 한 한국 출신 일본인들 중 이미 고령으로 고인이 된 분이 많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1920-1940년대 이들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과 경험담,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지(ethnography)적’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1930년대 말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에 이들이 경험했던 학교 생활과 조선인들과의 생활경험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략침략과 그들의 군사물자 동원 , 식량 증산계획 등을 숫자가 아닌 일차적 경험으로 알려주는 것이기에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하는 경성사범학교 출신들의 경험담과 경성중학교 출신의 경험담은 시대의 차이를 두며 약간 다른 양상을 띄지만 이미 일제는 1930년대부터 사범학교 출신 국민학교 교원들을 조선 각지의 농촌에 발령내고 이들을 통해 식량 중산을 꾀했고 이들을 통해 지역을 조선총독부 정책 실행의 최전선에 앞세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경희궁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이미. 조선총독부 자녀들만을 위한 일본인 학교였으며 아주 소수의’양반가 ‘ 조선인이나 사업가 자제들만이 이 학교에 입학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산 그룹을 세운 박승직 상점가 장남 박두병이나 한은 초대총재 구용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등이 경성중학교 출신인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국가정책에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계층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일제가 아무리 조선을 일본화하려 해도 조선의 촌부들이 일본어를 잘 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발령받은 경성사범 출신 일본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조선어로 의사소통 할 수 밖에 없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당시 졸속으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막후 접촉을 위해 일본의 자민당 간사장 출신 정치인이 청와대를 방문하고 비밀협상을 한일 양측 모두 ‘일본어’로 진행했다는 후일담이 나왔을 때 매우 놀랐고 경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일제시대를 산 인물들이라 일본과 관계가 긴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딸까지 일본에게 어쩔줄 몰라하다니. 부녀가 일본에게 한국을 얕잡아볼 기회를 제대로 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때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은 소위 한국사회의 ‘원로’라는 집단을 통해 한국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1960년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지 10여년 해방이 된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로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엘리트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위의 경성중학교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자신의 동기 동창들이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산업화 세대가 은퇴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960-70년대 처럼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는 하기 어려울 것으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지난 40여년간 일본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몹시 불편한 기분입니다.

또 한가지 이들의 인터뷰에서 불편했던 점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1930-40년대 당시 조선인들과 ‘잘 지냈다’는 이유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났던 차별을 은폐하려 했던 경향이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이 본격화되었는데도 본인들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농촌 부락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무마하고 자신들이 총독부 정책을 충실히 집행한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 듯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청산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온 한국이나 일본모두 그래서 애매하게 상황을 마무리짓고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태평양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미국이 러시어와 중국의 힘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모두 일제 강점기 상황을 그대로 놔둔 체 ‘현상유지 (status quo)’를 채택해 온 것이 해방이후 70여년이 넘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 자리는 일제가 한일병합이후 경복궁 에 조선총독부를 1925년 완공해 입주한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관료들을 위해 관사를 만들고 또 이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경희궁이라는 조선의 궁궐 자리에 학교를 지은 것도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19세기 말 경성에 진출한 당시에 모여살던 현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점차 양반들이 모여살던 북촌으로 거주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경성중학교 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립된 것입니다. 종로와 북촌일대에서 많이 모여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따로 모여 살았는지 같이 섞여 살았는지는 연구서들마다 약간씩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섞여 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는 대체로 일본인들이 독점해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빈부격차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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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려고 했던 책 중에 ‘유럽과 역사가 없는사람들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2010)’이라는 오리엔탈리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저작이 있습니다. 아마존의 책소개에 따르면 책의 기본 개념과 용어 자체가 다분히 서구 중심적(Eurocentric)으로 유럽과 그 외의 지역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비서구를 ‘몰역사적(ahistorical)’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정적으로 존재하는 변화없는 보여지는 존재가 바로 서구가 비서구를 바라보는 시각(perspective)입니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뉴욕시립대 (CUNY) 교수의 저작 제목이 이럴정도라면 다른 보수적 교수들의 저작은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위에 소개한 책은 기회가 되면 다시 리뷰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반면 오늘 소개할 강인욱 교수의 책은 위의 책과 정반대를 지향합니다.

역사는 승자가 집필한 기록으로 이해되고 ‘주류(mainstream)’들의 생각과 기록만이 남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당시의 사회상을 제대로 재구성하기가어려운 현실 속에 소위 역사학의 인접학문인 고고학과 인류학 등이 이 기록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과거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단순한 문서기록뿐만 아니라 지나간 삶의 생활흔적을 보고 당시의 생활을 재구성(r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와 비슷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소위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도 19세기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을 당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박물관은 사실 이들이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입니다.

고고학자인 저자의 고백처럼 고고학은 제국주의를 위해 철저히 봉사한 일종의 관학(官學)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근대화된 ‘문명국’이 ‘미개한’ 식민지에 ‘문명’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오키나와와 에조치(蝦夷地, 현재 홋가이도 ), 대만과 만주를 침략할때 앵무새처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참고로 일본은 본인들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했다고 저자는 전합니다.
탈아입구에 목마른 건 알겠는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똑같은 주장을 지구 반대편의 스페인이 마야제국을 파괴하고 마야인이 미개인이며 이교도라고 학살하면서 했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작 파리의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서 직접 이들이 약탈해온 유물과 본국의 유물을 비교해서 보면 유물이나 미술에 문외한인 저의 눈에도 서구유럽의 ‘선진적 문화’가 과연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든 경험이 있습니다. 서양공예의 조잡한 형태를 보면서 이들이 왜 중국도자기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 1990년대 말 대영박물관에서 캄보디아의 이름모를 고대왕국의 섬세하고 복잡한 도자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후진국이라고 배웠고 동남아시아나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했던 20대 후반의 사회초년생이 몰락한 제국의 수도에서 그 진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학술적인 성격이 전혀 없지 않으면서도 대중서의 성격을 가진 이 책은 저자가 한겨레에 연재한 글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저자후기에 썼습니다. 저도 이 책의 글중 몇편은 안터넷으로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300쪽이 조금 넘는 작은 책이지만 각 글에서 인용한 필수 참고문헌을 충실히 실어 다른 한국의 논픽션류와 다른 차별성을 보입니다.

저는 소설이나 문학작품이 아닌 모든 논픽션, 사회과학, 자연과학서 그리고 역사서들은 반드시 참고문헌과 각주와 찿아보기가 뒤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누구든 이를 제공하지 않는 책을 믿지 않습니다. 책을 머리말부터 후기까지 모두 읽는 저는 한국의 저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저작에 기여한 이들을 드러내는데 안색하고 이런 좋지 않은 관습이 책 내용을 심각하게 저하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책 내용으로 잠시 돌아가서 이 책이 ‘미지의 땅’에 사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지배 속에 오랑캐로 치부되었던 돌궐, 말갈, 흉노, 소그드인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극동 시베리아의 동쪽 끝 오오츠크해와 배링해의 애스키모 민족들, 일본 본토에서 살다 홋가이도까지 쫓겨 올라간 아이누인들과 막부시대 청과 일본에 복속했던 류큐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베링해협을 통해 북아메리카에 건너갔을 가능성도 이야기 되고 있고 마야문명과 중국문명과의 관련성도 이야기됩니다.

글을 읽다보면 아메리카 대륙이 15세기에 ‘발견’되었다는 건 서구 유럽에서 그들의 시각애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유럽문명울 신대륙에 ‘이식’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체 서구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 ‘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영화에서 백인들에게 못된짓을 하는 야만인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영상 속 ‘이미지’일 뿐 그 실체가 아니고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는 것이 우리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끝으로 저는 강인욱 교수 책을 처음 읽어 보았는데, 이야기 자체가 설득력도 있고 쉽게 쓰여 좋았고 보기 드문 시베리아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의 책이어서 이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개론서로 읽어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에서 신라를 다루면서 언급한 흉노족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은 현재 없습니다. 다만 10여년 전 나온 ‘흉노제국이야기(아이필드,2010)’이 거의 유일합니다. 중국학자가 쓴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흉노가 현재 터키를 이룬 튀르크족의 조상이라고 하고 서양 고대 시대를 끝낸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The Huns)라고 믿어지는데도 국내 저자가 쓴 책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학계가 한반도 북쪽인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전에 말한 적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면 바로 마주치는 ‘오랑캐’들이 바로 흉노와 여진, 돌궐 등 유목민족이었을텐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비난은 하면서도 이들 유목민족과 이 초원지역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학계가 아직도 ‘소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구중심주의니 해서 비판을 했지만 서구의 보수적 학자들이 연구하는 걸 보면 무섭습니다.

서술경향을 떠나 한 전문연구자가 특정주제에 대해 1000쪽 저작을 내는 경우는 흔하고 역사학자나 정치학자가 단독 저서로 약 2000쪽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 저자의 같은 사례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미권 학자들은 그렇게 하더군요.

책의 두께가 필요충분조건은 안되더라도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컨텐츠란 쌓여야 축적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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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역사 - 개방, 경합, 공생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
하네다 마사시 지음, 조영헌 옮김, 고지마 쓰요시 감수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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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학자들이 3년간 공동연구 공동집필 후 나온 동아시아 해역사를 조망한 연구서입니다. 내용의 밀도와 깊이가 상당한 이 책은 13-14세기 몽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진 시기, 16세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접근하고 명을 중심으로 조공체계가 자리잡히고 ‘대왜구’가 출몰하던 16세기, 그리고 강력한 동아시아 정치세력들이 해상무역을 통제하던 18세기를 다룹니다.

모두 근대이전, 그러니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포함) 전통시대의 해역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합니다.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인 육지의 통치세력 관점의 정치사 또는 왕조사 위주의 서술이 가지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일한 사실(史實)에 대한 다른 관점(perspective)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근세사는 고려 조선과는 전혀 다른 봉건적 막번체제(幕藩體制)인데다가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각 다이묘의 세습가문 등으로 이해하기가 무척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일본학자들의 저술이니만큼 이 책의 주된 촛점은 동아시아의 해역교류가 일본전통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따라서 몽골의 패권시대인 13세기에 동아시아와 인도양이 더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라든지, 일본에서 몽골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시 몽골의 속국이던 고려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가 설명됩니다.

포르투갈의 등장과 일본산 은 그리고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들어온 신대륙 은의 중국 유입과 더불어 명나라 가정제 (嘉靖帝) 때 일어난 ‘가정왜구(嘉靖倭寇)’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과 물품이 교역되고 혼종이 된 시기로 16세기를 특징짓습니다.

18세기는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의 이른바 ‘쇄국정책’과 청의 강력한 해상통제 정책 그리고 조선의 해상통제 정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청은 조선은 육로를 통해서만, 일본은 직접 통상하지 않은 체 류큐를 통해 교역했고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류큐는 현재 가고시마의 사스마 번주와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과도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막부정권과 직접 통교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모든 외교 및 통상절차를 진행했고 부산항을 통해서만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조선의 북쪽 교역자는 평안도 의주와 함경도 회령 경흥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도 부산포함 총 4곳의 교역지에서만 국경이 열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정권권력이 해상을 통항 인적교류와 통상을 강력하게 통제했지만 물품과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로 18세기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일어난 육지를 통한 사행이나 일본으로의 통신사 교류,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이루어진 유럽세력과 중국의 교류, 나가사키를 통한 중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 류큐와 일본 그리고 류큐와 청의 교류, 쓰시마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이시대 해양교류의 다양성을 반증합니다.

외부세력에 대해 특히나 폐쇄적이었던 조선은 18세기의 폐쇄성을 19세기에 가서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동진과 유럽세력 특히 영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아시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오는 상황을 간과해 버린 것이 20세기 들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명이 멸망하고 청에게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을 하였는데도 그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사대부들과 그 후대 양반들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들어서까지 만주족인 청이 중원의 지배자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명에대한 의리만 생각하는 명분론을 주장하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인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 중 ‘송자’라고 칭송받는 송시열에게 조선 멸망의 책임을 지우는 건 따라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하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사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말그대로 쇄국책을 쓰다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던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나요?
역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18세기 이래 조선처럼 강고하게 외국과의 교류에 철저하게 무감한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났는데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만 바라다 본 셈이지요.

이런 무감한 처사가 결국 19세기 말 청나라가 조선을 실제로 속국화하려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조선이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며 표명해온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뒤이은 19세기 외척 세력들이 조선왕조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들이 청나라 사행이후 간접적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에 대해 배척하고 이를 탄압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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