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철도 - 근대화, 수탈, 저항이 깃든 철도 이야기
김지환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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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땅에 들어온 철도교통이 일제의 대륙침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간명하게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하지만 책이 왠지 쓰여지다 만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 내용 중 제1부인 ‘철도의 양면성, 근대화와 수탈’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좀 더 명확히 보여줍니다.

경부선과 경인선 그리고 경의선은 중국 대륙침략을 이미 마음먹은 일본 메이지 정부가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철도망을 건설한 것이었습니다.

병력과 물자를 중국대륙에 수송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중국의 철도와 같은 표준궤 규격으로 조선의 철도망을 만들었고, 압록강 철교를 개설해 실제로 만주와 북경을 통과하는 철도망을 만들었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연락선 항로를 개설해 일본의 철도를 한반도를 통과해 중국대륙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철도망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 패전하기전까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탈경로로 철도가 이용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일본의 철도망을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가 향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킨 관동군의 모태가 되었다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도 용산지역이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의 군사주둔지로서 미군은 일본의 패전이후 일본의 군대가 주둔했던 바로 그 장소를 접수해 60여년 이상 한국에 주둔해 온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용산이란 지역은 한국에서 정말 외세와 뗄수 없는 관련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일제가 제조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용산을 개발하기 이전에도 이미 조선주차군이라는 일본의 군대가 구한말부터 주둔하던 땅이니 말입니다. 용산역이 경의선의 출발역으로 경의선이 압록강 철교를 통해 중국의 동청철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일본에게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군사적 이유로 경성에서는 용산역이 경성역 (서울역) 보다 먼저 세워지게 된 것이죠.

철도가 조선 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일제가 어떤의도를 가지고 철도를 건설했는지 입문서로 적당하다고 봅니다만 내용이 좀 더 픙성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본문이 237쪽밖에 안되어서 금방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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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대적 공간에 대한 책을 써오신 이순우 작가의 책으로 저는 두번째로 이 책을 보았습니다.

처음 읽은 책은 ‘광화문 육조앞길(하늘재,2012)’으로 서울의 중심거리이자 권력의 심장, 광화문 육조거리의 변천사였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지금도 주한미국 대사관저와 주한영국대사관과 성공회성당이 건재하고 주한 캐나다대사관이 있는 중구 정동의 근대사와 공간변천사입니다.

이미 구한말 대한제국시절부터 미국과 영국이 공사관을 정동에 자리잡은 이후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공사관을 정동에 설치해서 고종시대부터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던 혼돈의 시기에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지역입니다.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과 아관파천이후 고종이 이어하게되는 덕수궁( 당시는 경운궁)이 이후 대한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됩니다.

특히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후 고종은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1896.2.11-1897.2.25)을 단행하고 민영환을 러시아에 파견해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 대관식을 참여하고 러시아에 병력요청과 군사훈련을 요청하는 임무를 줍니다. 대한제국이 청일전쟁이후 중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하자 고종이 취한 외교적 방책이었습니다.

제정러시아와 대한제국의 숨가쁜 외교전과 그 발단이 되는 을미사변에 대해서눈 김영수 교수의 아래의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미쩰의 시기(눈보라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경인문화사,2012)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

그리고 당시 활동했던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에 대한 평전도 이미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편집에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와 대한제국간의 관계를 러시아 현지 자료를 가지고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조선(동북아역사재단,2020)

러시아공사관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고 다른 공사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서구열강의 공사관 중 최초개설당시와 동일한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는 영국입니다. 1883년 11월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 이후 2022년 현재까지 영국은 최초 공사관을 세웠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외교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대성당이 덕수궁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죠.

저자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이 영사관을 정동에 설치한 이후 다른 서구 열강들이 정동에 영사관을 설치하기 시작해 정동이 대한제국이래 외교의 중심지이자 근대교육의 발상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정동에 이화여고와 배재학당이 있고, 정동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시설이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이책이 10여년전 출간된 것이라 이후 정동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길은 없으나 현재 정동에 있는 성공회대성당 앞 건물이 철거된 것 말고 별다른 변화는 없지않나 생각합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조선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어서 정동이라는 지역의 명칭이 생겨났다는 점과 도성 안에 있던 이 무덤을 태조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ㄴ이 도성 밖으로 이전해 현재는 서울의 성북구 정릉동의 위치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태조 당시 조성된 정릉의 위치를 현재의 주한영국대사관의 위치로 추정한다는 점입니다.

장소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분이 굉장히 드문데 아무튼 흥미로운 책을 읽은 것 같습니다. 재개발을 명목으로 과거의 흔적을 너무도 쉽게 없애버리는 세태를 생각하면 한장의 흑백사진과 과거의 기록을 통해 근대이후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소의 역사 혹은 공간의 역사는 나름 의의가 있지만 관련 서적과 연구서는 굉장히 적은 것 같습니다. 학제적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관련저서들은 대부분 건축을 공부하신 분들이 저술하신 것 같습니다.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정집을 위주로 집의 건축적인 미학과 인테리어를 주로 다룬 ‘모던의 시대 우리집(모요사,2022)’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운현궁을 비롯해서 구한말 당시 고관대작들이 집에 어떤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어떤 생활공간을 꾸몄는지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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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 지음 / 소명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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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조선 강점과 식민지 시기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그간 많이 봤지만 식민지시기의 국가(國家)의 의미와 식민지통치구조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념을 떠나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어떤 통치체제를 가지고 조선을 지배했고 구조적으로 어떤 차별이 있었는지 그대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국가론을 이론적 프레임워크로 삼아 일제강점기의 국가론을 다룹니다.

일제강점이 끝나고 해방이 된지 70여년이 지났는데도 일제시기에 대한 통치구조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우선 놀랍습니다. 좋든 싫든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체계와 통치구조에 영향을 주었을텐데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일단 이 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베버의 국가론을 간략히 정의한다면, 베버는 근대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물리적 폭력의 독점’으로 보았고 국가란’주어진 영토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사용을 실효적으로 행사하는 인간공동체’로 보았습니다(p373).

즉 여기서 물리적 폭력이란 치안과 안보를 담당하는 무력, 즉 군대와 경찰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1910) 되면서, 왕조국가- 식민국가의 역사 진행과정을 거치면서 베버가 정의한 서구적 근대국가의 정의와는 다른 괘적을 가진 국가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조선동화정책 등이 과연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인가에서 전형적 근대국가의 정의와 차이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식민지시기 일본 식민권력의 통치형태를 대한제국과 같이 병존하던 통감부시기를 이중국가 (Dual state)시기로,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를 대칭국가와 식민국가(colonial state)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조선총독부의 통치메커니즘도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전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시켜 국가의 독점적 폭력을 무력화하기 시작했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한 후 한동안 대한제국의 권력과 통신부가 병존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를 저자는 이중국가의 시기로 규정하였고,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병합(annexation)된 이후 조선의 국가는 일본에 흡수도는 형태를 띄게 됩니다. 이후 일어난 군대해산이 바로 국가권력이 해체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선총독부로 대표되는 일제의 식민권력은 총독에게 사법권과 입법권을 포괄하는 종합 행정권을 부여하였기, 조선에 주재하는 ‘조선군(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에 대해 병력을 청구하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을 포함해서 조선은행 그리고 이왕직 (李王職)은 일본 본국의 직접 통제를 받는 시스템으로 총독의 통치권력은 일본본토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습니다.

식민국가를 대표하는 조선총독부는 저자에 따르면 영토와 독점적 물리적 폭력이 있으나 주권( sovereignty)이 부재한 근대국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현저하게 부재한 식민지 조선은 따라서 거대 관료조직을 동반하는 ‘과대성장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칭국가로 설명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역사적 실체가 국토와 인민이 없는 반주권 (半主權)적 정체로서 조선의 왕통을 이어받은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국제법적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운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제 강점이후 조선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행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뿐 아니라 미주 러시아 국내에서도 많은 활동이 있어 이는 사실 주권의 경합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이 전반적인 이 책의 주요내용이며, 아래에서 ‘조선군’관련 내용을 부가적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조선군은 최초 조선주차군이라는 임시주둔 형태로 조선에 들와서 조선의 치안을 위한 활동을 하다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선봉부대가 됩니다. 일제가 중국과 만주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든 건 다 알고 있지만 조선군의 주둔목적이 일본의 대륙침략이었다는 사실은 좀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1931년의 만주사변부터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까지 조선군은 일본의 중국침략애 깊게 관여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러시아를 제1의 적으로 규정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이후 함경도 지역을 사실상 군정으로 통치하며 이 지역을 러시아와의 결전을 대비한 군사요충지로 만들었습니다.

조선군이 남하하여 제주도와 군산 등지에 주둔하게 된것은 미국과 적대하게 된 태평양전쟁이후였습니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조선군)이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에서 어떤역할을 했는지 찿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서구학계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범위를 더 넓게보고 시기를 확장하면서 최초로 이 대전이 발생한 지역과 시기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사실은 일본이 1931년 일으킨 만주사변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인들에게 적대적 공산국가인 중국의 군벌시대나 중국공산당 집권 이전 국공합작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낯설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기존의 유럽중심적 시각에서 독일 나찌와 자유주의 서구진영의 대전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새로운 시각에 따르면 제2차세계대전은 유럽에서 먼저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중국에서 먼저 일어난 전쟁이었고,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중국을 도발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이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과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의 팽창적인 침략정책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아는 한 미국은 공산화되기 전 중국을 공산주의의 최고 방어선으로 생각하고 장개석 총통을 지원하고 1930년대 중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론이 중요한 이유를 한마디 덧붙이자면,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이후 2022년 현재 한국은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보수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청년들이 희생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고, 그게 국가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해 행정자치부 장관까지 모두 최근에 일어난 10.29참사에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정권을 맡긴 이유가 국민의 생명보호에 있는데도 ‘법적 책임’운운합니다.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된지 70여년이 넘었는데도 정부의 이런 무책임한 경우를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지금이 주권이 없는 식민지 시대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고시출신 고위공직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문제고 조직의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특정할 수가 있지요. 비정상을 정상으로 빨리 돌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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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 - 식민지 역사의 재현과 문화재 관리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2
오영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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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출신 고대사학자인 저자가 정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前史)입니다.

본문 345쪽으로 총 4부로 구성된 책입니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초기 수장한 유물도 역시 그대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인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식민지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이론적 역사적 논거를 만들기 위해 평양의 낙랑고분과 가야 신라의 고분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그 유물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했습니다.

목적이 정치적인 만큼 출토된 유물을 통해 일본과 조선의 연관성, 근대를 대표하는 일본과 서구제국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조선의 문화가 지체된 문화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조선총독부 하부 조직으로 시작되어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산업박람회 미술관에서 시작되었고, 조선의 역사적 유물을 발굴 전시하는데 조선인들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유적의 발굴과 그 보고서는 전적으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의 예산으로 충당되었고, 발굴은 도쿄제국대학 (東京帝國大學)과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출신의 고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들이 발굴을 주도하고 발굴계획 역시 제국대학출신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정체적 역사관에 입각해 조선의 역사를 서술한 겁니다.

1920-30년대 조선의 고분발굴을 주도하던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고고학을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했다는 말이지만 그 시각이 정체사관을 기반으로 해서 현재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당시 총독부 박물관 주위에 있었던 일부 유학파 출신 지식인들이 미군정의 명령에 의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새출발을 했습니다.

당시 경성제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던 후지타 료사쿠 (藤田亮策),그를 이어 총독부 박물관 주임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로부터 박물관 업무를 인계받은 이가 독일 뮌헨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던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 (金載元)입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은 1920-30년대 당시 발굴된 가야고분의 유물로서 정립된 이론이고 일본은 왜가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가야지역을 찍어 고분발굴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보고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발굴보고서 작성과 연구에 일본 최고의 두뇌들을 활용했던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고고학 초기 전사가 모두 일본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고고학과 역사학은 이런 식민사관의 학맥과 끊을 수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이를 계승한 서울대 역사학 학맥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이책의 총평을 하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선 최근에 나온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서라는 점이 의의가 있습니다. 다만 중복되는 내용이 많이 발견되는 건 흠입니다.

두번째 일제의 고적발굴조사의 의사결정과정, 즉 학자와 총독부 관료들의 입장차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점입니다. 이들은 조선의 고적발굴업무에 결코 일사불란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조선의 고고학 발굴사업이 철저히 일본의 제국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겁니다. 물론 발굴목적은 조선의 ‘정체성(停滯性)’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만들어진 고대사’라는 주장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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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공부하신 작가 최예선의 세번째 책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오래전에 ‘청춘남녀 백년전 세상을 탐하다 (모요사,2010)’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기 시작한 초창기의 저작으로 생각되는데 제 서가에서 잠자다 얼마전 읽었습니다. 이 책이 대체로 알려진 공공건물 위주의 근대 건축유산을 답사하는 경우라면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은 촛점이 온전히 가정집에 맞추어져 있고 집에 대한 건축 뿐만 아니라 주거생활, 인테리어, 가구 등도 같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책의 디자인도 대단히 강렬합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의 기와지붕과 운현궁 양관(洋館)이 겹쳐진 흑백사진의 배경으로 보라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책의 디자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경관을 구성하는 건물들의 현재모습은 직접적으로 일제시대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게 현실이고, 한국의 대부분의 서양식 건물들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소위 ‘근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건물들과 도시계획 등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을 이루는 공간과 장소의 기원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건축물의 경우 궁궐이나 영사관 등 공공건물에 대부분 촛점이 맞춰져 당시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런 단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합니다.

총 380여쪽에 이르는 이책은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6장과 에필로그는 거의 집에 대한 저자의 수필로 보아도 무방하며, 건축 문화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 당시 문화계, 특히 문인들과 모던 취미 등에 대한 글들은 모두 1-5장을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즉 1920-3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은 양장을 차려입고 입식샹활을 하며 클래식을 축음기로 듣고 커피를 마시며 생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모던한 생활공간이 필요했고, 이 필요가 도시형 한옥부터 불란서 양관 그리고 문화주택에 이르는 다양한 주택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모던한 생활은 곧 서구적인 생활로 인식되어 조선의 고위관리나 귀족들이 그들의 서구취향에 맞춰 대거 서구의 가구를 외국에서 들여왔기, 정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호기심어리게 조선의 전통가구를 집에서 사용해 왔다는 겁니다.

전통과 모던의 혼성모방이 일어났고, 이에 발맞춰 종로와 을지로의 가구점 및 서양잡화수입업체들이 호황을 누렸습니다.

1945년 이전까지 주로 경성을 중심으로 운현궁을 포함해 잘 알려진 근대 가옥에 대한 건축 그리고 당시의 문화와 생활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접근법을 시도한 책으로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씨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은과모음,2011)’ 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시기가 근대가 아니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환경을 디자인, 문화적 측면에서 다루고 있으며 당시 아파트 인테리어 및 가구 등의 생활문화에 대한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소개하는 이 책이 우리 조부모 세대의 주거에 대한 글이라면 박해천 교수의 책은 국가주의 산업화 시대 주거에 대한 책으로 지금 한국전쟁을 겪으신 우리 부모세대의 주거에 대한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도 산업화 시대 집에 대한 후속작을 펴낼 예정이라고 하니 어떤 글이 나올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일제시대 건축사 및 도시사와 관련해 몇가지 언급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도시답사에 대한 글들이 많지만, 서울의 근대적 도시계획이나 일제가 만든 신도시 영등포, 흑석동 등에 대해서 저는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님의 책을 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경성 전도(大京城精圖,1936)에 대해서 처음 본 책도 김시덕 교수의 책입니다. 김교수의 도시답사 시리즈 중 첫번째 책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경성전도에 대해서 책에서 언급했듯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도판으로 출판했다고 했지만 사실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발행부수가 얼마 되지 않아 쉽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도시계획 및 일제시대 도시개발역사에 대한 선구자이셨던 서울시립대 고(故) 손정목 교수의 책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최초로 일제시대의 서울 도시개발계획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분 책이 대부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발표되었는데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도시개발계획은 그 자체로 근대화, 경제발전과 연동돼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생각할 수 없는데, 아무튼 선구적 책들이 절판되고 구할 수 없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도시경관은 사진가들과 인문학자, 문학가들의 관조의 대상이었고 그 자체로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기능했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도 현재 서울의 풍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또는 도시계획의 입장을 뛰어넘는 사는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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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ynoa 2024-01-07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모던의 시대 우리집>의 저자 최예선입니다. 책을 꼼꼼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료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근대서울 자료 중 하나인 <대경성부대관>의 내용을
보실 수 있는 링크를 적어둡니다. 근현대 도시에 관심이 많으시니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https://museum.seoul.go.kr/CHM_HOME/ebook/ecatalog.jsp?Dir=67&catimage=

혹 링크가 깨진다면 서울역사박물관>학술자료>발간도서 에서 검색해보시면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연구 자료들이 더 많이 공공화되어야 더 즐거운 연구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들의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