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작가의 첫책으로 오마이뉴스에서 연재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대 건축사에 대한 책이 상당히 드문데,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약하신 건축가들의 작업과 생애를 조망해 볼 수 있는 독특하지만 귀한 기회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평전이나 인물론이 그다지 인기있는 분야도 아니고 기술자로 저평가되어 온 건축가들의 이야기는 논문을 찿지 않는 한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조선의 최초이자 최고 건축가로 알려진 박길룡부터 시인으로 알려진 모더니스트 이상 그리고 집장사로 폄훼되온 건양사의 정세권, 그리고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 (中村 與資平)까지 다양한 건측가들의 일과 그들의 삶을 다룹니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건축가들이 대부분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 경성고공) 출신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이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등 일제의 관청소속 건축가였다는 점입니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건축공사는 총독부가 진행한 관급공사이거나 일본인이 발주한 공사가 대부분이고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이 극심해 조선인 건축가의 경우 별다른 직업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일제가 추구한 고전적인 서양식 건축에 익숙해진 이 당시 건축가들의 건축작업이 당연히 일제 강점기 이전에 행해지던 전통적인 한옥건축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1930년대 정세권의 건양사는 개량한옥단지를 조성해서 판매한 부동산개발업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전통건축을 하던 목수들도 개량한옥을 지으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최근 정세권과 건양사에 대한 별도의 연구서가 나왔습니다. 아파트 시대 이전 한국의 주거환경에 대한 전사(前史)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서울대 김경민 교수가 지은 아래의 책입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2017)


근대 건축가들의 일제 관청 경력은 이들이 친일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소개된 건축가 중 남만주철회사(南滿洲鐵道會社,만철)에서 근무했던 경성고공의 수재라고 알려진 이천승(李天承)의 경우가 친일로 의심할 만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당시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들었던 만주국의 만철에 조선인으로 입사했고, 만철은 철도회사일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정책을 수행하고 수립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했기 때문에 이런의심이 더욱 들게 죕니다.
더구나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였던 만주에서 8년동안이나 조선인들과 접촉이 없었다고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생소하던 도시계획을 실무에서 경험해 보았던 이 근대건축가는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지금의 長春)의 도시계획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도시계획연구를 선도했던 분이고 지금의 강남개발의 모태가 된 ‘남서울도시계획’을 입안한 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책을 통해 알게된 사실 하나는 건축(建築)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어이고 영어,architecture 를 일본인들이 번역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근대 이전 한국에서는 건축이라는 말 대신 영건(營建)이나 조영(造營)이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일본이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은 알게 모르게 가까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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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
김정동 지음 / 푸른역사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목원대 김정동 교수님께서 1999년에 펴내신 책입니다.
잡지 기고문을 모아내신 책이고, 대중적인 책이다보니 아무래도 내용이 일관되지는 않지만 서울에 현존하고 있는 근대 건축물의 이면(裏面)과 내력을 알 수 있어 입문용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책입니다.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이 되서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입니다.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초창기에 출판했던 책이고 20여년 전에는 근대사적 관점에서 조망한 건측이나 도시의 내력에 대해 해설하는 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꽤 신선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글에 소개된 건물 중 명동의 국립극장은 처음에 메이지좌 (明治座)라는 극장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남촌에 가까운 지역의 특성 상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일본영화 상영관으로 개관했고 해방 이후 국립극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이 극장은 증권사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제 부모님 뻘 되는 어르신들은 이 극장을 시공관(市公館)으로 불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 공공극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명칭은 해방후 국립극장이 되기 전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극장은 다행히 보전이 되어서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 성공회 대성당도 얼마전 성당 앞을 가리던 건물이 철거되어 그 모습을 태평로에 내보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로2가 보신각 건너편에 있었던 화신 백화점이 사라진 것입니다.

회신의 박흥식이 새운 최초의 백화점으로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종로2가 앞 사거리를 ‘화신 앞’으로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흔적도 없이 건물이 사라지고 삼성에서 고층빌딩을 지어놓아 현재 아무도 그 장소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조선사람이 만든 화신백화점은 없어지고 미스코시(三越) 경성점이던 신세계백화점과 조지야 (丁字屋)백화점이었던 미도파백화점은 사라졌지만 롯데영플라자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전에 쓴 글에서도 문화유산이 왜 꼭 조선시대 지배층이 살던 건물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는데, 같은 의문과 근대적 건축물의 보전을 김교수께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주장해 오셨네요.

근대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와 중첩되어 있어 경원시되는 대상이라고 해도 바로 현재를 이루고 있는 기반이라고 볼 수 있고, 일제의 조선 강점도 그들이 남기고 간 ‘증거’로서 건축물이 눈앞에 있어야 비판을 하든 긍정을 하든 할 수 있지만 돈만을 쫓고 편리함만 쫓는 세태는 그 흔적을 너무나 손쉽게 없애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전에 너무 과격하게 일제의 흔적을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은 혹시 과거의 친일행적을 없애기 위해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여러시대의 삶이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어야 한다면 이미 지나가 돌이킬 수 없는 일제강점기 역시 그이전 조선과 같이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소가 있어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이죠. 기록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반쪽밖에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또한 책에서 조선 최초의 엘리트 건축가 박길룡에 대해 소개해 주셨는데 처음 알게된 분이고, 화신백화점의 설계를 담당하셨던 분이라고 하셔서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건축을 전문적으로 배워도 조선총독부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처지도 그렇고 자신의 이름으로 건축설계를 하기 위해 건축사무소를 새운 일화도 모두 아무도 끌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최초의 인물이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 책은 건축의 역사에 관한 책이지만 이 분야가 경제사와도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대구 삼성상회 사옥 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이 초기 대구에서 제분업(製粉業)과 제면업 (製麵業)을 하기 위해 사옥 겸 공장을 지었는데 1930년대 말 대공황 시기 부족한 식량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이 비지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씨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도쿄와 그 인근 지역의 경제 사정을 둘러보면서 사업에 적당한 업종을 찿는 모습도 같이 소개됩니다.

저자는 이런 과거의 기록들이 모두 한국 재벌 역사의 아주 초창기부분에 해당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이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의 거치면서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을까가 궁금하긴 하지만 의외로 이 주제를 다룬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자본주의의 기원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어딘가 기록이 있고 연구서가 있겠지만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1970년대 이후 국가의 개입으로 현재의 거대기업군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그 전사(前史)입니다.

정말 실력으로 그 거대기업의 터전울 마련했을지 그 시대의 운이 작용되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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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강준만 교수님의 강남에 관한 책,’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인물과사상사,2006)’을 읽는 가운데 인용된 책 중에 이 책이 있었습니다.

2002년 11월 출간된 책이니 내년이면 출간된지 20년 되는 책입니다.

서울의 공간과 강남개발 등을 말할 때 위의 강준만 교수의 책은 언론학교수가 쓴 사회학적 입장에서 쓴 책임에도 상당히 자주 인용되는 책이고, 형식 상 도시기행 에세이인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의 도시계획에 관여를 해오시고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와 서울역사박물관을 이끄셨던 강홍빈 교수와 사진작가 주명덕 작가께서 쓰신 책이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재가 보기에 이전에 소개해드렸던 서울대 김시덕 교수의 서울답사기,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의 길잡이 비슷한 역할을 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200쪽도 안되는 작은 책이지만 2002년 당시의 서울의 도시풍경을 담은 사진도 지금 시점에서는 기록으로 가치가 있고 강홍빈 교수께서 각 글 꼭지마다 충실하게 인용문헌을 표시해 두셨습니다.

서울의 도시계획과 그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손정목 교수님의 영향력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과 수도권 각 자역의 도시개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1960-70년대 개발연대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시나 건축에 대한 역사는 한국에서 볼모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과거가 현재의 토대인데도 특히 과학 기술교육이 기술습득에만 치우친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기술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와 맥락을 모르는 ‘영혼없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죠.

기술자들의 사회에 대한 몰이해는 사회 전체에 큰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이 이치에 맞아야 하는데 아무데서나 정확성, 경제성을 따질 수는 없으니 말이죠.

세종로에서 태평로, 소공동을 거쳐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지나 이태원과 용산 미군기지, 해방촌을 지나 반포대교를 건너 반포와 서초동을 지나 예술의 전당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 종단길이 이 책에서 이야기는 장소입니다.

군사정권이 1970년대 들어 강남개발을 시작하면서 공유수면매립과 토지구획정사업을 통해 군소 건설업체들이 재벌로 도약할 기회를 주었고, 의도적으로 강북의 개발을 억제하고 강남개발촉진을 위해 아파트만 지을수 있는 아파트 지구를 설정한 사실 등은 서울의 도시개발이 즉흥적인 대처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해줍니다.

군사정권은 ‘안보’를 빌미로 강북에 거주하던 인구를 당시 허허벌판이던 당시 경기도 광주군(강남)으로 유인하기 위해 강북의 경기고를 비롯한 명문고등학교를 이전시켰습니다. 군가쿠데타에 동참했던 군인출신 서울시장은 군사작전하듯 무자비하게 일을 추진했습니다. 이후 1980년 들어 택지로 구획되지 못했던 반포 인근 근린공원용지에 법원과 검찰청을 이전시켰고, 전두환 신군부는 문화창달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서울에서 접근이 어려운 우면산 아래에 예술종합공연장인 예술의 전당을 한꺼번에 지었습니다.

도시계획의 틀안에서 행해진 장기적으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아니고 이 모든 하드웨어 건설을 그 당시의 여건에 따라 개별적으로 행해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책의 결론에서 한국사회가 아직도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관료들이 하드웨어 건설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지적한 점은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부족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자영업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바탕으로 방역체계가 세워졌으며 대형민간병원은 영리를 이유로 전염병 예방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2년이 지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도 감염병 전문병원이나 공공병원 확충은 없습니다. 의료인력 충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부채는 계속 증가하는 반면 국가부채는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입니다.

산업화시대를 지나는 동안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하은데도 사실상 책임을 방기해 왔는데 이 세기적 재난을 맞이해서도 정부는 아직도 그 역할을 더욱 더 방기하고 있습니다.

첫 단추는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잘못 끼워졌고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현재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는 고위 관료층이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와 현재 진행되는 팬데믹이 국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는데도 한국정부는 이런 면에서 너무 무력합니다.

사회안전망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가 조장되는 측면이 있는데도 관료들이 자신의 주택가격이 올라가니 그냥 사회안전망 시스템 도입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절판된 줄 알았는데 아직 출판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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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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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쪽 가까이 되는 메이지유신관련 정치경제사 책입니다.

역사가가 쓴 책이 아니라 언론인 출신 작가가 쓴 책이고 일본사료를 주로 인용했지만 각주나 인용형식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그리고 참고문헌에는 나오지 않고 본문에서만 인용된 책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서술하고 주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출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단점이 존재합니다.

출판사에서 아셔야 할 것이 이책과 같은 일본 근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부실한 각주와 인용이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각주와 인용이 없기를 바라면 소설을 읽어야지 뭐하러 역사서같은 논픽션을 찿아 읽겠습니까?

이상이 이 책의 형식적인 측면이고 내용에 대해서는 두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메이지유신을 본 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규슈 (九州)의 사쓰마 (薩摩), 와 사가(佐賀) 그리고 혼슈(本州)와 규슈를 연결하는 조슈(長州)지역이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에 가장 많은 병사를 보낸지역이며 이미 15세기부터 아시아에 교역을 하러 나타난 포르투갈 상인과 교역을 시작하고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총포를 포르투갈에서 도입하고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카톨릭 포교를 강제하는 포르투갈과 관계를 정리한 후 네덜란드와 사가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점으로 교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츠마에서 포르투갈 소총을 처음 도입하게 되고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교역하면서 근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각종 의술과 전쟁에 관련된 기술, 항해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17-18세기 규슈를 중심으로 난학(蘭學)이 발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쓰마와 사가지역은 에도시대 중심인 현재의 도쿄에서 멀리떨어진 변방이라 중앙 바쿠후(幕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한 영향도 있고, 지리상 위치가 중국의 남부해안지역과 한반도 남단 그리고 류큐(琉球), 타이완(臺灣) 등과도 멀지 않아 일찍부터 대외교역(또는 해적)활동을 많이 해온 관계로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덜했던 걸로 보입니다.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県)에 해당하는 조슈지역은 혼슈남부지역으로 간몬해협(關門海峽)을 사이에 두고 규슈와 연락됩니다.
오래전에 후쿠오카(福岡)-고쿠라(小倉)- 모지(門司)- 시모노세키(下關)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철도로 3-4시간내에 갈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까지도 기차로 2 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고 나가사키 바로 옆에 미군기지가 있는 사세보(佐世保)항이 있습니다.

나가사키 글로버 저택이 위치한 언덕에 서면 미쓰비시의 나가사키조선소가 보입니다. 과거 군함을 건조하던 곳입니다.

현재도 부산-시모노세키간 관부연락선( 關釜連絡船)이 오고가던 곳으로 한반도의 영향이 지대한 지역 중 한곳입니다.
가깝게는 얼마전 퇴임한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 그리고 그의 외할아버지로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로 불리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을사늑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모두 죠슈 출신입니다.

역대 조슈지역 출신 총리들은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메이지유신이래 한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총리가 ‘대대로’나온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기지속의 역사로 매이지유신를 살피면서 저자가 주목한 또 한 부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이후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입니다.

사실 도자기가 임진왜란 포로들에 의해 일본에 도입된 사실은 알아도 누구도 경제적 영향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서 일단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진실을 찾아내는 노력은 주목할만 합니다.

서쓰마와 사가 그리고 조슈 모두 조선에서 건너온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의 도자문화의 시조가 되었으며, 이들은 일본에서 살기 위해 에도막부시절부터 각 번의 영주들에게 도자기를 납품하였습니다. 수출품이 별로 없던 당시 일본에서 각 본 지도자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상인들에게 도자기를 수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도자기를 팔아 만들어진 재원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각종 상선과 중기선, 그리고 전함을 사들이고, 화포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럽으로 수출한 도자기가 분명 국가재정에 큰 보탬이 된 것 같지만 설명 자체는 비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영국에 수출한 도자기가 일본의 전체 수출액 중 얼마를 차지했는지 보여주고 추이를 알려주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책에서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자기관련 부분을 읽으면서 정치경제사인지 도자사인지 좀헷갈렸습나다.

다음으로 매이지유신은 결국 영국이 후견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러시아의 동진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입장이라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력은 이미 1840년 아편전쟁이후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메이지 유신 당시인 19세기 중반 나가사키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무기상인 글로버가 규슈 전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자딘 메디슨의 나가사키 지사인 글로버상회에서 일한 글로버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등 조슈출신 번사들의 영국유학을 알선한 장본인이고, 사쓰마와 조슈에 매이지 유신을 위한 무기를 공급해준 사람이었고,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을 만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동업자였고 이후 글로버상회가 파산한 후 미쓰비시의 고문으로 일하게 됩니다.

영국은 무기상인 글로버를 통해 일본을 후원했고 대륙세력인 러시아의 영향력 저지를 위한 큰 밑그림이 있었습니다.

미국도 입장이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 외무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간 가쓰라 태프트 각서를 체결해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합니다.

이협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영미권 업무처리의 특징이 철저하게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준비하는 것이고 이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상업적 마인드라면 이들은 약 160여년 전에도 일본과의 비지니스애서도 철저하게 그러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슈번의 유신을 이끈 정치인들의 출신에 대한 사항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메이지천황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조슈번 출신 유신 정치가들이 대부분 조선인의 피가 섞인 이들이라는 점과 매이지 천황이 조선인 부락 출신의 천민과 바뀌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장이지만 저자의 글과 일본에서 출간된 책의 어주 간략한 인용밖에 없어 솔직히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놀라우면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이 되죠. 당혹스럽기도 하고.

인용한 책의 출판년도도 1970년이니 이미 50년전에 나온 책인데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후에 유사한 내용으로 추가적인 연구발표가 있었는지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자료가 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내용은 책의 마지막 정인 6장 후반부에 주로 나옵니다.

과문한 저로서는 조슈지방에 임진왜란 당시 끌려갔던 도자기 장인들의 후손들과 여러 임란 당시 포로들이 과연 조슈번에서 일대를 풍미했던 정한론(征韓論)과 관련이 있는지 주장하는 건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찿았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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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출간된 신간입니다.

구한말 고종 재임시 서울에서 초대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의 평전입니다.

내용은 거의 90%이상 베베르가 조선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1860년대부터 189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을 다룹니다.

이 책은 러시아 외교관의 외교활동을 러시아 사료를 통해 접근했다는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계 러시아 역사연구자인 벨라 보리소브나 박의 러시아어 저서를 한러관계사를 전공한 두 전공자께서 한국어로 번역한 책입니다.

글의 대부분이 외교문서의 인용이 많은데다 번역투도 있어 아무래도 한국 연구자가 직접 저술한 책처럼 가독성이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가 1840년 아편전쟁이후 영국이 영향력을 동아시아지역으로 점차 넓히고 있었고 시베리아로 동진을 해서 연해주에까지 진출한 러시아도 조선과 함경도에서 국경을 맞대면서 조선문제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베베르라는 러시아 외교관은 중국전문가로 외교관에 들어선 인물로 최초에 중국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해 1884년 조선과 러시아와의 수교조약을 체결한 실무자였으며 조선과 러시아와의 육로교역을 위한 조러육로통상장정을 체결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조건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갑오개혁(甲午改革,1894), 을미사변 (乙未事變,1895),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1895) 등을 현장에서 지켜본 외교관 중 한명이었습니다.

아마 외교관 베베르가 한국 근대사에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은 그 자신이 고종과 가까운 고종의 정책자문을 해왔다는 사실과 최초 조선에 러시아공사관을 개설하고 제정러시아와 조선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역사적 고비마다 일제의 조선의 주권 침해에 맞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1896)이 일어나는데 이 정치적 행위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게 됩니다.

을미사변이라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상태였던 고종은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고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은 궁궐을 에워싸는 등 그들의 침략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러시아의 개입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친일내각을 붕괴시키고, 정국의 반전을 이루게 되고, 고종은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친일내각을 경질하고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민영환과 윤치호를 특사로 보내 러시아 군사고문과 러시아 병력지원을 요청합니다.

러시아 외무성은 한반도에서 이익이 서로 부딪치는 일본과 무력충돌을 피하려 했지만 일본이 조선을 그대로 점령하게 놔둘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외교 기조를 이어갑니다.

고종의 러시아 병력 요청도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베베르의 오랜 요청 끝에 성사됩니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 러시아는 조선보다 만주와 연해주에 더 많은 외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베베르가 일본의 영향력 강화에 맞서는 러시아의 외교정책 전환을 촉구했지만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이익우위를 인정하면서 대조선정책을 소극적으로 일관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다시 맞붙을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1890년대 말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1880년대 청의 대조선 간섭이 강화되어 조선을 속국처럼 대할 당시는 모두 청국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었고 청일전쟁(1894-1895)를 치룬 이후에도 일본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매우 버거워 했습니다

하지만 청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러시아와 조선은 대조선 정책을 두고 러시아와 맞서지만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하면서 교묘하게 러시아를 회피합니다.

일본에게 러시아를 비롯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울주재 서구 외교관들의 존재는 관리를 해야만 하는 걸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전반적인 책 내용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애서 언급한 구한말의 정치적 격변은 각각의 사건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존재합니다.

러시아 사료를 중심으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조명한 책으로는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눈보라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경인문화사,2012)’를 보시기 바랍니다.

민영환의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 참석에 관한 김영수 교수의 책도 유익합니다.
미국을 통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러시아 차르를 알현하고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연해주를 거쳐 인천에 다다르는 사행길을 다룹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

흔히 긍정적으로 해석되던 친일 개화파의 갑오개혁과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연구서도 있습니다. 책분량이 상당해 그냥 참고로 소개합니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이다.
갑오개혁은 친일파들이 일본을 등에 없고 사실상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또 하나의 왜란이라면 측면에서 접근한 해석으로 사실상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에서 조선을 침략했던 규슈의 삿쵸동맹(薩長同盟)의 후예들이 300여년아 지난 후 친일파 앞잡이들은 내세워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관점으로 갑오 개혁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는 사실상 고종의 러시아망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입니다.

해외로의 망명이 여의치 않으니 일본이 접근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을 해서 의병들의 봉기를 지휘했다는 지점을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던 고종을 근대적 군주로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이 아마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2000)’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종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서양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의 조선애 관한 개괄적 역사서애서 비롯된 면이 크고 일제가 의도적으로 고종의 능력을 폄하해 유약한 군주로 만들어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고종은 재위 40년이 넘었던 통치자로 오랫동안 통치한 18세기의 영조만큼 오래 재위한 임금이기도 하고 스스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에서 조선을 개화로 이끈 군주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구한말은 조선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처음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던 시기이기도 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시기입니다.
일제의 흔적이 남기전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 유교적 사고방식을 지닌 상태이지만 변화하는 환경과 정세에 이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다시 한번 들여다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다만 19세기를 휩쓸었던 민란이 일어난 원인이 정조 사후 발생한 세도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이 역사에 끼친 악영향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100여년간 그 이전에 확립되었던 조선의 정치제도가 무너져내린 겁니다.


이들이 모든 걸 망가뜨려놓아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군대를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된 군대가 전혀없고 국가자체 재정도 부족하니 청나라와 러시아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에게 병자호란 (丙子胡亂,1636)에서 패하고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의 예를 지내고 심양으로 왕세자도 인질로 보내고 백성들도 인질로 보냈는데도 도대체어떻게 했길래 250여년 만에 군대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집권층인 양반사대부들에게 있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 안하고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무신을 천대하고 돈버는 상업활동을 천대해서 화을 자초한 것입니다.

같은 양반인데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차별하고 문과급제의 기회를 주지 않던 나라였습니다.

19세기초를 흔들었던 ‘홍경래의 난(1811-1812)’이 평안도에서 지역 지배층의 불만으로 일어났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김선주,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서울과 경기지방 출신 양반들이 국정을 좌지우지 한거죠.

19세기에도 기원전 7세기 쯤의 고대 중국 문헌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니 상황이 황당하고 할 수밖에 달리 생각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조선후기시대에 관해 읽어본 책들을 보면 결국 이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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