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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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조앤 디디온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버클리 대학교 재학 시절 <보그>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전에서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에디터 경력을 시작했고, 1960년대에는 '뉴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제시하며 '작가들의 작가'로 인정받았다. 사적으로는 <타임>지 기자였던 존 그레고리 던과 결혼해 딸 퀸타나를 키우며 단란한 가정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연속으로 불운이 닥쳤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딸 퀸타나가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입원해 심란한 가운데 남편 존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이 책은 존이 사망한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003년 12월 30일. 전 세계가 연말 분위기로 들썩이는 가운데 저자 부부는 입원 중인 딸을 면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저자는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했고 남편은 평소에 늘 앉던 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식사 준비를 마친 저자가 남편을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서 자리에 가보니 남편이 쓰러져 있었다. 서둘러 구급차를 부르고 최대한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남편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단 몇 시간 만에 일어났다. '삶은 순간에 변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고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남편 사망 당시에도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딸 퀸타나는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고칠 방법을 찾아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야 할지 말지, 알린다면 누가 어떻게 알리는 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이십 대 시절부터 기자로서 작가로서 세상 만사에 대해 글을 썼던 저자였지만, 남편의 죽음과 딸의 병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길이 없었다. 부모의 죽음을 이미 경험했고 상실의 아픔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백년해로를 약속한 남편의 죽음과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아야 마땅한 딸의 불치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저자에게 존은 그냥 남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기자로 만나서 둘 다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둘 다 글 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서로가 겪는 직업적인 고충이나 정신적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상대방의 글을 가장 먼저 읽고 날카롭게 비판 또는 충고해 주기도 했고, 더 나은 글을 쓰도록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남편의 죽음은 곧 자신의 첫 번째 독자이자 편집자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남편 없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 남편이 읽지 못하는 글을 쓰는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썼다. "정신을 흩트려 놓는 비애의 강력한 힘"에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했다. 과거의 자신처럼 상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라고 자신하는 (오만한) 사람들에게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더욱 더 집착적으로 썼다. 슬프게도 이 책이 출간된 즈음에 딸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저자는 딸을 잃은 경험 또한 글로 써서 <푸른 밤>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저자의 결혼 생활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더욱 자세히 그려져 있는 책이므로 함께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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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블루 1
후지마키 타다토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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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만화 <쿠로코의 농구>, <로봇X레이저빔>의 작가 후지마키 타다토시의 신작이 나왔다. 제목은 <킬 블루>. 이야기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무서운 외모의 킬러 오오가미 쥬조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수수께끼의 생물 병기에 찔려서 중학생의 모습이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겉모습은 중학생이지만 속은 애 딸린 이혼남이자 무시무시한 킬러인 쥬조는 그렇게 팔자에 없는 줄 알았던 학교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만화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쥬조가 자신의 내면이 '아저씨X킬러'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라고 여겼던 소심한 범생이가 되어가는 장면들이다. 남학생들이 시비를 걸 때마다 속으로는 한 방 먹이고 싶지만 전문 킬러가 아이들을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면 안 되니까 화를 억누르다 보니 소심한 놈으로 오해받고, 딸 같은 여학생들에게 추근대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여학생들의 호감을 산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웃겼다.


어릴 때는 공부와 담을 쌓았던 쥬조가 어른이 되어 공부를 하면서 갑자기 공부의 재미에 눈 뜨는 에피소드도 재미있었다. 나 역시 쥬조와 비슷한 삼십 대 후반으로서, 학창 시절에는 왜 배우나 싶었던 과목들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할 때가 종종 있는데, 쥬조 역시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을 보니 공감이 갔다. 쥬조의 학교 생활을 중심으로 소소한 에피소드가 주로 펼쳐지는가 싶었는데, 1권 마지막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새로운 인물들의 추가가 예고되어 다음 전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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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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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 힘든 나날을 보내던 수연은 세들어 살던 다가구 주택에 불이 난 것을 핑계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엄마가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 고향도 아니고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엄마는 수연에게 자신이 밥을 해주는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때로는 식당 일을 거들고 심부름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던 수연은 일 문제로 상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이주란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에는 일견 별일 없이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별일이 없지 않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의 수연은 고독한 타향 살이와 회사 생활로 인해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다. <사람들은>의 두 은영은 어머니와 사별하고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른>의 '나'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혈연도 아닌 아줌마로부터 깊은 위로를 받는다. <여름밤>의 상은은 고단한 시절을 함께 지나온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쓸쓸해 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위해>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 살았던 수현은 '조용히 살라'는 할머니의 당부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표현을 자제하며 자랐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가난했던 수현은 어른이 되고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서 점차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현은 옆집 아이 유리가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보여서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처음에는 도움을 거부했던 유리가 점점 수현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서 둘만의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이어지는 단편 <이 세상 사람>은 가정 폭력 피해자인 '나'가 캠핑장에 갔다가 어떤 장면을 목격하면서 경험하는 감정을 그린다. <서울의 저녁>은 예전에는 한 집에서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더는 볼 수 없는 친구를 그리워 하는 내용이고, <파주에 있는>은 남편이 죽은 후 대학 후배의 집에서 지내는 현경이 첫사랑의 메일을 받고 재회하는 과정을 그린다. 어느 단편도 서사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편이지만, 대체로 이별 또는 상실이 원인으로 제시되며, 재회 또는 귀향으로 과정이 전개되며, 공감 또는 회복으로 결말이 난다. 어떻게 보면 심심하고 뻔한데 왠지 모르게 좋고, 계속 따라 읽게 되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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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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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별명은 '사랑의 신'이다. 어느 모임, 어느 집단에 속하든 누군가의 구애를 받고 끊임없이 연애를 하기 때문이다. 오월의 어느 밤에도 그랬다. 주희는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테이블에 둘러 앉게 된 사람들 중 한 명인 현우와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주희의 관심은 현우가 아니라 다른 두 사람 -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에게 있었다. 이들은 '되기 전 모임'이라는 일종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고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데, 주희는 다른 두 언니를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우를 이용한다. 현우는 이를 모르지 않았고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점점 그런 주희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김화진 작가의 연작 소설 <공동의 이동 경로>는 글쓰기 모임의 네 멤버 - 주희, 솔아, 지원, 현우- 가 각각 주인공인 네 편의 단편을 포함해 총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의 신>의 뒤를 잇는 <나의 작은 친구에게>는 타투이스트인 친구 지원을 좋아하는 솔아가 주인공이다. 솔아는 지원이 해준 공룡 문신이 사라지는 사건을 겪으며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나 여기 있어>는 솔아의 마음을 사실은 알고 있는 지원이 주인공이다. 지원은 우울증을 앓았던 친구 효진이 사고로 죽은 후 자신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와 준 솔아에게 고마운 감정을 품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이무기 애인>은 주희의 애인인 현우의 이야기를 그린다. 기자 지망생이었던 현우는 '되기 전 모임' 멤버 중에서 글쓰기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자신이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주희의 애인은 자신이지만, 사실 주희의 관심은 솔아와 지원에게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주희와 헤어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 주희가 원망스럽다. 마지막 단편 <공룡의 이동 경로>는 지원이 솔아에게 해준 공룡 문신 '피망이'가 주인공이다. 솔아는 문신조차 영원하지 않다며 한탄했지만, 사라진 문신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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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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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혼자서 딸 해민을 키우는 미애는 친구 주희의 빈 아파트로 들어가 살게 된다. 단지 내에서 어린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서 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미애는 해민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간다. 독서 모임 멤버들은 미애와 해민이 그들과 같은 아파트 주민일 거라고 생각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지만, 점차 미애와 해민이 그들과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애와 해민을 따돌린다. 그런 와중에 독서 모임의 주축인 선우의 딸 세아와 해민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서 가뜩이나 안 좋은 미애의 상황이 더욱 더 나빠진다.


김혜진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부동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집도 없고 남편도 없이 혼자서 딸을 키우는 미애의 이야기를 그린 <미애>를 시작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가족 중 그 누구보다 집을 팔고 싶어 안달이 난 소녀 세미가 나오는 <20세기 아이>,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나서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만옥과 순미의 관계를 그린 <목화맨션>,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남터미널>, 여섯 채의 빌라를 소유한 집주인을 대신해 세입자와 건물을 관리하는 여자의 일상을 그린 <산무동 320-1번지> 등이 그렇다.


여섯 번째 단편부터는 조금 다르다. <자전거와 세계>는 치과 직원인 현지가 교통 사고로 입원한 할머니의 보상 처리 과정을 지켜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내용이고, <사랑하는 미래>는 전시관 직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이 연하의 중국계 캐나다인 남성과 연애를 시작하며 일상의 변화를 겪는 과정을 그린다. 표제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입주 청소 일을 하는 인선이 경옥과 함께 일하면서 마음의 문을 여는 내용이다. 모든 단편이 한국의 주거 또는 노동 문제를 다뤄서 읽는 마음이 가볍지 않지만, 힘든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데다가 약간의 희망도 보여줘서 책을 다 읽고 덮는 마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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