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이 - 취향의 테두리를 넓히는 둘만의 독서 모임
구달.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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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출판사에서 외판원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집에 책이 많은 편이었다. 그 책들을 열심히 읽는 나를 보고 주변에선 '책 좋아하는 아이', '책 많이 읽는 아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 책들의 태반이 동화책이나 위인전 같은 아동 도서였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취향에 맞는 독서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랬던 내가 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눈뜬 건 고등학교 때 만난 한 친구 덕분이다. 


더 이상 아동 도서를 읽지는 않았지만 주로 청소년 필독서나 '00대 추천 도서' 목록에 오른 책 위주로 독서를 하고 있던 나와 달리, 그 친구는 글로리아 스타이넘부터 아메리칸 원주민의 책까지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그 친구의 영향으로 곧바로 독서 취향이 바뀌...지는 않았지만(당시 내 눈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는 독서가 아니라 입시였으므로), 대학에 입학하고 전보다 여유롭게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이십 대 때 겨우 만난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아메리칸 원주민의 세계를 십 대 때 만난 친구의 심정은 어땠는지도 뒤늦게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 이후로는 책 이야기를 주고 받을 만한 '실친'을 만난 적이 없다. 대신 그런 '인친'은 수없이 많으므로 아쉬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에세이스트 구달과 번역가 이지수의 독서 에세이집 <읽는 사이>를 읽으며 부러움을 조금(아니 많이) 느낀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실친'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구달 작가와 이지수 작가는 출판사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둘 다 퇴사하고 각각 에세이스트와 번역가로 다른 길을 걷게 된 후에도 우정을 이어 가고 있다(책 좋아하는 '실친'을 만나는 방법 중 하나는 출판사 입사인지도...). 두 사람을 잇는 공통점은 물론 '책'인데, 똑같이 아메리카노 커피를 좋아해도 사계절 내내 '아아'만 마시는 사람과 '뜨아'만 마시는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똑같이 책을 좋아해도 러시아 문학을 애정하는 구달 작가와 일본 문학을 애정하는 이지수 작가의 독서 취향은 서로 달랐다.


좋아하는 책만 읽어도 나쁠 건 없지만 좋아하는 책 말고도 좋은 책이 더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은, 마침 팬데믹 시기라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해서, 각자의 책장에서 고른 책 열 권을 택배로 부쳐서 바꿔 읽는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이들이 고른 책 중에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같은 벽돌책도 있고 <정년이>, <노견일기> 같은 만화책도 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고 친구와 함께 별을 보러 가고, <김이나의 작사법>를 읽고 작사에 도전하는 대목을 읽으면서는 이 분들이 지향하는 독서의 경지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다(존경합니다). 이런 독서 모임 시리즈, 계속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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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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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디 미카코의 책을 연달아 두 권 읽었다. 브래디 미카코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껴 읽고 싶었는데, 데뷔작이라고 하니 다른 책들을 읽기 전에 먼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는 1965년생인 브래디 미카코가 마흔 살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한국어판은 초판에 새로운 글을 추가해 2017년에 출간한 문고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예전의 견해가 나중에 바뀌는 것을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인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이 책은 일본인 여성인 브래디 미카코가 펑크록에 심취해 영국으로 이주한 후 아일랜드계 영국인 남성과 결혼해 살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저자가 사는 브라이튼은 영국 최고의 휴양도시로, 고가의 별장을 수채씩 거느린 부유층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빈곤층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성소수자의 성지라서 LGBTQ도 많이 살고, 저자처럼 다른 나라에서 이민해 온 사람들도 많이 산다. 주민들의 인종, 계급, 종교, 성정체성 등이 다양한 만큼 그에 따른 갈등이나 충돌도 잦다.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역시 계급 갈등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을 비난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빈곤층을 위한 공영 아파트에 사는 것은 비난하지 않는다. 부유한 백인들에게 멸시 당하는 가난한 백인들은 유색인, 이민자, 성소수자 등을 차별하거나 혐오하며 사회 갈등을 증폭시킨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거창한 정치나 어려운 학문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이 일상에서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알기 쉽게 전달한다.


저자가 사랑하는 음악, 그중에서도 펑크 록, 그중에서도 섹스 피스톨즈에 대한 애정을 유감 없이 드러낸 대목들도 인상적이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멤버가 상업적인 리얼리티 쇼에 나오자 언론은 물론이고 팬들조차 그를 비난했지만, 저자는 그가 비난 받을 걸 알면서도 방송에 출연한 것이 솔직하고 용감하다는 점에서 펑크 록의 정신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그와는 반대로 비난 받는 게 두려워서 가식 떨고 안전한 선택만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데, 많이 찔렸다(ㅠㅠ).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국인이지만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여기지 않는 남편 이야기, 그런 남편의 가족들과 친구들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저자 자신이 원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도 하고, 이웃에 워낙 복잡한 가정사를 지닌 아이들이 많이 살아서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 책을 출간하고 몇 년 후에 아이를 낳은 것도 드라마틱하다. 심지어 보육사가 되어 다른 부모들의 아이들도 돌보게 되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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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3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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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 - 못 쓰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땅콩문고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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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모닝 페이지를 쓰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일단 원래 기상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기가 어렵고, 일어나서 바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기가 힘들고, 책상 앞에 앉는 데까지 성공해도 오로지 내 감정이나 생각만으로 종이 한 장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 혹시 내 글쓰기 습관이 문제인가 싶어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살펴 보다가 만난 책이 김정선의 <열 문장 쓰는 법>이다. 한 문장을 다섯 문장, 열 문장으로 늘려서 종국에는 글 한 편을 완성하게 도와주는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큰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팁 중 하나가 단문 쓰기인데, 반대로 저자는 단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단문은 글쓰기에 익숙한 고수들에게도 어려운 테크닉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해본 경험이 적은 초보자라면 초고 단계에서는 길게 이어지는 장문을 쓰고 퇴고하는 과정에서 장문을 단문으로 고치는 편이 낫다. 긴 문장을 끊지 않고 이어서 쓰는 연습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즉 '나만의 것'을 발굴하고 표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장의 정합성이나 글 전체의 완성도 등을 신경 쓰지 않고 무의식에 가까운 생각이나 감정을 꺼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내가 요즘 시도하는 모닝 페이지 쓰기와도 닮았다. 


책에는 교정 교열 전문가인 저자의 매끄럽게 잘 읽히는 문장 쓰는 팁도 나온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팁 첫 번째는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그러나(하지만) 같은 접속부사와 이, 그, 저 같은 지시대명사를 되도록 안 쓰는 것. 두 번째는 체언 위주의 문장 쓰는 습관을 지양하고 용언 위주의 문장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문장의 어미를 전부 '-(이)다'로 처리하면 독자가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읽는 맛이 없다는 지적도 기억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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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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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 표제작 <스톤 매트리스>부터 읽었는데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풍의 범죄 스릴러 소설이라서 잘 읽힐뿐더러, 단편 하나를 즐겁게 읽고 나니 다른 단편들에 대한 마음의 장벽이 낮아져서 결과적으로 이 책을 완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단편 <스톤 매트리스>는 중년 여인 버나가 북극으로 향하는 크루즈 선에 올랐다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면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을 그린다. 얼마 전 세 번째 남편과 사별한 버나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 크루즈 선에 오른다. 마침 외모도 잘생기고 태도도 신사적인 밥이라는 남자가 버나에게 호감을 드러내는데 버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밥은 50년 전 버나가 학생일 때 잠깐 만났던 남자로, 이후 버나의 삶을 크게 바꿨다. 만약 당신이라면 그런 남자를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결말까지 읽고 나면 <스톤 매트리스>라는 제목의 의미가 더욱 서늘하게 느껴질 것이다.


책의 초반에 실린 세 편의 단편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는 연작 소설이다. <알핀랜드>의 주인공 콘스턴스는 '알핀랜드'라는 세계를 무대로 하는 창작 판타지 소설을 써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콘스턴스는 자신의 소설 곳곳에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봉인해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전 애인 개빈이다. <돌아온 자>의 주인공 개빈은 한때는 촉망 받는 예술가였지만 현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데다가 전 애인 콘스턴스가 너무 잘나가서 비참한 기분을 느끼는 상태다. 이 와중에 '알핀랜드'에 관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 자신을 인터뷰하러 와서는 '알핀랜드'에 개빈이 등장한다고 알려준다. <다크 레이디>는 개빈의 또 다른 애인이자 뮤즈였던 마저리의 이야기를 통해 창작이 복수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에 수록된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요양 시설에 노인 혐오 시위대가 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다. 요양 시설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시위대로 봉쇄된 건물 안에서 어떻게든 생존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다들 몸이 불편하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체력이 부족하거나 해서 좀처럼 버티지 못한다. 태어난 이상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리고 죽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를 혐오하거나 차별의 근거로 삼는 세상이 너무나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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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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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우다영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를 읽고 이 작가의 작품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읽은 책이 우다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다. 두 책을 읽어보니 <그러나 누군가는>이 SF와 판타지 소설의 사이에 있다면 <앨리스 앨리스>는 이른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앨리스 앨리스>의 경우, 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 인물들이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작용하는 법칙이나 원리가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은 순문학답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들이 어떤 사건이나 인식을 계기로 무의식이나 평행 우주, 사후 세계 등 현실과 다른 시공간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 현실과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실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점은 순문학이라기보다 장르문학 같다. 나는 어쩌다 보니 우다영 작가의 작품을 역순으로 읽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어온 독자들은 <그러나 누군가는>을 읽고 다소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2020년 현대문학상 후보작이었던 <창모>다. 화자인 '나'는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창모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창모를 아는 사람들은 '나'와 창모가 친한 사이라고 밝히면 의외라며 놀라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사람과 친하게 지내느냐며 두려워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창모가 그동안 벌인 악행들을 알고 있고 사람들이 왜 그를 멀리 하는지 이해하지만, '나'는 이른바 악인으로 불리는 사람을 악하게 대하는 것 역시 악행이다, 상대가 악인일수록 선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믿음을 흔드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는데...


맨처음에 실린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도 좋았다. 화자인 '나'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서 다닌 종교 단체에서 자주 봤던 은령과 고등학교에서 재회한다. '나'는 성적도 우수하고 친구도 많은 은령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도 모르는 체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임을 확인하고 방과 후 단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종교 단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날 이후 사이가 급격히 멀어진다. 


문제의 대화에서 은령은 '나'에게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이라고 믿어왔던 부분이 실은 그저 뇌의 연산 작용 끝에 마련된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은령의 말을 '마음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끝내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령이 실제로 의미한 바는 '우리가 마음의 작용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은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이었고, 은령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서 증명한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만약 '나'가 은령을 오해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미래가 과거로 틈입해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이야기도 SF 같고 판타지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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