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전력산업의 역사를 다룬 전문 역사서입니다.
보기드문 경제사 전문서이며 여러 기간 산업 중 전기. 전력 발전. 배송전 사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종( 高宗, 이 책에서는 광무황제, 光武皇帝로 지칭) 당시 미국의 콜브란과 황실합작으로 전기사업을 시작하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기 전까지 대한제국 내내 미국의 콜브란은 거의 독점적으로 전차 전등 사업을 영위하고 막대한 이윤을 챙겼는데, 여기에는 고종이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이권을 주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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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성전기로 사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의 전력회사는 이후 한미전기회사로 전환되고, 정세 변화에 따라 러일전쟁이후 콜브란은 지분을 일본에 넘기고 이후 일한와사(日韓瓦斯)라는 회사로 통합됩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마국과는 비밀협정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지배를 서로 용인하면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데어도어 루즈벨트는 일제의 조선지배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정치인으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일제 강제병합에 관련이 있으니 따로 이사람에 대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거류민촌이 남산 아래 충무로에서 용산지역으로 확장되자 을사늑약 전까지 콜브란의 한미전기회사가 추진한 용산쪽으로의 전차노선 확장은 일본이 계획했던 경인선 철도의 이권과 충돌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일본은 조선병합 이전부터 미국과의 이권갈등을 겪었고 콜브란의 정치노선을 경인철도와 연계하기 위한 갖가지 공작을 펼쳤습니다.
전력산업이 경제발전과 도시화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조선의 농업문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문제, 도시확장 문제가 거론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무력점령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후 조선의 전력산업을 재편합니다.
최초 조선의 지리적 요건이 수력발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한 후 화력발전을 위주로 산업정책방향을 잡았으나 조선의 하천이 유역변경식 발전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수력발전 위주로 전력발전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서부터 해방전까지 조선의 전력생산은 수력이 주력이고 화력은 부수적인 설비로 개편되고 80%이상의 수력발전이 한반도 북쪽에 몰리게 됩니다. 북쪽은 장진강 수력발전이 주력이고 남쪽은 영월화력발전이 주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전기발전사업과 배전사업은 모두 총독부가 일본의 민간기업인 닛치스 (日室)에게 경영을 일임했습니다. 사실상 조선의 전력사업을 일본의 민간 기업의 영향 아래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불균형적인 전기발전산업의 양상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대립이 격화되고 결국 남북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당시 한반도 남쪽의 전력서정이 극도로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됩니다.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북한지역에 있어 북한이 전력공급을 중단할 경우 단전의 우려가 커져 미군정당국이 북한과 전력공급협상을 해야 했습니다.
헌국전쟁을 거치며 남한지역의 전력부족은 현실로 나타났고 1950년대 한국의 경제관료들 사이에는 자본이 초기 많이 투하되도 경제성이 좋은 수력발전위주로 전력산업발전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미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원을 틀어쥐고 있던 미군정 당국은 빠른 시일내 건설할 수 있는 도시 주위의 화력발전 위주로 가야한가고 주장했습니다.
즉 미국이 단기적이고 투입대비 결과가 좋은 방식을 선호해 대체로 한국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불리한 방식을 택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본 기억이 나는게 미군정의 대한정책이 대체로 ‘현상유지’애 만족했고 편의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이 해방 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익때문에 한국에 왔지만 솔직히 한국인의 생활은 별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분단이후 노후화된 영월화력발전을 대신해 북한강 수계의 청평, 화천수력발전이 남한지역 전기발전의 주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60년대 장면 정권 당시는 전력사업의 국영화에 중대한 고비를 맞는 시점으로 이해됩니다. 1954년 헌법개정 당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기간산업의 ‘국영화’조항이 삭제되고
전력사업에 대한 민영화의 길이 열린후 1961년 5.16군사정변이전까지 장면정부는 사실상 전력사업의 민영화의 기틀을 잡습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무력 쿠데타 이후 기존의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전력을 출범시키고 전기산업을 국영화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전기사업을 전면 국영화한 것은 아니고 민간업자의 사업참여를 인정해 사실상 그 전 장면정권과 정책면에서 차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즉 1961년부터 한국의 전기산업은 국영과 민영이 공존하는 체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총평을 할까 합니다.
산업정책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있다면 개별산업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한국전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기발전, 전기배송전 사업이 어떤 과정울 거치며 발전해 왔는지 그 개요를 설명해줍니다. 이책의 각 3부는 사실 각각 독립된 저서가 되어야 마땅할 내용입니다.
특히 일제가 만든 북한 중심의 수력발전형태와 그 장기적 영향은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상당히 많은 저서들은 미군정의 통치정책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이후 한국의 대기업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보려면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다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번째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 대해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되게 유포되는 정보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장 언급할 수 있는 건 박정희 군사정부가 실행한 경제정책의 상당수가 전임 장면정권에서 입안되었고, 훗날 군사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자유주의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군사정권 이전에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건우 교수께서 2017년 펴낸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느티나무책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장 한국 전력도 장면정권의 법률안을 일부 수정해 적용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박정희 정권때문에 경제개발을 잘했다라는 ‘오해’는 더이상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한국의 산업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외세의 영향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시끄러운 용산지역은 오랜세월 외세가 점령했던 땅입니다.
가깝게는 한국 전쟁이후 주한미군의 부근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일본인촌이 있던 지역입니다.
현재 동부이촌동이 아직도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 역시 용산입니다. 한강하구가 지금처럼 막혀있지 않았던 시기 산동반도를 통해 황해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만나는 곳이 용산이기 때문에 이렇게 옛날부터 용산이 군사요충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일제가 한국의 전력사업의 초기 구조에 영향을 미친 사실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부정적 의미에서입니다.
오직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전력발전을 한반도 북부에 편중된 상태로 건설되었고, 그 영향은 일제가 패망 후 20여년 이상 지난 자그마치 1960-70년대까지 미쳤습니다.
한반도 남쪽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 전력부족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는 해방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쟁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의 후속으로 군사정권 이후 전력사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60-2010년 시기의 전력산업사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