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길윤형 기자의 논픽션입니다. 우리말로 쓴 논픽션 중 이렇게 잘읽히는 책을 만난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일제 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직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체제가 와해되는 과정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송진우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이들 중 일부는 매우 중대한 친일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 독립운동세력인 김구의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의 권력다툼이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책은 1945년 8월15일을 전후해서 1945년 9월9일 마군이경성에 진주하기 전까지의 기간만을 다룹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사실상 외세의 개입없이 일제와 마주했던 짦은 기간입니다.
이 책으로 알게 된 중요한 몇가지를 적어보면,
첫째, 소련의 스탈린은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를 소련이 병합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둘째, 소련은 만주땅으로 진격한 이후 조선의 동북지방인 청진, 원산, 흥남을 먼저 점령합니다. 이는 미국보다 매우 빠른 전개였습니다. 일본은 패전 당일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치안유지를 부탁합니다.
셋째, 미국은 1945년 당시 아직 공산화되지 않았던 중국을 공산주의 봉쇄(containment)의 교두보로 삼으려 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의 이른 조선반도 진출이 달갑지 않아 급히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던 24군단을 파견해 일본의 항복을 받고 미군정을 38선 이남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넷째, 일본과 제2차세계대전을 태평양에서 홀로 맞선 미국은 일본의 항복 후 일본에 배타적인(exclusive) 점령정책을 시행하려 했고 사할린과 홋카이도에 소련의 진주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군사적 군계선으로 38선으르 인식하던 소련은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에 반발해 이미 소련군이 진주한 한반도 북부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워 자신들의 영토방위를 위한 완충지대를 설정하려고 합니다. 즉 조선의 분단의 원인을 미국에서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점령했으면 일본이 분할되었으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넷째,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카이로 회담, 얄타회담, 모스크바 삼상회의 등에 조선은 주체로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해방은 철저히 제2차세계대전 승전국의 국가이해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특히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렬되고 우파의 이승만은 ‘정읍발언 ‘을 통해 38선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고 북한은 북한대로 정권을 수립해 결국 분단이 고착화됩니다.
다섯째, 미군 제24사단의 경성진주 이후 체결된 미국과 조선총독부 간에 체결된 항복조인식에 조선은 대표를 참석시키지 못했습니다. 여운형이 추진한 건국준비위원회의 국가건국사업은 일본이 아직 정식 항복 전이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무시되고, 미군정 실시 이후에는 미군정 권위에 반한다는 이유로 무시되었습니다.
친일 이력이 있는 우파세력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해 미군정의 ‘통역권력 ‘으로 거듭납니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중장은 애초 점령의 편의를 위해 기존 총독 조직과 관료들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다가 조선의 항의를 받은 이후 미국태평양지역 총사령관 맥아더의 지시로 총독이하 일본인 고위 관료들을 해임시키고 미군정청을 발족 시킵니다. 한국 정부수립이후 우파에서 국가재건계획을 어떻게 세웠는지 왜 우파들 중 평안도 출신이 많은지 보려면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2017)’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평안도 출신 우파 지식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부는 나중에 이남에서 근본주의 기독교 전통을 세우며 한국 극우 정치세력에 강력한 지지자가 됩니다. 이글 중에는 몰상식하게도 ‘목사세습’이라는 희안한 세습장치를 만들어서 교회의 부를 세습하기도 합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데 근본이 없습니다.
여섯째,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주의자들의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은 한국현대사에서 의도적으로 가려졌던 부분입니다. 심지어 1980년대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 냉전기에는 국내에서 논의 자체가 금기시 되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2017년에 나온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서해문집)’을 보면 가려졌던 역사의 일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한국현대사는 이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매우 다른 논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정치인 이승만의 경우는 주목할만 합니다.
이책을 보면 책말미 한민당 발족이후 미군정 수립후에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어떻게 초대 대통령으로 오르게 된건지 궁금합니다. 현재 한국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이라 더 궁금합니다.
그는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준이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등장한 이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건준에서 국가주석으로 지명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우파가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공산주의자들도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승만은 구한말이래 외국생활을 오래한 당시로서는 희귀한 이력을 가진 정치인인데 소위 ‘검은머리 외국인’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미군정이후 첫 대통령이 미국에서 살던 이승만이고 퇴임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사실상 미국인이 첫대통령이 아니었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미군정기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간략히 몇가지 정리해 보면,
첫째 미 군정을 책임지던 미군 제24사단 사단장 존 하지는 조선에 대해 아는게 없어서 기존의 조선총독부 조직과 관료들을 그대로 이용하기를 선호했습니다. 마국이 일본에 대해서도 동일한 정책을 펼쳤지만 , 특히 조선에서는 식민통치 조직이외 다른 통치조직이 없었던 상태에서 하지의 정책은 친일파와 친일전력이 있는 영미 유학출신 지식인들애게 기회의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이후 삶이 망가질 줄 알았던 이들에게 반전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둘째, 조선인 친일 전력자들은 해방 직후 자신들의 안위에 불안을 느꼈고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제조일본인의 치안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미군정이후 상황이 역전됩니다. 친일파들은 확실히 미군정 이후 출세의 기회를 보장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에 통합된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건 뺘아픈 대목입니다.
셋째, 좀 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미국은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적국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일본을 점령(占領,occupation)하고 하지는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조선을 점령한 것입니다. 한국의 보수적 숭미주의자들은 화들짝 놀라겠지만 조선이 ‘점령’되었다는 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미군은 조선을 해방하기 위해 38선 이남에 진주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항은 38도선 이북을 점령했던 소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국 소속으로 태평양지역의 적국인 일본과 대항해 싸웠습니다.
넷째, 미국의 38선 이남지역의 점령은 그 원인을 생각할 때 소련의 38선 이북지역 점령 그리고 미국의 일본점령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재2차세계대전의 태평양 지역(the Pacific Theater)의 종전과정 그리고 당시 미국과 소련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중국의 공산화(1949)이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미국은 애초 중국에서 소련을 봉쇄할 생각이었으나 중국의 공산화로 한반도로 전선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을겁니다.
아무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할 걸로 보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접근한 연구서가 있는지 찿아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