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었던 개정판 중국근현대사 강의(한울 아카데미,2021)은 한국의 중국연구자들이 교과서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책이라면 이 책은 미국에서 연구하는 중국인 학자 입장에서 저술된 책입니다.
충북대 김승욱 교수께서 번역을 하시면서 중국적 입장에서 저술된 부분을 중립적인 용어로 바꾸면서 번역을 하셨지만 그라도 중국입장의 역사서술이라는 입장은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과서적으로 중국의 근대를 나누는 기점으로 흔히 아편전쟁(1840-1842,1856-1860)을 꼽는데, 이 책은 임진왜란을 근대의 기점으로 잡습니다.
아편전쟁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폐쇄’된 중국에 문호개방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항전으로 벌인 전쟁이 아편전쟁이고,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이 개항하고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로 나가게 되었다는 시각입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이 시각은 다분히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에 기반한 시각으로 유럽이 정상이고 비유럽은 정상이 아니라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도 포함된 설명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가 ‘정체’되어 제국주의 유럽에 넘어갔다는 시각은 근래 수정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임진왜란(1592-1598)을 동아시아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은 일견 타당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처들어온 일본의 군인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카톨릭 다이묘(大名)였다는 사실도 있고, 임진왜란 이전 이미 일본이 포르투갈을 통해 화승총 기술을 전해 받아 이미 임진왜란에서 조총으로 실전배치를 끝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미 마르코폴로 이후 마테오 리치를 대표로 하는 서양의 선교사들과 교류를 진행해 상당한 서양지식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명말 타이완을 차지했던 정성공 (鄭成功)은 청 제국 초기 남명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군인으로 네덜란드의 수중에 있던 타이완을 탈환합니다.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동아시아에 나타난 네덜란드는 일본과는 나가사키를 통해 교역하고 있었고, 타이완을 점령하고 무려 40여년을 그 섬에서 보냈습니다.
동아시아가 ‘패쇄적’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왜곡의 여지가 큽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상황을 일반적인 대외쇄국과 정체로 파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이라는 동아시아 전쟁이 가지는 의미가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조선사애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분기점만이 아니고, 동아시아 역사의 맥락(context)애서 봤을 때 말입니다.
사상적 견지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쿠데타인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이 일어나 서인정권이 들어섰고 제조지은 (再造之恩)을 명목으로 쇠퇴하고 있는 명에 대한 무조건적 사대를 주장합니다.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외교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 실책을 범합니다.
결과는 병자호란이고 조선은 패했습니다.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층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사상은 그들의 사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사상적으로 좀 달랐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주희 (朱熹)의 유교 경전해석은 그저 유교경전을 읽는 한 방법이지 조선에서처럼 절대시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청의 강건성세(康乾盛世)시기, 즉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한 1681년부터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 치하의 시기에, 청은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러시아와 국경선을 획정하였고 중앙아시아의 준가르 평원까지 정복해 오이라트 몽골을 복속하기까지 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동북에서 몽골과 러시아와 마주하고 교류하고 외교협상을 하고 군사정복을 하던 청은 청대 아담 술을 비롯한 유럽의 지식도 같이 흡수 했습니다.
그러니 주희가 해석한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여러 해석 중 하나였고 이미 당시 중국에서조차 뜬구름 잡는 추상적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양명학(陽明學)과 고증학(考證學)이 발전해 왔는데, 고증학의 경우도 전적에 파묻혀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참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조선에서 송시열 (宋時烈)로 대표되는 서인 노론계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대책없이 경직된 유학이며 허상을 쫓는 학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이변태(華夷變態)라는 표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중국이 고대로부터 한족(漢族)을 화(華)로 그 외 다른 민족은 오랑캐인 이(夷)로 여겨져 왔습니다. 중원의 한족국가인 황제에게 주변의 제후국들은 조공관계를 맺고 왕위를 책봉(冊封)받아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동북의 오랑캐인 만주족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명실상부하게 중원을 장악하고 심지어 타이완까지 차지하게 되어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한족 중심이라던 화이론(華夷論)자체의 전제가 흔들리게 된 겁니다.
조선과 일본은 이 중대한 중국의 변화에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조선은 전통적 한족국가인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했고 일본은 스스로 중화(中華)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두 국가의 이 다른 선택이 조선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만든 분기점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선택으로부터 20세기에 이르러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고 조선과 중국, 만주지역과 동남아시아,타이완까지 침략하게 되고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게 됩니다.
중원이 더이상 중화가 아니라는 자각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다른 대응이 역사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