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전력산업의 역사를 다룬 전문 역사서입니다.

보기드문 경제사 전문서이며 여러 기간 산업 중 전기. 전력 발전. 배송전 사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종( 高宗, 이 책에서는 광무황제, 光武皇帝로 지칭) 당시 미국의 콜브란과 황실합작으로 전기사업을 시작하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기 전까지 대한제국 내내 미국의 콜브란은 거의 독점적으로 전차 전등 사업을 영위하고 막대한 이윤을 챙겼는데, 여기에는 고종이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이권을 주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한성전기로 사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의 전력회사는 이후 한미전기회사로 전환되고, 정세 변화에 따라 러일전쟁이후 콜브란은 지분을 일본에 넘기고 이후 일한와사(日韓瓦斯)라는 회사로 통합됩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마국과는 비밀협정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지배를 서로 용인하면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데어도어 루즈벨트는 일제의 조선지배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정치인으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일제 강제병합에 관련이 있으니 따로 이사람에 대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거류민촌이 남산 아래 충무로에서 용산지역으로 확장되자 을사늑약 전까지 콜브란의 한미전기회사가 추진한 용산쪽으로의 전차노선 확장은 일본이 계획했던 경인선 철도의 이권과 충돌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일본은 조선병합 이전부터 미국과의 이권갈등을 겪었고 콜브란의 정치노선을 경인철도와 연계하기 위한 갖가지 공작을 펼쳤습니다.

전력산업이 경제발전과 도시화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조선의 농업문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문제, 도시확장 문제가 거론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무력점령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후 조선의 전력산업을 재편합니다.

최초 조선의 지리적 요건이 수력발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한 후 화력발전을 위주로 산업정책방향을 잡았으나 조선의 하천이 유역변경식 발전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수력발전 위주로 전력발전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서부터 해방전까지 조선의 전력생산은 수력이 주력이고 화력은 부수적인 설비로 개편되고 80%이상의 수력발전이 한반도 북쪽에 몰리게 됩니다. 북쪽은 장진강 수력발전이 주력이고 남쪽은 영월화력발전이 주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전기발전사업과 배전사업은 모두 총독부가 일본의 민간기업인 닛치스 (日室)에게 경영을 일임했습니다. 사실상 조선의 전력사업을 일본의 민간 기업의 영향 아래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불균형적인 전기발전산업의 양상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대립이 격화되고 결국 남북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당시 한반도 남쪽의 전력서정이 극도로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됩니다.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북한지역에 있어 북한이 전력공급을 중단할 경우 단전의 우려가 커져 미군정당국이 북한과 전력공급협상을 해야 했습니다.

헌국전쟁을 거치며 남한지역의 전력부족은 현실로 나타났고 1950년대 한국의 경제관료들 사이에는 자본이 초기 많이 투하되도 경제성이 좋은 수력발전위주로 전력산업발전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미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원을 틀어쥐고 있던 미군정 당국은 빠른 시일내 건설할 수 있는 도시 주위의 화력발전 위주로 가야한가고 주장했습니다.

즉 미국이 단기적이고 투입대비 결과가 좋은 방식을 선호해 대체로 한국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불리한 방식을 택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본 기억이 나는게 미군정의 대한정책이 대체로 ‘현상유지’애 만족했고 편의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이 해방 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익때문에 한국에 왔지만 솔직히 한국인의 생활은 별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분단이후 노후화된 영월화력발전을 대신해 북한강 수계의 청평, 화천수력발전이 남한지역 전기발전의 주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60년대 장면 정권 당시는 전력사업의 국영화에 중대한 고비를 맞는 시점으로 이해됩니다. 1954년 헌법개정 당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기간산업의 ‘국영화’조항이 삭제되고
전력사업에 대한 민영화의 길이 열린후 1961년 5.16군사정변이전까지 장면정부는 사실상 전력사업의 민영화의 기틀을 잡습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무력 쿠데타 이후 기존의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전력을 출범시키고 전기산업을 국영화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전기사업을 전면 국영화한 것은 아니고 민간업자의 사업참여를 인정해 사실상 그 전 장면정권과 정책면에서 차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즉 1961년부터 한국의 전기산업은 국영과 민영이 공존하는 체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총평을 할까 합니다.

산업정책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있다면 개별산업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한국전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기발전, 전기배송전 사업이 어떤 과정울 거치며 발전해 왔는지 그 개요를 설명해줍니다. 이책의 각 3부는 사실 각각 독립된 저서가 되어야 마땅할 내용입니다.

특히 일제가 만든 북한 중심의 수력발전형태와 그 장기적 영향은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상당히 많은 저서들은 미군정의 통치정책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이후 한국의 대기업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보려면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다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번째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 대해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되게 유포되는 정보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장 언급할 수 있는 건 박정희 군사정부가 실행한 경제정책의 상당수가 전임 장면정권에서 입안되었고, 훗날 군사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자유주의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군사정권 이전에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건우 교수께서 2017년 펴낸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느티나무책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장 한국 전력도 장면정권의 법률안을 일부 수정해 적용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박정희 정권때문에 경제개발을 잘했다라는 ‘오해’는 더이상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한국의 산업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외세의 영향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시끄러운 용산지역은 오랜세월 외세가 점령했던 땅입니다.

가깝게는 한국 전쟁이후 주한미군의 부근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일본인촌이 있던 지역입니다.
현재 동부이촌동이 아직도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 역시 용산입니다. 한강하구가 지금처럼 막혀있지 않았던 시기 산동반도를 통해 황해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만나는 곳이 용산이기 때문에 이렇게 옛날부터 용산이 군사요충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일제가 한국의 전력사업의 초기 구조에 영향을 미친 사실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부정적 의미에서입니다.

오직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전력발전을 한반도 북부에 편중된 상태로 건설되었고, 그 영향은 일제가 패망 후 20여년 이상 지난 자그마치 1960-70년대까지 미쳤습니다.

한반도 남쪽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 전력부족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는 해방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쟁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의 후속으로 군사정권 이후 전력사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60-2010년 시기의 전력산업사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멤버 홍콩 -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콩의 민주화운동 취재기입니다.

오랫동안 관광지로 유명했던 홍콩에 대해 가이드북을 만들어왔던 저자가 2016-2019년을 뒤흔들었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르포를 썼습니다.

홍콩하면 딤섬과 완탕면이 생각나는 분들이라면 홍콩이 마주한 정치현실에 대해 이 책이 작은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홍콩이 지금의 홍콩이 된 것은 1842년에 일어난 아편전쟁때문이었고, 이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1997년까지 영국의 총독이 통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유산인 것이죠.

1984년 덩샤오핑(鄧小平)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기 위한 카드로 영국의 마거렛 대처 정부에게 주창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 즉 하나의 국가 안에 두개의 제도를 유지하자는 정치체제는 홍콩과 중국의 관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체제로 지탱되었던 홍콩의 서구적 개인주의적 자유는중국이 통치를 시작한 이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고 홍콩과중국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 과정을그리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입장에서는 타이완이나 홍콩이나 모두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베이징의 관할 하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역사적으로 1949년 공산주의 중국 수립을 전후해서 공산 중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만든 사회인 타이완과 홍콩은 항상 중국 중앙정부와 마찰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습니다.

홍콩의 경우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정치적 격변을 맞게 됩니다.

이책에 대한 느낌이 개인적으로 남다른 것은 2019년 말 홍콩이공대학에서 공성전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2020년 3월 홍콩에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시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아 홍콩의 MTR을 타고 어느 역을 가지 말아야 하는지 잔뜩 긴장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침 방문지역이 센트럴과 가까운 코즈웨이베이라 더 홍콩의 시위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간 홍콩에 있다 귀국했는데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2013년 홍콩의 침사추이를 방문하고 두번째 방문이었는데, 당시 홍콩인들이 왜 모두 거리에 쏟아져 나왔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르포를 보면서 어렴풋이나마 홍콩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우산혁명(2016)과 2019년의 민주화시위릏 이해하려면 좀더 시간을 거슬러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를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부도 1949년 천인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었고, 더 시간을 거슬러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의 종전을 고하며 그 이후 체제를 규정했던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중국 청년들의 항의를 계기로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1919년,1949년 그리고 1989년 중국 현대사의 획을 그은 사건이 모두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겁니다.

1989년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는 중국 지도부를 경악에 빠뜨렸고 체제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부는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나서 홍콩이 영국의 손에서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자 영국의 자유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던 홍콩인들에 대해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로의 순응을 요구했고, 중국의 손에 홍콩이 넘어간 이후 많은 홍콩인들이 호주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영국으로 떠났고 영연방 국가로 가지 못한 이들은 타이완으로 이주했습니다.

공산 중국을 떠나 만들어졌던 홍콩 사회에서는 비록 떠나지 못해도 공산주의 권위주의 통치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어왔고, 영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자유롭게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중국 공산주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중국인으로 살 수도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1997년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홍콩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기 전까지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고백을 합니다.

중국으로 홍콩이 넘어간 후 일국양제가 끝난 이후 홍콩을 떠나려 했던 홍콩 젊은이들이 홍콩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신들의 정체성 자각에 대한 증언이 보입니다.

한국이 민주화된 나라로 홍콩인들에게 소환되는 것도 눈여겨 볼 지점이기도 합니다.

홍콩은 확실히 중국과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중국의 상하이와 홍콩을 모두 가보았지만 상하이가 그 규모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압도된다면 홍콩은 남국의 정서와 어우러진 묘한 영국풍이 인상적인 도시입니다. 단지 말이 중국 보통어와 광동어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 상하이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지만 홍콩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큰 차이입니다.

2000년 이전에 홍콩을 다녀온 적이 없어 1990년대의 영국령 홍콩은 저에게 어렸을 때 본 왕가위 감독의 영화’중경삼림(重慶森林,1994)’의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온통 ‘유통기한’에 집착하던 주인공의 모습으로요.

하지만 영국령 홍콩이 이미 사라졌고, 홍콩이 중국 땅이 되면서 이전에 우리가 알던 홍콩영화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슬퍼지기는 합니다.

얼마전 들은 이야기인데, 제도적으로 홍콩이 점점 중국의 정치체제에 흡수되어 가는 건 맞는 것 같으나 개인들 수준에서는 가령 홍콩 사람이 중국 상하이에 살고 있다면 아직도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전히 오랫동안 다른 체제 아래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질감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표지를 보면 여행 에세이처럼 생겼지만 내용은 홍콩과 중국간의 정치와 정체성에 대한 글이고 불가피하게 영국과 중국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300여쪽의 짧은 글이니 한번 정독해도 될 듯 합니다.
한 홍콩인 가족을 인터뷰하고 그일생을 같이 반추해보는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단 이 책은 제가 공부하고 있는 과정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2016년 출판된 책이고 이후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출간 다음해인 2017년 부키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어판을 보실 분들은 이 책을 보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제 경험상 번역본이 영어 원서에 비해 용어나 맥락( context)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번역되어썩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의 번역본은 읽지 않아서 노코멘트입니다.

MIT에서 플랫폼경제를 공부한 학자들과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컨설팅을 해온 저자들이 쓴 글입니다.

상당수의 내용이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Havard Business Review;HBR). 등에 논문으로 기재되었던 내용입니다.

크게 보면 경제활동에 인터넷이 개입하면서 그전에 디지털화되지 않았던 경제주체간의 거래가 변화되고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ries of information)이 완화되고, 거래의 투명성(Transparency)이 증대되고 효울성이 증가되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기존의 경제가 경제주체는 투자를 통해 유형자산 ( tangible assets)을 소유하고 이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서 경제활동을 해 왔고 필연적으로 비즈니스를 하면서 고정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업었습니다.

디지털 플렛폼은 기존의 시장을 전복시키고(Disrupted),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주체들의 행위와 비지니즈를 만들어갑니다.

플랫폼은 생산자 혹은 공급자와 수요자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이 두 주체사이를 이어줍니다( mediate).

또한 기존에 이미 투자되어 다른 경제주체들이 가진 유무형의 자신들을 반드시 플랫폼이 소유해야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우버 (Uber) 의 경우처럼 자동차를 소유하지도 택시면허를 소지하지 않아도 플랫폼 서비스만을 제공하면서 택시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언제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거나 택시기사의 실수때문에 불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매우 혁신적으로 시장을 바꿔 넣은 셈입니다.

하지만 우버와 계약을 맺은 운전수는 우버의 정식 직원도 아니고, 자동차에 대한 부담과 고객 안전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우버가 정한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미국법원은 우버운전사의 이런 모순적 상황에 대해 계속 우버 운전사들이 우버의 직원이 아니라는 주장을 기각하고 이들이 우버의 정식직원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아직 판결이 확정된 상황은 아니지만, 미국 등 서구에서 플랫폼에 고용된 프리랜서 노동자들 혹은 플랫폼에 고용된 독립적 사업자( independent contractors)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고, 디지털 플랫폼이 단시간에 자신에 대한 부담없이 규모가 커지고(scale up) 시장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직원들을 직원취급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고,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한국도 쿠팡을 비롯한 이 커머스 플랫폼에서 유사한 사례가 보고되었기 때문에 우버의 사례는 사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노동을 대체하고 노동자의 숙련이 별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혁신( innovation)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업들이 왜 효율만 우선적으로 추구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 화려한 용어가 사용되는 플랫폼이지만 이는 단지 과거에는 없어서 쓰지 못했던 인터넷 기술을 고전적인 경제 거래에 적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플랫폼으로 누가 상품/용역의 공급자인지, 누가 수요자인지, 그리고 관련 당사자가 누가 있는지 더 편해졌습니다.

인공지능의 모든 것을 바꾸고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되지만, 디지털 경제의 총회 중 하나인 플랫폼에 따르면 여전히 사람은 노동자이자 수요자/ 시장으로 존재합니다.

플랫폼 뿐만 아니라 다른 전통적인 기업들이 생산을 하고 부품수급을 하고 재고관리를 하고, 운영자금의 수급을 고민하는 모든 이유는 결국 이런 공급을 통해 수요’/ 시장/노동자에게 판매하기 위험입니다.

회려한 듯 보여도 경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플랫폼이 시장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고 이들이 지속적인 가처분 소득을 가질 수 없게 한다면 플랫폼의 한 축인 시장을 스스로 좀 먹는 상황으로 소탐대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동자가 시장이라는 이 엄연한 팩트를 우리는 언론을 통해 접한 적이 없습니다.

거의 황색언론이 되다시피한 현재의 언론 지형에서 저는 노동자가 시장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건 모종의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년부터 읽기 시작했던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시리즈의 3번째 책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2017년 개정된 책입니다.

중국의 고대사가 황하( 黄河)유역공간을 중심으로 한 중원의 역사였다면, 이책은 황하 남쪽의 장강(長江)혹은 양자강(揚子江)과 한수 (漢水)사이의 사천지역 중심의 역사입니다.

중국 한족 중심의 화이론 (華夷論) 입장에서 보면 남쪽의 오랑캐, 즉 남만 ( 南蠻)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나라는 중국 춘추시대의 통해 북쪽의 강국인 진(晉), 진(秦) 그리고 동쪽의 제(齊)와 함께 춘추시대 중기까지 4대 강국을 이룬 나라입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초장왕 (楚莊王)은 북쪽의 진(晉)와 힘의 균형을 이룬 후 동방경략을 시작하여 산동반도 유역까지 진출한 춘추시대 가장 영토확장을 많이 한 왕으로 장강유역부터 회하 (淮河)부근에 이르는 중국의 동남부 지역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초나라의 통치권 인으로 끌어들이고 무리없이 통치한 왕입니다.

저자는 초장왕의 동방경략과 통치로 인한 유산으로 중국 남부에서 태어나 춘추시대 당시 북부 중원 지역애서 오랑캐 취급을 받던 초나라가 중원문명의 일원으로 포함되고 오랑캐로 더이상 불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초장왕은 호색한인데다가 화려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전쟁을 잘 수행하는 왕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승리만 중요시 하는 다른 왕들과 달리 전쟁을 되도록 피하되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기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긴후 후미를 공격하고 포로를 무자비하게 잡고 물건취급했던 금당이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승패가 결정된 이후 상대방 병사들을 살려주거나 포로를 돌려보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武) 즉 병법이란 주살(弋)을 멈춘다(止)는 의미로 쓸데없는 살생을 막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초장왕은 병법의 의미를 따라 일단 목적을 달성하였으면 불필요한 살생을 자제하고 상대방에게도 무인으로서의 예를 갖춘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장왕이외에도 그의 참모인 손숙오 (孫叔敖)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초장왕이 전쟁터에서 적들에게 한 행동은 대부분 손숙오의 간언을 따른 것이고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전투를 행하는 방법이나 승전 후 포로와 패자들 다루는 방법등은 모두 손숙오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초장왕이 춘추시대 세번째 패자로 올라온 이유도 그가 손숙오라는 춘추시대 최고의 참모를 등용했기 때문이며 그가 단순한 호전적 군주가 아닌 이유도 그가 패자를 다루는 방식, 그리고 그가 정복한 다른 민족들을 통치하는 방법이 매우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리더는 사람을 잘쓰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초장왕은 그 의미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평으로 제3권도 그 이전 두권 못지않게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주요사료인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사기(史記),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서(新書) 등 각종 사서에서 인용을 통한 사실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중국 역사서에 대해서 각 기록의 신빙성(reliability)을 평가하는 부분은 특히 주목됩니다.

수많은 사서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과 일화( episode)를 끌어모아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하고 기록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는 부분은 오래된 역사를 어떤 식으로 서술해야 하는지 그 실례를 보는 것이어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역사 서술은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재구성된다(reconstructed)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같은 중국 고대사 초심자에게는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또 하나 고대사는 통치자에 대한 기록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사이자 외교사일수 밖에 없으며 또한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숙종 때 활약했던 청남(淸南)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윤휴에 대한 평전입니다.

2021년 개정 증보된 책으로 그 이전에는 ‘윤휴와 침묵의 제국(2011)’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윤휴가 60세가 다 되도록 출사를 안하다가 왜 늦은 나이에 출사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중요시한 북벌 (北伐; 즉 청나라에 대한 정벌) 이유와 배경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조선의 신분제 문제와 같은 사회개혁적 주장이 소개됩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7세기 조선의 왕이었던 숙종은 당시 사대부의 당인(黨人)들을 바꿔가며 정치를 했던 군주로 대중에게는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들인 임금으로 수많은 사극의 소재를 제공한 임금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고 군주에게 고언(苦言)을 했던 윤휴가 단지 서인들의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된 사실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여러인물들과 정치세력이 숙종대에 존재했지만, 윤휴의 대척점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송시열(宋時烈)을 평하지않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저자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2016)’라는 책을 따로 집필해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보시면 됩니다.

다만 송시열은 제가 아는 한 조선을 ‘ 주희 성리학’의 도그마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정치적으로 매우 경직적인 대명사대주의(大明事大主義)만을 추종하는 나라로 만든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문인 사대부들의 원리주의적 성리학 우선주의와 사대부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신분제 유지의 입장이 19세기 이후 조선의 민중반란의 원인이 되었고 외세를 끌어들이게 된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병역을 천시하고 평안도 함경도 등 특정지역에만 군사방비를 맡긴체 기호지방과 영남 지방 사대부들은 본인들의 치부외에 그 어떤 경제적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서인 노론을 대표하는 송시열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외척(外戚)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세력의 대를 이은 국정농단 (國政壟斷)도 조선의 몰락을 부추긴 큰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책에 서인 척신(戚臣)으로 등장하는 김석주가 바로 안동 김씨로 이미 17세기 중반 당시에 숙종의 외척으로 그가 남인에게서 정권을 빼앗기 위해 정치공작의 얼마나 전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송시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가 얼마나 지독한사대주의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명나라만 군주국으로 보고 조선의 왕은 중국의 제후로 보는 근본주의적 사대주의자로 숙종이전 효종당시 예송논쟁 ( 禮訟論爭)이 일어나자 조선의 왕가를 일반 사대부의 예와 같은 급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에서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부인한 사건으로 정상적 전제군주국가라면 역모(逆謀)로 처벌받을 수 있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조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 나라를 멸망에서 구했으니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된다는 재조지은 (再造之恩)만을 주장하며 명청 교체기인 당시의 정세를 무시하고 떠오르는 강국 청은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몰상식한 주장을 지속합니다.

문인 사대부국가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거의 멸망직전까지 갈 정도로 절단이 났으나 당시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고 육군은 거의 괴멸상태를 면치 못했습니다. 명군의 참전은 군사력 부족으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 지배층이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집권 서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명과의 재조지은만 강조하다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국방력 강화를 소홀히하다가 다시 청의 침략을 받은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하지만 청은 현재의 중국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고, 당시는 개국 초기라 중원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중원 진출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보았듯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조선 조정에서 김상헌(金尙憲)으로 대표되는 서인( 그리고 안동 김씨)은 없는 군사력에도 오랑캐인 청과 대항해야 한다는 헛소리로 일관하며 항복할 수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현실을 몰각하는 서인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사대부들은 , 특히 서인 사대부들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망쳤으면서도 기득권 수호를 위해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고 재조지은에 집착해 청과의 현실적 외교관계를 망각해 병자호란을 자초했습니다.

서인 사대부들은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지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 (仁穆大妃)를 유폐시킨 것이 천하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던인조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적통을 가진 선조의 적통인 광해군을 폐위시켰습니다. 광해군은 국제정세에 밝고 임진왜란당시 전쟁경험을 가진 드문 군주였지만 서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폐위시켰고, 그후 서인들은 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삼전도(三田渡)애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는 사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명분에 집착하기에 왕이 당한 치욕도 백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죠.

숙종 당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효종과 현종대를 거친 이후인데도, 그리고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는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여전히 서인들은 양반 사대부인 자신들의 기득권 옹호만을 위하지 국방력 방비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당한 건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서인 사대부들은 성리학 도그마에 갖혀 전혀 현실감각울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병자호란 이후애도 서인 사대부들은 청나라의 대욋사정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청은 만주땅과 몽골땅 말고 한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중원(中原)을 아직 장악하지 못했고, 명이 멸망당시 투항했던 명나라 장수 출신 오삼계(吳三桂)등이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키고 대만을 장악한 정성공(鄭成功)등이 반청 내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조선의 서인 사대부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조지은을 갚을 기회가 왔는데도 청의 눈밖에 나는 걸 두려워하던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휴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 유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다가 겁쟁이이지만 권력욕은 큰 명분론자들인 서인 세력들이 행한 정치공작으로 숙청당했다고 봅니다.

17세기 유학을 배운 사대부가 명을 위한 재조지은을 위해 내란에 빠진 신생국가 청나라에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옮기려 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눙한 행보입니다.

더구나 서인들은 청태종 홍타이지 (Hong Taiji[皇太極])에게 서인이 추대한 인조가 병자호란 패배이후 청에게 항복하고 무릎을 끓었는데도 치욕스러워만 할 뿐, 보복은 생각도 안하고 눈치만 봅니다. 겁쟁이라는 말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도 적합한 경우를 첫기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서인 특히 서인 중 노론(老論)세력은 조선 중기 죽 병자호란 이후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무슨일아든 했고 정조 사후인 19세기 내내 조선의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립니다.

좋게 말해야 사대부가 왕권과 균형을 맞춘것이지, 사실상 왕권이 외척과 서인 사대부들 수하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심지어 19세기 말인 고종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강대 계승범 교수께서 2011년 쓰신 책 중 조선의 대명사대주의를 추적한 책이 있습니다. 보고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지된 시간(서강대 출판부,2011)

개인적으로 훌륭한 학자적 자질을 가졌던 정조이후 국정을 컨트롤하기 힘든 고만고만한 왕들이 후계를 잇자, 사실상 조선의 정권은 외척과 서인 사대부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조선의 통치체계가 조직에 의한 통치라기 보다 한 국왕의 능력여하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리는 성격으로 유교적 철인통치의 폐해를 정조와 정조 사후를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왠만한 성리학자를 뛰어넘는 정조의 개인적 능력때문에 사대부들은 정조를 건드릴 수 없었으나 그사후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부들, 특히 서인 노론파 사대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리고 이들 서인 사대부들의 영향력은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 한국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의 고향이 충청도 회덕 (懷德)이고, 현재 대전 대덕구라고 합니다. 충청도의 보수성향은 선조들의 근본주의적 성리학 영향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은 절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 보수의 원류와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추측이긴 합니다만 외척이자 서인 당파의 주요세력이던 안동김씨를 비롯한 영남의 세력들이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정치의 주요세력으로 한국의 기득권을 대표하고 있는 사실을 우연으 로 치부하기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고교 국사교과서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들이 효종 당시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명백한 오기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북벌을 행하지 않았던 서인들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면 읽는 즉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안했는데 왜 했다고 하지? 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사실을 복잡하게 이야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튼 어렸을 때도 유사한 내용을 배운 기억이 나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해가 안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과서의 서술이 문제였던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