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이철승 교수의 두번째 불평등 연구서인 ‘쌀 재난 국가(2021)’을 완독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의 동의여부를 떠나 사회과학적 실증연구의 좋은 사례를 본 것 같아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여태껏 서구의 이론과 사례를 소개하고 번역하는데 치중하고 현재 한국이 직면한 현실분석에 인색한 한국의 연구풍토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식 인사관리제도인 ‘연공제’가 벼농사를 짓던 동아시아 특유의 소농사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고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합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팩트( Fact)를 확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사료로서 확인하려 한다면 사회과학자인 자신은 과거의 상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드물게도 한국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에서 나온 데이터 분석이 가미된 연구서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선례(先例)’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비슷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 있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의 경우입니다.

다른나라의 사례와 이론이 한국에 맞지 않는 건 풍토와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여태 서양이론을 수입한 학자들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분석은 고사하고 왜 어떤 이유로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스스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불과 30여년 만 하더라도 서양학문이 아닌 한국학이나 동양학을 하면 괴짜 취급을 당하기 쉽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누가 연구를 해야 하나요?

서구에서 나온 책 중에서 한국학을 하신 스위스출신 마르티니 도히틀러 박사의 ‘한국의 유교화과정(너머북스,2013)’을 읽고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출신 한국학자 분이 우리도 잘 모르는 가족 친족 제도부터 중세 한국이 어떻게 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한국의 사료를 정리해 두터운 연구서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한국학자가 쓴 연구서를 읽을 때 너무 어려운 용어를 남발해 어렸을 때 나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책들의 저자의 ‘앎’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이가. 개인적으로 문장이 짧고 간결하며 쉬운 글을 쓰시는 분의 지식이 더 깊은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소화되지 않아 보이는 글이라는 건 내용 자체도 소화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가 읽은 연구서 중 역사적 부분을 고찰하고 동시에 역사적 자료를 분석까지 한 한글로 쓰인 책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해외의 이론과 설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이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할 이유는 없고 그냥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문 367쪽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입니다.

이책은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2019)’와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입니다.

전작이 386세대가 너무 오랜기간(30여년) 동안 연공제라는 인사제도의 덕을 보고 오랫동안 정치 경제권력의 상층부를 독점하다보니 한국의 세대간 불평등이 생겼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이책은 전작에서 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연공제가 어디서 생겼고 언제부터 생겼으며 왜 한국 땅에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연공제가 생긴 이유가 벼농사를 짓는 한국의 소농경제체체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와 조선이후 정착된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통치권력과 연결되며 국가를 통한 ‘지대추구’가 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을 소환합니다.

한국에 아직도 제대로된 직무평가기준과 숙련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없다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온대로 편하게 살아온 것이지만 앞으로 바뀐 환경에서 연공제는 과거 발전주의 시대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찿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는 벼농사 시대의 최초한의 구휼만을 미덕으로 알았던 ‘작은정부’는 예상되는 인구감소와 마을과 대가족의 해체와 파편화된 사회구조 속에 보편적 복지마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봅니다.

즉 하루빨리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 ‘빨갱이’소리를 듣는 기막힌 현실에서 실제로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실현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 2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도 정부는 확대 재정정책을 추구하는데 인색하며 아직도 공공의료인프라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계의 부채가 역대급으로 증가하는데도 정부는 세수추계를 잘못 예측하고 OECD국가 중 최저수준의 국가부채 증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재부 관료들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IMF가 정해둔 1990년대 말 작성된 ‘재정준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균형 재정을 주장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작은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의 유효성은 2007-2009 금융위기로 이미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큰정부의 재정 투입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철밥통 기득권인 공무원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재난의 시기인데도 확인할 수 있는 건 공무원들의 ‘영혼없음’을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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