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래된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강준만 교수님의 강남에 관한 책,’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인물과사상사,2006)’을 읽는 가운데 인용된 책 중에 이 책이 있었습니다.

2002년 11월 출간된 책이니 내년이면 출간된지 20년 되는 책입니다.

서울의 공간과 강남개발 등을 말할 때 위의 강준만 교수의 책은 언론학교수가 쓴 사회학적 입장에서 쓴 책임에도 상당히 자주 인용되는 책이고, 형식 상 도시기행 에세이인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의 도시계획에 관여를 해오시고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와 서울역사박물관을 이끄셨던 강홍빈 교수와 사진작가 주명덕 작가께서 쓰신 책이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재가 보기에 이전에 소개해드렸던 서울대 김시덕 교수의 서울답사기,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의 길잡이 비슷한 역할을 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200쪽도 안되는 작은 책이지만 2002년 당시의 서울의 도시풍경을 담은 사진도 지금 시점에서는 기록으로 가치가 있고 강홍빈 교수께서 각 글 꼭지마다 충실하게 인용문헌을 표시해 두셨습니다.

서울의 도시계획과 그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손정목 교수님의 영향력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과 수도권 각 자역의 도시개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1960-70년대 개발연대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시나 건축에 대한 역사는 한국에서 볼모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과거가 현재의 토대인데도 특히 과학 기술교육이 기술습득에만 치우친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기술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와 맥락을 모르는 ‘영혼없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죠.

기술자들의 사회에 대한 몰이해는 사회 전체에 큰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이 이치에 맞아야 하는데 아무데서나 정확성, 경제성을 따질 수는 없으니 말이죠.

세종로에서 태평로, 소공동을 거쳐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지나 이태원과 용산 미군기지, 해방촌을 지나 반포대교를 건너 반포와 서초동을 지나 예술의 전당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 종단길이 이 책에서 이야기는 장소입니다.

군사정권이 1970년대 들어 강남개발을 시작하면서 공유수면매립과 토지구획정사업을 통해 군소 건설업체들이 재벌로 도약할 기회를 주었고, 의도적으로 강북의 개발을 억제하고 강남개발촉진을 위해 아파트만 지을수 있는 아파트 지구를 설정한 사실 등은 서울의 도시개발이 즉흥적인 대처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해줍니다.

군사정권은 ‘안보’를 빌미로 강북에 거주하던 인구를 당시 허허벌판이던 당시 경기도 광주군(강남)으로 유인하기 위해 강북의 경기고를 비롯한 명문고등학교를 이전시켰습니다. 군가쿠데타에 동참했던 군인출신 서울시장은 군사작전하듯 무자비하게 일을 추진했습니다. 이후 1980년 들어 택지로 구획되지 못했던 반포 인근 근린공원용지에 법원과 검찰청을 이전시켰고, 전두환 신군부는 문화창달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서울에서 접근이 어려운 우면산 아래에 예술종합공연장인 예술의 전당을 한꺼번에 지었습니다.

도시계획의 틀안에서 행해진 장기적으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아니고 이 모든 하드웨어 건설을 그 당시의 여건에 따라 개별적으로 행해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책의 결론에서 한국사회가 아직도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관료들이 하드웨어 건설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지적한 점은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부족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자영업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바탕으로 방역체계가 세워졌으며 대형민간병원은 영리를 이유로 전염병 예방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2년이 지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도 감염병 전문병원이나 공공병원 확충은 없습니다. 의료인력 충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부채는 계속 증가하는 반면 국가부채는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입니다.

산업화시대를 지나는 동안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하은데도 사실상 책임을 방기해 왔는데 이 세기적 재난을 맞이해서도 정부는 아직도 그 역할을 더욱 더 방기하고 있습니다.

첫 단추는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잘못 끼워졌고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현재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는 고위 관료층이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와 현재 진행되는 팬데믹이 국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는데도 한국정부는 이런 면에서 너무 무력합니다.

사회안전망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가 조장되는 측면이 있는데도 관료들이 자신의 주택가격이 올라가니 그냥 사회안전망 시스템 도입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절판된 줄 알았는데 아직 출판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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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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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쪽 가까이 되는 메이지유신관련 정치경제사 책입니다.

역사가가 쓴 책이 아니라 언론인 출신 작가가 쓴 책이고 일본사료를 주로 인용했지만 각주나 인용형식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그리고 참고문헌에는 나오지 않고 본문에서만 인용된 책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서술하고 주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출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단점이 존재합니다.

출판사에서 아셔야 할 것이 이책과 같은 일본 근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부실한 각주와 인용이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각주와 인용이 없기를 바라면 소설을 읽어야지 뭐하러 역사서같은 논픽션을 찿아 읽겠습니까?

이상이 이 책의 형식적인 측면이고 내용에 대해서는 두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메이지유신을 본 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규슈 (九州)의 사쓰마 (薩摩), 와 사가(佐賀) 그리고 혼슈(本州)와 규슈를 연결하는 조슈(長州)지역이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에 가장 많은 병사를 보낸지역이며 이미 15세기부터 아시아에 교역을 하러 나타난 포르투갈 상인과 교역을 시작하고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총포를 포르투갈에서 도입하고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카톨릭 포교를 강제하는 포르투갈과 관계를 정리한 후 네덜란드와 사가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점으로 교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츠마에서 포르투갈 소총을 처음 도입하게 되고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교역하면서 근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각종 의술과 전쟁에 관련된 기술, 항해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17-18세기 규슈를 중심으로 난학(蘭學)이 발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쓰마와 사가지역은 에도시대 중심인 현재의 도쿄에서 멀리떨어진 변방이라 중앙 바쿠후(幕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한 영향도 있고, 지리상 위치가 중국의 남부해안지역과 한반도 남단 그리고 류큐(琉球), 타이완(臺灣) 등과도 멀지 않아 일찍부터 대외교역(또는 해적)활동을 많이 해온 관계로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덜했던 걸로 보입니다.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県)에 해당하는 조슈지역은 혼슈남부지역으로 간몬해협(關門海峽)을 사이에 두고 규슈와 연락됩니다.
오래전에 후쿠오카(福岡)-고쿠라(小倉)- 모지(門司)- 시모노세키(下關)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철도로 3-4시간내에 갈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까지도 기차로 2 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고 나가사키 바로 옆에 미군기지가 있는 사세보(佐世保)항이 있습니다.

나가사키 글로버 저택이 위치한 언덕에 서면 미쓰비시의 나가사키조선소가 보입니다. 과거 군함을 건조하던 곳입니다.

현재도 부산-시모노세키간 관부연락선( 關釜連絡船)이 오고가던 곳으로 한반도의 영향이 지대한 지역 중 한곳입니다.
가깝게는 얼마전 퇴임한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 그리고 그의 외할아버지로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로 불리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을사늑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모두 죠슈 출신입니다.

역대 조슈지역 출신 총리들은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메이지유신이래 한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총리가 ‘대대로’나온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기지속의 역사로 매이지유신를 살피면서 저자가 주목한 또 한 부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이후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입니다.

사실 도자기가 임진왜란 포로들에 의해 일본에 도입된 사실은 알아도 누구도 경제적 영향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서 일단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진실을 찾아내는 노력은 주목할만 합니다.

서쓰마와 사가 그리고 조슈 모두 조선에서 건너온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의 도자문화의 시조가 되었으며, 이들은 일본에서 살기 위해 에도막부시절부터 각 번의 영주들에게 도자기를 납품하였습니다. 수출품이 별로 없던 당시 일본에서 각 본 지도자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상인들에게 도자기를 수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도자기를 팔아 만들어진 재원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각종 상선과 중기선, 그리고 전함을 사들이고, 화포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럽으로 수출한 도자기가 분명 국가재정에 큰 보탬이 된 것 같지만 설명 자체는 비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영국에 수출한 도자기가 일본의 전체 수출액 중 얼마를 차지했는지 보여주고 추이를 알려주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책에서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자기관련 부분을 읽으면서 정치경제사인지 도자사인지 좀헷갈렸습나다.

다음으로 매이지유신은 결국 영국이 후견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러시아의 동진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입장이라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력은 이미 1840년 아편전쟁이후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메이지 유신 당시인 19세기 중반 나가사키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무기상인 글로버가 규슈 전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자딘 메디슨의 나가사키 지사인 글로버상회에서 일한 글로버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등 조슈출신 번사들의 영국유학을 알선한 장본인이고, 사쓰마와 조슈에 매이지 유신을 위한 무기를 공급해준 사람이었고,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을 만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동업자였고 이후 글로버상회가 파산한 후 미쓰비시의 고문으로 일하게 됩니다.

영국은 무기상인 글로버를 통해 일본을 후원했고 대륙세력인 러시아의 영향력 저지를 위한 큰 밑그림이 있었습니다.

미국도 입장이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 외무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간 가쓰라 태프트 각서를 체결해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합니다.

이협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영미권 업무처리의 특징이 철저하게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준비하는 것이고 이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상업적 마인드라면 이들은 약 160여년 전에도 일본과의 비지니스애서도 철저하게 그러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슈번의 유신을 이끈 정치인들의 출신에 대한 사항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메이지천황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조슈번 출신 유신 정치가들이 대부분 조선인의 피가 섞인 이들이라는 점과 매이지 천황이 조선인 부락 출신의 천민과 바뀌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장이지만 저자의 글과 일본에서 출간된 책의 어주 간략한 인용밖에 없어 솔직히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놀라우면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이 되죠. 당혹스럽기도 하고.

인용한 책의 출판년도도 1970년이니 이미 50년전에 나온 책인데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후에 유사한 내용으로 추가적인 연구발표가 있었는지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자료가 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내용은 책의 마지막 정인 6장 후반부에 주로 나옵니다.

과문한 저로서는 조슈지방에 임진왜란 당시 끌려갔던 도자기 장인들의 후손들과 여러 임란 당시 포로들이 과연 조슈번에서 일대를 풍미했던 정한론(征韓論)과 관련이 있는지 주장하는 건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찿았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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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출간된 신간입니다.

구한말 고종 재임시 서울에서 초대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의 평전입니다.

내용은 거의 90%이상 베베르가 조선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1860년대부터 189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을 다룹니다.

이 책은 러시아 외교관의 외교활동을 러시아 사료를 통해 접근했다는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계 러시아 역사연구자인 벨라 보리소브나 박의 러시아어 저서를 한러관계사를 전공한 두 전공자께서 한국어로 번역한 책입니다.

글의 대부분이 외교문서의 인용이 많은데다 번역투도 있어 아무래도 한국 연구자가 직접 저술한 책처럼 가독성이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가 1840년 아편전쟁이후 영국이 영향력을 동아시아지역으로 점차 넓히고 있었고 시베리아로 동진을 해서 연해주에까지 진출한 러시아도 조선과 함경도에서 국경을 맞대면서 조선문제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베베르라는 러시아 외교관은 중국전문가로 외교관에 들어선 인물로 최초에 중국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해 1884년 조선과 러시아와의 수교조약을 체결한 실무자였으며 조선과 러시아와의 육로교역을 위한 조러육로통상장정을 체결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조건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갑오개혁(甲午改革,1894), 을미사변 (乙未事變,1895),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1895) 등을 현장에서 지켜본 외교관 중 한명이었습니다.

아마 외교관 베베르가 한국 근대사에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은 그 자신이 고종과 가까운 고종의 정책자문을 해왔다는 사실과 최초 조선에 러시아공사관을 개설하고 제정러시아와 조선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역사적 고비마다 일제의 조선의 주권 침해에 맞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1896)이 일어나는데 이 정치적 행위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게 됩니다.

을미사변이라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상태였던 고종은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고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은 궁궐을 에워싸는 등 그들의 침략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러시아의 개입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친일내각을 붕괴시키고, 정국의 반전을 이루게 되고, 고종은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친일내각을 경질하고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민영환과 윤치호를 특사로 보내 러시아 군사고문과 러시아 병력지원을 요청합니다.

러시아 외무성은 한반도에서 이익이 서로 부딪치는 일본과 무력충돌을 피하려 했지만 일본이 조선을 그대로 점령하게 놔둘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외교 기조를 이어갑니다.

고종의 러시아 병력 요청도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베베르의 오랜 요청 끝에 성사됩니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 러시아는 조선보다 만주와 연해주에 더 많은 외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베베르가 일본의 영향력 강화에 맞서는 러시아의 외교정책 전환을 촉구했지만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이익우위를 인정하면서 대조선정책을 소극적으로 일관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다시 맞붙을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1890년대 말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1880년대 청의 대조선 간섭이 강화되어 조선을 속국처럼 대할 당시는 모두 청국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었고 청일전쟁(1894-1895)를 치룬 이후에도 일본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매우 버거워 했습니다

하지만 청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러시아와 조선은 대조선 정책을 두고 러시아와 맞서지만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하면서 교묘하게 러시아를 회피합니다.

일본에게 러시아를 비롯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울주재 서구 외교관들의 존재는 관리를 해야만 하는 걸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전반적인 책 내용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애서 언급한 구한말의 정치적 격변은 각각의 사건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존재합니다.

러시아 사료를 중심으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조명한 책으로는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눈보라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경인문화사,2012)’를 보시기 바랍니다.

민영환의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 참석에 관한 김영수 교수의 책도 유익합니다.
미국을 통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러시아 차르를 알현하고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연해주를 거쳐 인천에 다다르는 사행길을 다룹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

흔히 긍정적으로 해석되던 친일 개화파의 갑오개혁과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연구서도 있습니다. 책분량이 상당해 그냥 참고로 소개합니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이다.
갑오개혁은 친일파들이 일본을 등에 없고 사실상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또 하나의 왜란이라면 측면에서 접근한 해석으로 사실상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에서 조선을 침략했던 규슈의 삿쵸동맹(薩長同盟)의 후예들이 300여년아 지난 후 친일파 앞잡이들은 내세워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관점으로 갑오 개혁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는 사실상 고종의 러시아망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입니다.

해외로의 망명이 여의치 않으니 일본이 접근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을 해서 의병들의 봉기를 지휘했다는 지점을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던 고종을 근대적 군주로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이 아마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2000)’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종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서양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의 조선애 관한 개괄적 역사서애서 비롯된 면이 크고 일제가 의도적으로 고종의 능력을 폄하해 유약한 군주로 만들어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고종은 재위 40년이 넘었던 통치자로 오랫동안 통치한 18세기의 영조만큼 오래 재위한 임금이기도 하고 스스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에서 조선을 개화로 이끈 군주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구한말은 조선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처음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던 시기이기도 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시기입니다.
일제의 흔적이 남기전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 유교적 사고방식을 지닌 상태이지만 변화하는 환경과 정세에 이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다시 한번 들여다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다만 19세기를 휩쓸었던 민란이 일어난 원인이 정조 사후 발생한 세도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이 역사에 끼친 악영향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100여년간 그 이전에 확립되었던 조선의 정치제도가 무너져내린 겁니다.


이들이 모든 걸 망가뜨려놓아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군대를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된 군대가 전혀없고 국가자체 재정도 부족하니 청나라와 러시아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에게 병자호란 (丙子胡亂,1636)에서 패하고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의 예를 지내고 심양으로 왕세자도 인질로 보내고 백성들도 인질로 보냈는데도 도대체어떻게 했길래 250여년 만에 군대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집권층인 양반사대부들에게 있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 안하고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무신을 천대하고 돈버는 상업활동을 천대해서 화을 자초한 것입니다.

같은 양반인데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차별하고 문과급제의 기회를 주지 않던 나라였습니다.

19세기초를 흔들었던 ‘홍경래의 난(1811-1812)’이 평안도에서 지역 지배층의 불만으로 일어났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김선주,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서울과 경기지방 출신 양반들이 국정을 좌지우지 한거죠.

19세기에도 기원전 7세기 쯤의 고대 중국 문헌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니 상황이 황당하고 할 수밖에 달리 생각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조선후기시대에 관해 읽어본 책들을 보면 결국 이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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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의 첫개항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항구입니다. 중국 산동(山東), 요동(遼東)지방과 배편으로 지척인 곳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인천에 정착한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천과 인연이 있는데다 중국음식 , 특히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해외에서는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많이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인천역 앞에 자리한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리 큰 곳은 아닙니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미국 뉴욕만해도 엄청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인천은 정말 소소합니다.
이는 제가 알기로 1960-70년대 이땅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멸시때문에 이렇게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이 이땅에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이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건 사실상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을 개항(開港)한 이후부터입니다.

개항이후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인천에 들어섰고 그 이후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이후 15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인천을 터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때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과 군벌(軍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양상을 띄는 혼란이 일어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다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더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처음 중국산 면포와 비단등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던 화상(華商)들은 조선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총독부와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사업을 그들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산 면포 등에 대해 일본산 직물들이 싼값에 거래되기 시작하고 총독부에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갑자기 사업에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총독부의 규제를 받아오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국의 나라에서 버틸 수 없던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나 귀국했고 화상들의 사업은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미군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합니다. 패전국 일본과의 교역은 군정 당국이 막아서 일시적으로 인천화상들은 호황을 잠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자 이후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냉전(Cold War)의 영향으로 공산국 중국과 민주주의 국가 한국간의 교역은 중단되고 인천 화상들의 대 중국 교역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선 한국의 군사정부는 중국과의 거래를 불허하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인에 비해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한국정부의 차별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을 보게 되고 이동과 작업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집을 하게 됩니다.

초기 화교들은 포목상이나 잡화점 등 장사를 주로 많이 했지만 이들 업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자 음식점 등 다른 업종에 대한 비중이 많이 커진 것으로 압니다.


근대이후 한국땅에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들만의 기억과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국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된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연구한 책도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2016)

심층 인터뷰를 통한 인류학적 접근을 했던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인천화교들의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입니다.
인천화교협회의 사료를 통한 경제사회사 연구죠. 인천대학교에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인천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화교들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인천의 중국음식을 이야기한다면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짜장면뎐( 프로네시스,2009)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회상에 잠길만한 내용을 처음으로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천 구도심에 가게되면 저는 근처의 유명한 화상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기본 50년 이상된 곳들도 많고 짜장면의 경우 발상지가 인천이라 가면 먹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려스러운 요새의 중국관련 뉴스와 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좋던 싫던 중국인들이이땅에 들어와 산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고 특히 인천의 경우 작지만 아직도 중국화교와 화교들이 제공하는 특유의 중식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화상 중국집을 이야기하면 인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인천 문화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이 상황에 긴장한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들과 서구 유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만이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길어봐야 18세기 이후 나온 개념과 체제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백인 남성들애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860년대까지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들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조강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고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소위 유럽의 근대 이전 동서양은 모두 절대주의 전제왕정 체제였습니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체제도 변질되어 정말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덮어놓고 민주주의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20대 국회의 약 40%의 의원들이 법조인 출신이라고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40%가 법조인인가요? 법조인이 국회를 과다점 유(over represented)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할 여성과 청년 그리고 농민들은 국회에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합니다. 즉,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50-60대 남자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출신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황은 차라리 대의제 만주주의를 악용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소수의 고위 공산당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과 차이가 뭐죠? 두 국가 모두 소위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과정을 이끌어갑니다.

따라서 그 정치체제를 부르는 명칭보다 중요한 건 정말 정치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새 서구의 지식인 층에서 나오는 중국 혐오 발언은 과한 면이 많습니다. 다분히. 인종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 따라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여론주도층도 본인이 미국과 유럽에 사는 것마냥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냅니다.

역사적으로 미국보다 중국과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공이던 전쟁이던 외교 등 무엇이던간에 한국은 중국과 더 오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건 냉전으로 인한 몇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 상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방법이 없어요.

미국이 중국에 적대한다고 덩달아 적대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자살골이죠.

오히려 미국과 일본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일본과의 마찰은 미국과 해결해야 합니다.

인천의 화상들은 100년 이상 한국에 살아온 이웃이란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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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이철승 교수의 두번째 불평등 연구서인 ‘쌀 재난 국가(2021)’을 완독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의 동의여부를 떠나 사회과학적 실증연구의 좋은 사례를 본 것 같아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여태껏 서구의 이론과 사례를 소개하고 번역하는데 치중하고 현재 한국이 직면한 현실분석에 인색한 한국의 연구풍토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식 인사관리제도인 ‘연공제’가 벼농사를 짓던 동아시아 특유의 소농사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고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합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팩트( Fact)를 확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사료로서 확인하려 한다면 사회과학자인 자신은 과거의 상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드물게도 한국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에서 나온 데이터 분석이 가미된 연구서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선례(先例)’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비슷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 있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의 경우입니다.

다른나라의 사례와 이론이 한국에 맞지 않는 건 풍토와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여태 서양이론을 수입한 학자들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분석은 고사하고 왜 어떤 이유로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스스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불과 30여년 만 하더라도 서양학문이 아닌 한국학이나 동양학을 하면 괴짜 취급을 당하기 쉽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누가 연구를 해야 하나요?

서구에서 나온 책 중에서 한국학을 하신 스위스출신 마르티니 도히틀러 박사의 ‘한국의 유교화과정(너머북스,2013)’을 읽고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출신 한국학자 분이 우리도 잘 모르는 가족 친족 제도부터 중세 한국이 어떻게 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한국의 사료를 정리해 두터운 연구서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한국학자가 쓴 연구서를 읽을 때 너무 어려운 용어를 남발해 어렸을 때 나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책들의 저자의 ‘앎’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이가. 개인적으로 문장이 짧고 간결하며 쉬운 글을 쓰시는 분의 지식이 더 깊은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소화되지 않아 보이는 글이라는 건 내용 자체도 소화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가 읽은 연구서 중 역사적 부분을 고찰하고 동시에 역사적 자료를 분석까지 한 한글로 쓰인 책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해외의 이론과 설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이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할 이유는 없고 그냥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문 367쪽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입니다.

이책은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2019)’와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입니다.

전작이 386세대가 너무 오랜기간(30여년) 동안 연공제라는 인사제도의 덕을 보고 오랫동안 정치 경제권력의 상층부를 독점하다보니 한국의 세대간 불평등이 생겼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이책은 전작에서 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연공제가 어디서 생겼고 언제부터 생겼으며 왜 한국 땅에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연공제가 생긴 이유가 벼농사를 짓는 한국의 소농경제체체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와 조선이후 정착된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통치권력과 연결되며 국가를 통한 ‘지대추구’가 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을 소환합니다.

한국에 아직도 제대로된 직무평가기준과 숙련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없다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온대로 편하게 살아온 것이지만 앞으로 바뀐 환경에서 연공제는 과거 발전주의 시대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찿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는 벼농사 시대의 최초한의 구휼만을 미덕으로 알았던 ‘작은정부’는 예상되는 인구감소와 마을과 대가족의 해체와 파편화된 사회구조 속에 보편적 복지마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봅니다.

즉 하루빨리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 ‘빨갱이’소리를 듣는 기막힌 현실에서 실제로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실현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 2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도 정부는 확대 재정정책을 추구하는데 인색하며 아직도 공공의료인프라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계의 부채가 역대급으로 증가하는데도 정부는 세수추계를 잘못 예측하고 OECD국가 중 최저수준의 국가부채 증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재부 관료들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IMF가 정해둔 1990년대 말 작성된 ‘재정준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균형 재정을 주장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작은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의 유효성은 2007-2009 금융위기로 이미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큰정부의 재정 투입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철밥통 기득권인 공무원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재난의 시기인데도 확인할 수 있는 건 공무원들의 ‘영혼없음’을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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