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
김선주 지음, 김범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홍경래난이 조선시대에 있었던 청북지역( 청천강 북부지역) 지배층에 대한 중앙조정( 한양과 그 주변 사대부 세력)의 차별과 홀대로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에서 일제강점기 경제사를 연구한 학자가 펴낸 연구서로 285쪽에 달하는 작은 책입니다.

저자의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이 책으로 출판된 것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왜 일본인의 악행을 들추는 연구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이 작업이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p285).
학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동아시아 역사와 한국사를 공부한 저자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제상황에 대해 저술한 책입니다.

이책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경제정책 중
첫째 철도건설
둘째 수리조합사업에 집중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통계와 토목관련 잡지와 신문기사, 일본에서 발간된 토목관련 회고록과 당시 토목관련 법률제정과 재조 토목청부업자들의 정계로비 관련 기록들을 망라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제의 경제수탈은 토목청부업자들의 이익을 통해 나타날 것이기에 이들 사업의 수익성 구조분석을 진행했고, 조선총독부 공식통계상 약 57%에 이를 것이라는 노무비가 실제로 그만큼 지급되었는지 검증을 실시했습니다. 노무비가 중요한 이유는 토목공사에서 인부들에게 지급하는 노무비가 사업을 진행하는 가장 큰 비용 중 하나라는 일반적 이해와 이 돈이 실제로 토목일을 한 조선인들에게 지급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공식통계와 다르게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은 20%내외의 노무비만 조선인들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약 37%는 부당이득으로 본인들이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대규모 토목공사인 철도공사 (경부선 경의선 등 당시 이루어진 철도건설)를 일본의 자체적 필요- 즉 러일전쟁의 보급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에 의해 더 속성으로 건설할 필요가 있었고 1890년 당시 일본의 철도 인프라는 어느정도 정비가 되어 새로운 시장이 필요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일제가 경인선을 건설할 당시만 해도 철도의 속성 건설의 필요가 없어 조선인 토목청부업자와 같이 일을 진행시켰으나 전쟁의 급박한 준비로 이전과 같이 철도건설를 진행할 이유가 없어졌고, 이런 외부상황의 변화는 일본인 토목청부업자가 더 독점적으로 사업이윤을 수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다 조선총독부는 대부분의 토목관련 수주를 수의계약으로 진행하였고 1921년 일본의 회계법 개정으로 모든 입찰을 자유경쟁입찰로 하게 되자 재조 토목청부업자들은 일본의 정치가들과 의회에 로비를 하여 조선에 한해 수의계약 방식이나 지명경쟁입찰방식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제도적 법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했습니다.

조선에서 활약했던 토목청부업자 중 상당수는 제국대학 출신에 일본과 조선에서 토목이나 건설관련 관리를 지낸 자들이 많아 로비와 함께 위에서 말한 제도적 이익 보장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당시 언론에서 묘사하는 조선인들의 빈곤은 심각한 수준으로 조선총독부 통계가 과장하듯이 토목분야의 절반 정도가 조선인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경과 관가인맥등에서 훨씬 우월한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은 철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량 증산계획과 맞물려 있던 수리조합사업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가져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리조합은 식량증산을 위해 관개시설을 건설하는 토목사업으로 대체로 일본인 지주들은 찬성하고 한국인 지주들은 반대하던 사업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수리조합 연구는 순수한 농업사업으로만 보고 실제 쌀을 얼마나 더 증산해서 얼마를 일본으로 유출했느냐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수리조합의 건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토목청부업자들에게 어떤 이익을 주었나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은 철도건설이 어느정도 완성된 이후 새로운 일거리를 찿고 있었으며, 수리조합 사업에 관한 일본 정부의 예산을 더 받아내기 위해 철도와 마찬가지로 도쿄의 중앙정계에 로비를 벌였고 조선총독부에서 확대된 수리조합관련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본인들이 거두어갔습니다.

조선인들이 일제강점기에 빈곤한 생활을 했었다는 여러 선행연구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련하여 어떤식으로 일본인 지배 엘리트들에게 수탈당했는지 실증하는 연구가 나온 건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제가 조선경제에 직접 관여한 재정부문을 통해 어떻게 수탈구조를 만들었는지 실증한 점에 있습니다.

일제는 일본 본토의 산업이 조선의 산업발달로 경쟁력을 잃는 것이 두려워 조선에 일체의 산업발달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이 만든 상품의 시장과 원료공급처로의 역할만을 강요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하려 하자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과 경의선 원산선 등 한반도 북부 지방에 철도 건설을 하였고, 조선을 식량공급기지 역할로만 한정해 전반적으로 균형된 발전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습니다.

놀라운 점은 현재 한국경제가 고민하는 도농격차의 문제, 지방소멸의 문제가 1930년 당시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데 있습니다.

책에 보면 당시 조선 총독부 관리조차 농업과 공업이 같이 발전해야 사회적 혼란이 오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 2021년의 지배엘리트들은 과연 얼마나 지금과 같은 불균형발전의 시정에 고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각종 관급공사를 일본인들이 독점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건축업자들이 주택사업을 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책에서 경성의 주택왕 ‘정세권 ‘에 관한 언급이 잠시 나옵니다. 1920-30년대를 통틀어 조선인들 가운데 토목청부업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주택사업과 달리 이들은 철도건설이나 교량공사 제방 공사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것으로 보입니다.

수치와 통계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세권에 대해서는 김경민 교수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201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평등의 세대 - 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흡인력있고 설득력있는 ‘국산’ 사회과학 서적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미국의 학계에서 활동하다 한국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돌아온 학자답게 주장에 거침이 없고 간명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이용가능한데이터( official and available data)를 이용해 현재 한국사회에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불평등을 설명하고 실증해냈습니다.

데이터를 이용한 글쓰기의 전범을 한국학자의 글을 통해 볼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에 대한 인상은 이제 그만하고 내용을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이글을 읽다보니 저의 경우 386 바로 뒷세대이고 저자도 저와 비슷한 세대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하에 한국을 한세대 만에 ‘압축적’으로 발전시켰고, 부동산 폭등을 통해 최초 자산 축적을 한 ‘산업화 세대’와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정치적 해게모니를 가져왔으며,1997-98년 IMF 금융 위기를 통해 경제적 해게모니까지 장악한 ‘386세대’가 현재 한국의 조직과 노동시장에 일반화된 ‘이중적 구조’와 이에 따른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이라는 사뭇 도발적인 주장을 합니다.

이론적으로 한국형 위계를 발전시킨 ‘네트워크 위계’에 의한 386세대의 과대 점거가 노동시장에서 세대간 불평등을 촉발시킨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정부에서 나온 공식통계 데이터를 통해 입증합니다.
따라서 이책은 동일한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 세대 집단 뿐만 아니라 조직으로서 노조와 공장현장조직, 회사조직, 관료조직 등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세대론이자 조직론이며 또 큰 의미에서 노동시장의 구조를 조망합니다.

따라서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논문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불평등의 원임 중 하나로 386세대의 과다 권력점유를 지적히는 이 글의 입장은 386세대가 집권 중추세력인 현 집권여당에 대해서 이들의 과오를 바라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386세대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권위주의 세력에게서 획득했다고 아무 비판도 없이 ‘신화화’되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이후 30년이 넘게 지났고 이제 이 세대의 공과 과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할 시기가 됐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신선하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제가 공감했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는 한국의 ‘386세대’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기업의 상층 의사결정층에 과다점유를 하고 있으며 1997년 이후로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사실상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상층부가 오랜세월 그대로 정체된 가운데 연공제에 기반한 인건비 상승분을 사실상 20대 청년층과 여성들에 기회를 주지 않은체 이들을 단기 계약직에 묶어두면서 유지해왔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정치적 민주화를 외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평등한 세상을 주장하던 20대와는 다르게 사실상 ‘노동의 유연화’를 받아들여 현재의 이중적 노동시장구조를 만드는데 방조 내지 협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학생시절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유연화를 사회안전망의 확충도 없이 진행했다는 사실은 ‘변절’로 불리기에 손색없을 것 같습니다.

둘째, 386세대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유지해 여성들에게 동일하게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중적 노동시장 구조하에 철저하게 과실을 향유하면서도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게조차 같은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후배 여성들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고, 한국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주체적인 이 후배 여성들은 ‘출산파업 ‘과 ‘전투적 페미니즘 ’으로 대항하며 커리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가임여성 출산율이 1명이 되지 않고 이에 따른 인구감소로 구조적인 경기침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데, 386세대는 이 상황을 결정한 당사자로서 책임에서자유롭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학생때부터 ‘민족’이니’통일’아니 하는 큰 주제룰 위해 일상의 소소함을 우습게 보고 남존여비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학생투사들의 한계로 보입니다.

회사원으로서 츙격적이었던 부분은 한국 100대 기업의 수익성 관련 자료였습니다.

의사결정자인 회사 상층부가 1950-1969년 출생의 경우 자본 수익율이 마이너스에서 0에 이르러 사실상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상층부의 출생년도가 1970년대 이후일 경우 자본수익율이 반전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상 무능이 입증된 치욕스러운 자료였습니다.

이 자료는 이들의 의사결정이 지난 20여년간 변화한 외부 환경에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386세대를 학창시절부터 지켜본 바와 이글의 데이터와 그 주장을 보면 공감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저자는 데이터에 근거해서 386세대가 처음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탁되어 정치권에 입성하고 1997년 금융위기를 통해 경제계를 접수한 이후 이들이 ‘민주적이며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로 한 약속을 사실상 저버렸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수긍합니다.

상황논리에 말리고 정치적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이 세대의 특성상 1998년도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유연화’를 지지한 사실은 이 세대가 단체로 변절한 첫 케이스로 생각합니다. 언행일치를 알고 20대 학생시절 한 발언과 주장을 생각하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인데 386새대 정치인들의 ‘권력의지 ‘가 자신들의 가치와 반대되는 합의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봅니다.

잘 알파시피 지금도 정치권에 ‘극우’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중견이상 정치인들 중 학생 시절 지하에서 사회주의이론가였던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단한 변신이죠.

따라서 386세대가 현재 이룬 승자독식 (winners take all)은 예상가능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소위 한강의 기적을 통한 성과의 과실을 최초 자본 축적을 경험한 산업화세대와 그 자녀인 386세대만 누리고 그 아래 세대들이 누리지 못하는 건 너무 덧없습니다.

40년간 밤새 일해 서구 국가들이 200년에 걸쳐 이룬 경제성장을 이루고 먹기 살만해 졌는데 그 과실이 다시 30여년만 특정 세대만 누리고 다른 후배 세대는 그 과실을 전혀향유하지 못한체 미래조차 유보하고 있는 상황은 너무 슬픕니다.

젊은 세대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자의반 타의반 출산 파업을 감행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도 확대재정에 인색하고 학교는 학생을 내몰라라 합니다.
어르신들은 상황도 알지 못한체 젊은이들에게 결혼 안한다고 훈계 합니다.

어르신 세대인 산업화 세대와 현재 집권층인 386세대는 현재의 이런 불합리하고 슬픈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동서양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유교적 위계 조직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로 현재의 상층권력을 무시하면 상층부에 의해 제거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반편, 서구에서는 관행과 전통을 무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상층권력에 도전할 경우 상층권력을 해체하고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생긴다는 겁니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지식은 출세와 권력을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 그 지식의 질과 참신함을 ‘평가’하는 기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색다른 지식에 대해 주장하고 권위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대신, 그 아이디어의 독창성(originality)과 사회에 대한 기여도(contribution)을 면밀히 따지는 ‘평가’시스템이 발전했습니다.

이책에서 경제불황에서 벗어나고 기업이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새로 젊은 인재들을 채용해 조직에 활력을 더하고 위의 서구식 앎의 체계를 도입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 보입니다.

이 책은 재가 평소에 생각하던 한국사회의 상황을 데이터로 확인해주는 역할을 해 반가웠습니다.

제 커리어 내내 불황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이러다 정말 한국이 구조적 불황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입니다.

노인인구는 늘어나는데다 출생은 감소해 실제 인구감소가 현실화되어 더욱 그렇습니다.

이 책은 코로나 발발 이전의 상황을 다루었자만 ‘혁신’이라는 포장 아래 노동을 갈아넣어야 하는 택배 기사들의 상황을 추가하면 별반 달라진 것도 없어 보입니다.

끝으로, 눈만 뜨면 나오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의 주장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는 인공지능과 로봇은 인간을 도와주는 구실을 할 뿐이지 대체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계는 단순반복 작업을 잘할 뿐 교육과 같이 의사소통의 하며 감정을 교감하는 일을 전혀 할 수 없는데 교육계가 인공지능을 도입해 원격수업을 하겠다는 황당하고 몽상적 주장을 해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이고 로봇과 대체가 될 수도 없는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승태 작가의 책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 창,2018)’ 은 그동안 각종 매체의 소개를 통해, 그리고 이미 읽으신 독자들의 소감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던 책입니다.

한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를 일깨우는 논픽션을 써오신 작가라서 과연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습니다.

읽고 난후 감상을 언급 안하는 편인데, 이 책은 ‘웃프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부에서 언급한 개농장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충격을 받았던 ‘부화장(pp 40-94)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닭은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알을 낳는 ‘산란계’와 고기를 먹는 ‘비육계’로 나뉘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길러지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부화장은 산란계의 부화장으로 달걀을 낳을 수 있는 암컷 병아리만 상품으로 인정받고 부화한 수평아리들은 모두 ‘불량품’으로 폐기처분 됩니다. 알에서 깨어난 미약한 어린 생명체가 알을 낳지 못하는 ‘불량’으로 인식되어 그냥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산란계들은 비좁은 케이지에 최소 3마리씩 갇혀 지내고 평생 알만 낳다 도축되며 그 알에서 깬 병아리들도 수컷은 모두 폐기되고 암컷만 미래의 산란을 위해 올겨집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원칙은 ‘사료값 ‘이라는 농장운영의 최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육계들은 그나마 케이지에서 지내지 않아 산란계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기형이거나 다른 놈들에 비해 몸무게가 작게 나가거나 하는 경우 가차없이 ‘도태( 즉 죽임)’을 당합니다. 이유는 위와 마찬가지로 사료값 때문입니다.

미국등에서 들여온 수입 옥수수 가루 위주로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한 사료를 먹여 가축을 기를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축산업의 산업구조에서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사료값을 덜 쓰고 양질의 상품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 사료를 축내는 가축은 가차없이 도태되는 것입니다.

시장을 위해 가축들은 가장 싼 사료를 먹고 자라며 자연에서라면 당하지 않아도 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농장(Farm)아니라 사실 닭과 돼지를 ‘생산’하는 공장(Factory)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래서 상품 취급된 동물들은 효율성의 잣대 아래 평소 먹지 않는 사료를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마이클 폴란 (Michael Pollan) 의 ‘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bore’s Dilemma, Penguin,2007)’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책은 MB정부 당시 ‘광우병( Madcow Disease)’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할 당시 미국소가 왜 광우병에 걸리는지 (알려져있다시피 초식동물인 소가 소의 부산물을 먹어야 하며), 미국산 잉여농산물인 옥수수가 어떻게 목초류만 먹어야 하는 소의 먹이가 되게 되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옥수수에서 추출된 당과 기타 이름으로 구별할 수 없는 화합물들을 섭취하는지 밝힙니다.

이책과 ‘육식동물의 딜레마’ 모두 축산업계에 대한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한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돼지에 관해서는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새끼 돼지를 낳아야 하는 어미돼지가 평생을 뒤로 돌아보지도 못하는 스툴 (Stool)에 갇혀 새끼를 낳고 출산 후 한달도 쉬지 못하고 다시 임신해야 한다는 사실에 몹시 경악했습니다.

1년에 40분 정도 새끼 낳으러 갈 때 움직이고 평생 고개도 못 돌린체 벽만 바라보며 앉았다 일어서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니.

돼지가 원래 야생에서는 공격성도 있고 활동성도 있는 동물로 알고 있는데, 똥을 싸고 거기 뒹구는 건 알고 있었어도 평생을 좁디 좁은 스툴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건 충격이었습니다.


제목에 ‘한국적’이라는 말을 넣은 건 개농장을 표현하기 위해 서 였습니다.

동물복지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동물들을 저렇게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충격을 받은 닭과 돼지의 사례도 개농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개농장은 상상한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정부의 공식적인 축산업에 들어와 있지 않은 ‘식용’개농장은 아예 사료를 먹이지 않습니다. 개들은 어미젖을 뗀후 소위 ‘짬’으로 불리는 음식쓰레기만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평생 좁은 케이지에 갖혀 땅을 밟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전기충격으로 죽거나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고 도축됩니다.

사실상 개농장 주인은 사료값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개를 키웁니다.

‘개농장’편을 읽으면서는 단순히 충격이 아니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를 일깨운 글이었습니다.

개농장 사장들도 모두 나름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가장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식용으로 정해진 개라지만 글 속의 여러 캐릭터들이 솓아내는 말들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찿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개장수가 비용이 별로 안들어 많이 남는다고 주장하고, 짬사업 하시는 분들은 개가 음식쓰레기인 짬을 먹어 없애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으로 방치된 개농장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개농장에 한국적인 이유는 축산의 일부로 이책에서 다루고 있지만 아마도 중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서도 식용 개산업을 축산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농장에 대해서는 정부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최소 이미 도축된 개들의 위생관리를 위해서라도 정부는 개농장을 관리해야 할 텐데 이 책에서 그런 흔적은 전혀 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정부가 음식쓰레기 처리용으로 개농장을 묵인하고 있는걸까요?? 확인이 필요한 지점 같습니다. 비용 투입없이 장사를 한다는 개농장의 사업구조 자체가 이들을 음지에 있게 만든 가장 큰 요인으로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의 필요성입니다. 식용 개농장의 양성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세계10위 경제대국이 프랑스 여배우가 개 먹지 말라고 대꾸도 못하는 건 우스운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 프랑스 여배우가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무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대로 살아갑니다. 그 여배우가 한국에 무관심하니 그런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외교당국자들이 외국의 이런 주장에 너무 주늑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튼 제가 개농장 양성화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개농장의 지금 현상황을 그대로 놔두는 건 ‘죄악’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면 뭐든 다되는 천박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 책에 묘사된 개농장은 모든 것이 한도를 초과해 버렸습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끝으로 몇가지 덧붙입니다.

이글을 쓰는 저는 비건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육식주의자입이다. 적당한 속물이죠.
따라서 동물복지에 관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사랑하는 소비자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래도 가축이 가축답게 자라는 최소한은 우리사회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농장들의 수익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과연 현재의 방식이 맞는 방식인지는 계속 의문이 남습니다.

과연 산란계 농장의 부화장에서 태어난 수컷 병아리들이 알에서 깨자마자 죽어야만 하는 건가요?? 남자와 여자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왜 유독 산란계 농장에서 수컷이 ‘불량’낙인이 찍혀 죽어야만 하는지 저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 기간에 걸쳐 겨우 논어를 일독했습니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논어 구절을 몇가지 배운 후 처음 이 유교경전을 보았습니다.

다른 책과 달리 평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한번 읽고 이야기 할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책 이외에 다른 판본의 논어를 더 읽어 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다만 몇가지 인상을 남깁니다.

첫째, 논어는 그 문장이 간결하고 각각의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상당히 어려운 밀도가 높은 책으로 기억됩니다. 짧지만 음미해서 봐야 될 곳이 많아 여러번 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입니다. 김원중 교수께서 상당히 많은 부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인용하셨는데 논어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사기와 같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3-1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키 이치사다 추천드립니다! 아니면 리링도요!

Dennis Kim 2021-03-14 1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유학경전은 공부하다가 정말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