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누들로드 - 국수따라 방방곡곡
김미영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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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요리를 엄청 좋아하는 제가 쉬어가듯 읽었던 책입니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는데 을지면옥 냉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원래 이 작은 책자를 산 이유도 사실 이 책에서 소개한 국숫집을 방문해 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안동여행 갔을 때 건진국수집에 전화한 적이 있었지만 너무 멀어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냉면을 좋아하는 저는 이책에서 소개한 냉면집을 다 방문해 보았습니다.

을밀대는 제가 살던 동네여서 자주 갔었고 충무로의 필동면옥도 친척집이 근처에 있어서 자주 갔었습니다. 가족들과 여름이 되면 우래옥과 을지면옥애서 냉면을 많이 먹었죠.

봉피양 냉면이 사실 제 입맛에는 제일 안맞더군요.

그외 추천하고 싶은 냉면집은 평래옥입니다. 명동에 갈 때 자주 가는데 어르신들과 주변 직장인들로 점심에 가면 늘 기다려야 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오장동 흥남집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함흥냉면집입니다. 이곳에서 함흥냉면을 먹은 이후 다른 곳의 함흥냉면은 잘 안먹습니다. 세월의 내공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더군요.

태평로 삼성빌딩 근처에 위치한 진주회관은 사회생활을 하던 초창기 자주 갔던 곳입니다. 콩국수로 아주 유명한 곳이죠. 여름이면 주변 직장인들로 북새통입니다. 이 집은 여의도애서도 콩국수와 비빔국수를 파는데 두 집의 맛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근래에는 여의도의 진주회관에 자주 갔었네요. 

개인적으로 맛보고 싶은 국수는 부산밀면과 제주도 고기국수입니다. 제주도는 아직 못가봤고 부산은 몇번 가 보았지만 밀면을 먹을 기회가 없었네요.

오늘은 이 책에서 소개한 국숫집 중 제가 직접 가본 곳을 위주로 말씀 드렸습니다. 가이드 성격의 책이니만큼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한 지는 결국 소개한 곳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정확하냐‘ 에 달린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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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이 파헤친 한국의 지식인 집단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시장, 자본 그리고 서구편향적 일 수 밖에 없는지, 특히 서구 중에서도 왜 유독 더 친미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경향신문의 기자들과 외부 필자들이 같이 집필했습니다.

외부집필자들 중에는 이번에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된 김상조 교수님도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왜 지식인들이 재벌 앞에서 ‘자기 검열 ‘을 하게되는지에 대한 글을 쓰셨더군요. 지식인들이 논문을 출판하면서 기업들이 스폰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기업의 이익에 반하게 되는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공공의 자산이어야 할 지식이 스폰서인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면서 공공성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얼마전 인터넷 매체에서 읽은 단국대 서민 교수의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내용이 생각나네요.

기자가 마지막으로 한 지식인에 대한 견해에 대해 그는 ‘지식인은 다른 이들이 No라고 말해도 혼자 꿋꿋이 Yes라고 말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앞서 나가는 선구자로서 ‘등불‘의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책이 출간된 시기는 2008년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입니다. 한국사회의 본격적인 퇴행이 시작되었던 시기로 사회 전반에서 새로 들어선 보수정권의 이해 못할 4대강 사업수행과 ‘싸다‘는 이유만으로 품질과 위생상태를 알 수없는, 심지어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개방 합니다.

권력자의 불통과 오만 그리고 일방통행이 지속되는데도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제공했습니다.

지금도 지탄받고 있는 많은 토목학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지지했습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궤변으로 덮어버리고 말았죠.
결과는 강물 생태계의 변화와 ‘녹조라테‘로 대변되는 강물의 부영양화입니다.

이런상황을 지켜보게 되니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더군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한국에서는 희귀하기까지 한 ‘‘지식 사회학‘ 책이라는 점입니다.
더구나 한국의 지식인을 탐구한 책은 극히 접하기 어렵습니다. 이 역시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식인과 관련해 근래 읽고 싶은 책이 한권 출간되었습니다.
지식인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한 책입니다.

서점에서 보았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읽고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한국은 이상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친미‘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의 사회에 맞는 독자이론을 발전시키기보다 끊임없이 서구 특히 미국의 이론을 수입해왔습이다.

따라서 미국과 지식인의 관계가 과연 어떤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자기성찰로서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거나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도 단순히 지식의 흡수에민 그친다면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우리가 사는 현재와 연결해봐야 하고 그 책애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를 고려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간‘을 읽는다는 의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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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6-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들이 한국땅에서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토론과 논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어떤 분야든 토론과 논쟁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오히려 토론·논쟁을 금기시하죠. 한국인들은 논쟁꾼들을 백안시합니다. 미운털, 눈엣가시, 말썽꾼, 피곤한 불편러, 민폐꾼, 잘난척쟁이, 화기애애한 친목 모임의 안녕을 해치는 듣보잡스런 놈 따위 등등으로 낙인을 찍죠. 그러니 무슨 토론이 있고 무슨 논쟁이 있겠나요. 발전의 전제 조건이 토론과 논쟁인데요. 한국 지식계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습니다. 게으르기는 또 왜 그렇게 게으릅니까. 알라딘 새로나온책 코너를 검색해보면 일본인+중국인 책이 한국인 책보다 더 많이 번역·출간되고 있을 정도입니다(약간 과장이지만). 지식인들이 연구 안 하고 책 안 쓰고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문학 위기라고 호들갑 떤 것은 걍 밥그릇 타령한 것이지요. 자기들이 논문 안 쓰고 책 안 쓰고 토론·논쟁 외면해서 위기가 온 것이지 누구 탓인가요. 입으로만 위기위기 떠벌리기만 했지 한 게 뭐 있나요? 여하튼 토론·논쟁 활성화하면 지식인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인문학 위기니 뭐니 하는 것도 사라지리라 봅니다. 쌈박질(토론·논쟁)처럼 재미난 게 없다고 봅니다. 대중들, 독자들의 관심도 끌고, 덩달아 관련 책들도 불티날 것이고, 출판계도 경기 살고, 이렇게 맞물리고 선순환돼서 전반적인 발전을 가져오리라 봅니다. 근데 논쟁거리가 뭐가 있을까요? 요즘 인공지능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데, 예컨대 강인공지능 실현 가능론자들과 볼가능론자들, 이렇게 편을 갈라 논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울나라 학자들은 뭔 놈의 사업에 골몰하는지 조용합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세상 눈치 안 보고 깊디 깊은 연구실에서 아주 심층적인 탐구에 매진하고 있을 몇몇 학자 또한 있겠습니다만...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6-09 15:12]

Dennis Kim 2017-06-0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 깊은 순혈주의와 군대의 서열문화가 지식사회 전반에 만연해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못해서 논쟁과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은 것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에도 유독 그런 것들을 못참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qualia 2017-06-09 19:48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순혈주의와 서열문화는 토론과 논쟁을 활성화함으로써 깨뜨려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토론과 논쟁 때 자기 오류가 드러나고 허점·약점이 까밝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구나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고 허점과 약점, 심지어 지독한 모순으로 뭉쳐진 존재라고 봅니다. 이런 사실은 자각한다면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남으로부터 비판받거나 문제점을 지적당할 때 감정적 흥분을 조절할 수 있지요.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건 은연중 자신이 완벽하다고 잘못 믿는 빗나간 자존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서 토론과 논쟁을 하자면 쌍방간에 약간의 감정적 부딪힘(부딪침)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습니다. 해서 이런 소소한 감정적 충돌은 우리가 넉넉하게 받아넘길 줄 아는 여유로움과 포용성 또한 지닐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런 좌충우돌의 과정을 거쳐야만 발전한다고 봅니다. 지식인이라고 해서 항상 고고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위치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모든 점에서 부족한 자신을 자각하고 지적 연습과 성찰로 그 부족함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지식인의 존재론적 지위이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지식인은 끝없이 자신과의, 남과의, 외부 세계와의 토론과 논쟁으로써만 자신의 형상을 다듬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토론과 논쟁 없는 지식인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eBook]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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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1999년 세기말에 나온 유교 비판서입니다.

저자는 갑골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전문가입니다.
하지만 유교문화의 유효성이 끝났다는 지적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물론 박정희 정권이후 수구 반공세력이 내세워 온 ‘한국적‘이라는 만들어진 전통이 있기는 합니다만 한국 사회 자체가 그동안 서양이 비서구를 ‘타자화‘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시각에 빠져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문화를 열등하게 바라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고전은 ‘재해석‘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생명력을 갖는 것임에도 이를 부정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분명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이데올로기가 늘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노론의 명분론때문에 현실 정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명말청초 청의 침략을 받기도 했고, 외척의 세도로 왕이 왕노릇 제대로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권력투쟁이나 신분제는 서양에도 오랫동안 존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잊고 싶은가 봅니다.

기득권층이 그렇게 바라보고 따라하고 싶어하는 미국에서도 1960년대 초까지 흑인과 백인이 화장실도 따로 쓰고, 버스 좌석도 흑인용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가요?

미국의 흑인 노예가 해방된 때가 19세기 말임에도 무려 7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흑인은 공식적으로 미국사회에서 하층계급으로 차별 받았습니다.

그 이후 또 다시 40여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제가 본 미국은 여전히 흑인과 백인 다른 지역에서 다수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황인종인 한국인도 미국에서 흑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차별을 받습니다.

18세기 이후 서양이 동양에 앞서왔다 해도 고대와 중세에는 동양이 서양을 훨씬 앞선 시기였습니다. 다만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그냥 묻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해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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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4
박현수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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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영화가 금지되었던 당시, 일본영화를 보는 것은 금지된 것을 훔쳐본다는 것 이상의 쾌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장드라마'로 대표되는 한국드라마와 달리 일본의 드라마, 영화는 개인의 사적인 섬세함에 기대는 것이 많고, 한국에서 음식드라마가 혹은 먹방이 유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미식의 나라답게 음식이나 주방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나온 곳이 일본입니다.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정갈하게 청소되어 있는 쓰레기 하나 없는 동네 골목길을 볼 때마다 '내가 일본에 왔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대체로 일본인들은 사회에 대한 발언보다는 본인의 삶에 더 충실하고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음식점이나 토산품 가게들이 대를 이어 몇백년씩이나 이어져 온 것도 그렇고, 수백년도 건물들과 골목들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도 한국과 아주 큰 차이입니다.

역사적으로 막부간의 내전만이 일어났던 나라이고, 일본 영토에 그나마 전쟁이라고 일어난 것은 미국의 원폭투하 이외에는 전무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일본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모든 전쟁을 자신의 영토밖에서 치룬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청일전쟁도, 중일전쟁도, 태평양 전쟁도 모두 일본의 영토 바깥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이 모든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의 '일본적 특징'은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일본 특유의 소설장르에서 기원한 것이며, 이 사소설이 기원한 시기가 일본의 국가주의가 팽창되고 있던 시기와 같다는 점에서 이런 일본문화의 섬세함이 국가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서구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피해자로서 타자로 설정되었던 일본은 자신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다른 아시아국가를 다시 타자로 설정하면서 서구가 일본에 취했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를 타자화 시킵니다. 또한 일본 사회 내부적으로 국가주의를 발전시키기 있었기 때문에 사회과 괴리되고 개인에 침잠하는 사소설이란 형식이 적당한 문학의 발현방식으로 채택됩니다.

즉 이런 섬세한 사소설의 형식적 완결성은 현실을 외면한 체 국가주의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눈감아 버리는 데 일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문학형식을 통한 의도적'무시'가 일본이 국가주의적 체제를 유지하는데 암묵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일본의 속내를 알수 없는 두개의 모습이 이 책을 통해 일부나마 의문이 풀렸던 기억이 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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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Paperback)
Herbert Bix 지음 / Perennial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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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미국의 일본사학자 허버트 빅스(Herbert P. Bix)가 쇼와 (昭和) 일왕 히로히토 (裕仁)의 일생에 대한 평전입니다.
수십년간 현대 일본에 대한 저작을 써온 일본 전문가로 이 책을 집필할 당시 도쿄의 히토츠바시 대학(一橋大学)에 재직 중이었습니다.

800페이지 가까운 엄청난 두께의 책으로 쇼와 일왕의 전 생애와 함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에 대해 이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던 문서들을 취합해 상당히 정밀하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총 63년간 재위한 일왕으로 일본 현대사에 있어 최장수 재위를 기록한 왕이기도 하며, 이 기간 동안 일본 제국헌법에 의거 중일전쟁, 난징 대학살, 태평양전쟁을 일본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 사실상 명령을 내린 장본인입니다.

이 미국학자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일본 왕실의 서간과 일기등을 추적하면서 이 63년간의 재위기간동안 히로히토 일왕이 어떤식으로 일본을 통치했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현재 일본을 만들어왔는지 추적합니다.

책의 목차를 일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art III의 타이틀을 'His Majesty's War' 즉 '전하의 전쟁'으로 함으로써 이 학자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전쟁의 최종승인자가 바로 쇼와 일왕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책임(戰爭責任) 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INTRODUCTION 1
PART I THE PRINCE'S EDUCATION, 1901-1921
PART II THE POLITICS OF GOOD INTENTIONS, 1922-1930
PART III HIS MAJESTY'S WARS, 1931-1945
PART IV THE UNEXAMINED LIFE, 1945-1989

하지만 극우정권인 현 아베신조 (安倍晋三) 정권은 ,그리고 그 이전의 일본의 정부는 쇼와 일왕의 전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쿄 전범재판 (the Tokyo Trial)에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그래서 전범이 아니라는 논리이지요.

하지만 저자 허버트 빅스는 이 책에서 "쇼와 천왕은 반성없는 생애를 살았다" 고 지적했습니다. 이책에서 쇼와 일왕이 중일전쟁에서의 화학무기 사용, 최루탄의 사용을 허가했으며,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창설도 재가하였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의 살인, 약탈, 방화를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위키피디아에서 설명한 일왕의 전쟁책임의 법적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하기 전까지 일본은 " 일본 제국 헌법"을 따르고 있었고, 이 헌법에 따르면 일왕은 일본 제국의 통치권을 총괄자로서 문무관의 임영, 육해군의 통수권, 그 편제 및 상비병액의 결정, 선전. 강화 및 조약 체결등 군사및 외교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왕의 국무에 대한 권한행사는 국무대신들의 자문을 얻도록 했기 때문에 법률, 정책상의 책임은 국무대신이 지는 구조가 지속되었습니다.

2010년, 발간된지 10여년이 지난 후 이 책은 한국에 "히로히토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저 개인적으로 1980년대까지 살아있었던 쇼와 일왕의 모습을 신문과 TV등 매체를 통해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을 징용시키고, 위안부 문제를 야기시킨 일본 제국주의의 최고 통수권자가 1980년대까지도 살아 간간이 해외토픽란에 얼굴을 보이는 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할머님들이 일제시대에 그렇게 살기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어찌 그 당시 국군통수권자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자그마한 늙은이로 살아있을까... 어린나이에도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일본의 패망과정에 대한 지식을 접하면서 그 실체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번역본이든, 원서이든, 오래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것이 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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