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의 혼잣말 12 - 카니발 플러스
휴우가 나츠 지음, 시노 토우코 그림, 김예진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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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 요즘은 '유튜브와 알고리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다. 최근 유튜브에서 '케데헌' 헌트릭스 팀이 '지미 팰런 쇼'에 출연한 영상을 본 이후로 외국인들의 '케데헌' 리액션 영상이 내 알고리즘을 잠식했다. 그중 몇 개를 봤더니 이번에는 외국인들의 아시아 콘텐츠 리액션이 줄줄이 뜨기 시작했고, 그중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약사의 혼잣말>이 있었다. 또 몇 개를 보다 보니 <약사의 혼잣말> 원작 소설을 읽다가 만 지 한참 되었다는 게 생각이 나서 전자책을 구입해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케데헌 때문이라는 소리다(아님).


11권을 읽은 게 언제인지 찾아보니 무려 3년 전이다(2022년). 그사이 등장인물이고 내용이고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웬만큼 다 기억이 나서 신기했다(내 머리 아직은 괜찮은 듯). 12권에서 마오마오와 진시는 아직 서도에 있다. 그동안 황해(메뚜기 떼)로 인한 식량 문제 수습하랴, 서도를 다스리는 요 집안의 눈치 보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온 두 사람.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서도의 지도자였던 교쿠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후계 자리를 놓고 일어난 집안싸움에 휘말려 납치, 감금을 당하는 등 큰 고생을 치른다.


서도도 후궁만큼이나 권력 다툼이 치열한 공간이다. 11권에서 봤듯이 여기에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마오마오와 진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가려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보이기는 해도) 의관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한 마오마오의 어떤 행동 때문에 마오마오는 요 집안의 두 아이(교쿠쥰, 샤오홍)와 함께 납치를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어떤 종교를 믿는 도적떼의 습격을 당해 노예 취급을 당한다. 마오마오는 약사로서 가지고 있는 약초에 관한 지식과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진시의 품으로 돌아온다.


12권에서 마오마오만큼이나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인물이 취에다. 취에는 가오슌의 아들 바료의 아내로, 과묵하고 진중한 남편과 정반대로 말이 많고 활달하며 재주가 많아 늘 바쁘다. 그런 취에의 과거가 12권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마오마오도 매력적이지만 취에도 서사나 기술 면에서 마오마오 못지 않게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라서, 언젠가 취에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이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 보니 12권 표지의 마오마오와 샤오홍 뒤쪽에 있는 인물이 취에인 듯.) 남편인 바료와의 연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길이는 짧지만 달달함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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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와 0수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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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어른만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부모님의 기대나 학교의 규칙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한 살 한 살 차곡차곡 나이가 들어 어느새 삼십 대 후반이 되고 보니, 어른이 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지만 여전히 못하는 일도 있고, 할 수 있지만 부러 안 하는 일도 있다. 그렇게 체념과 포기를 학습하면서 점점 더 무기력하고 우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어른의 삶인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베스트셀러 <곰탕>의 작가 김영탁의 신작 장편소설 <영수와 0수>의 주인공 '영수'가 딱 그런 상태다. 바이러스와 에이아이(AI)로 인해 개인 간 거리 두기가 당연시 되고 인간의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대.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정부는 누군가 자살할 경우 가장 가까운 가족 세 명이 죗값으로 추가 노동을 하는 연좌제 페널티를 마련한다. 영수의 경우 아버지가 자살을 해서 강제로 주 6일 근무를 해야 한다. 영수는 오래 전부터 죽고 싶었지만 자신마저 죽으면 혼자 남은 엄마가 주 7일 근무를 해야 하게 되는 것이 미안해 자살을 미루고 있는 상태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수는 직장 동료 '오한'으로부터 매혹적인 제안을 받는다. 영수와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을 구입해 그에게 영수 대신 노동을 하게 하고 영수는 남몰래 자살을 하라는 것이다. 자신은 자살이라는 꿈을 이뤄서 좋고, 엄마는 주7일 노동을 안 해도 되니 좋다고 판단한 영수는 복제인간을 구입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복제인간이 자기 대신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자기를 닮은 '0수'가 하루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영수보다 먼저 '0수'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영수의 계획에 지장이 생긴다.


이 소설은 복제인간, 기억 매매 등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기술이 가능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소설이다. 하지만 바이러스, 에이아이 등 최근까지 큰 문제였거나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전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하기 싫은 일을 하느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법을 잊어서, 살고 싶은 마음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은 비현실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 이 책을 읽고 영수처럼 자기 몫의 노동을 대신 해줄 0수 같은 존재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초반부터 자살, 연좌제 페널티, 복제인간 등 삭막한 단어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 소설이 돌연 따뜻한 분위기를 띠는 대목이 있다. 자살 시도에 실패한 0수를 집으로 데려온 영수가 직접 요리를 해서 밥을 먹이는 장면이다. 평소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냉동 음식만 먹던 영수가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고 음식을 만드는 장면, 잘 먹는 0수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흐뭇한 기분을 느끼는 장면을 보면서, 남이 나에게 잘해줄 때 느끼는 기쁨도 있지만 내가 남에게 잘해줄 때 느끼는 기쁨 또한 나를 살게 하고 더 잘 살고 싶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영수가 잘해주는 대상이 영수 자신의 복제인간인 0수인 점도 흥미롭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라, 배려하라는 말은 많이 듣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 잘해라, 배려하라는 말은 안 듣는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평생 함께 지내야 하고, 누구보다 잘 이해해야 하는 대상인데 말이다. 영수의 삶이 단조롭고 지루했던 이유가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대목들도 좋았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 또는 기억하지 않기로 택한 삶이 어쩌면 우리를 체념과 포기에 적응한 어른, 무기력하고 우울한 어른으로 만드는 원흉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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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청소부 래빗홀 YA
김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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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평범함을 거부하고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별함을 짐처럼 여기고 평범함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김혜진의 소설 <어스름 청소부>의 주인공 '소요'가 그렇다. 중학생인 소요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어스름'을 보는 능력이다. 어스름이란 곰팡이나 먼지처럼 쌓이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소요네 부모님은 이 어스름을 청소하는 '어스름 청소부'로 일하고 있고, 소요도 가끔 부모님의 일을 돕는다.


소요는 어스름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옆집에 사는 '제하'가 유일한 친구인데, 사실은 제하도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제하가 가진 능력은 얼굴에 새겨진 '얼룩'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와 성격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단짝 친구 제하의 존재는 고맙지만, 소요는 내심 마음을 터놓고 사귈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요네 반에 '예나'라는 전학생이 오는데, 이 친구가 예사롭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든 많든 간에 어느 정도 어스름을 붙이고 다니기 마련인데, 예나에게는 먼지 한 톨 만큼의 어스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들킬까 봐 남들 앞에서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소요가, 어쩐 일인지 예나와 가까워지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임한다. 덕분에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되고, 서로의 비밀도 털어놓게 된다. 그 결과 얼마 후에 벌어지는 '극적인 사태' 앞에서 소요와 예나(그리고 제하도)는 서로의 특별한 능력을 십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소요는 그동안 몰랐던 과거도 알게 된다. 남들과 다른 점을 결점이나 약점으로 여기면 안 되고, 결점이나 약점이라고 여겨지는 면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더욱 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소설은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고충을 보여주는 동시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미덕을 보여준다. 어스름을 보는 능력은 없지만 어스름을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박 주무관', 소요가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 일도 아닌데 발 벗고 나서준 동네 사람들, 제하 친구들의 모습이 그렇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어스름 청소부>는 실제로 여러 장소에서 청소부로 일하시는 분들을 모델로 쓰였다고 한다.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데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직업에 빛을 비춘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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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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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스크>의 짐 캐리 성대모사를 하다가 목소리 연기에 재미를 느껴 성우가 된 손열매는 전과 다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심한 날엔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오는 증상을 겪는다. 원인은 아마도 십 년 넘게 룸메이트로 지내며 월세며 생활비를 함께 던 수미 언니(고수미)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졸지에 일자리도 잃고 룸메이트도 잃어버린 열매는 수미 언니의 고향인 완주로 간다. 처음엔 수미 언니한테 받아야 할 돈을 수미 언니 어머니한테 받을 심산이었지만, 막상 항암 치료 중인 어머니가 장의사 일과 매점 일을 병행하며 힘들게 살고 계신 모습을 보니 좀처럼 말문이 안 열린다. 


결국 열매는 수미 언니 집에서 한동안 살면서 어머니 일도 거들고 수미 언니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런데 좋게 말해 한가롭고 나쁘게 말해 아무 것도 없는 이 시골 마을 살이가 의외로 열매의 적성에 맞는다. 수미 언니 어머니가 장의사 일을 하러 나가면 가게를 지키면서 어쩌다 오는 손님 상대하며 믹스 커피를 타 드리고, 꽃과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걸어 다니며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는 순간이 때로는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즐겁다. 그렇게 열매는 외계인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옆집 남자 어저귀, 등교 거부 중인 중학생 양미, 활동이 뜸한 배우 정애라 같은 새 친구들을 사귀며 시골 생활에 적응해 간다.


<첫 여름, 완주>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답게 잘 읽히고 재미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시골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무레 요코, 오가와 이토 같은 일본의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 느낌도 나는데, 그러한 일본 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말투가 나긋나긋하고 성격도 온화한 반면, 이 소설의 주인공 열매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때로는 거친 욕도 불사하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화통해서 일본 소설보다는 한국 영화,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웃음을 유발하는 대화나 장면이 많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배우 박정민이 만든 출판사 무제에서 펴낸 '듣는 소설' 시리즈 첫 권이기도 하다. '듣는 소설' 시리즈는 시각 장애가 있는 독자들을 위해 오디오북을 먼저 펴내는 시리즈이다. 그러한 특징이 있는 소설인 만큼, 소설을 읽는 동안 각 장면을 글자가 아닌 소리로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며 읽었는데 그 재미가 쏠쏠했다. 소리뿐 아니라 냄새나 촉감 등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들을 묘사한 문장들에도 다른 소설을 읽을 때에 비해 더욱 눈길이 갔다. '듣는 소설' 덕분에 소설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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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해로외전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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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여성인 주현은 대학에서 전임 강사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친다.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이고 주현 자신도 어렵게 얻은 자리라서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다. 하지만 비슷한 경력을 지닌 남자 교수와 갈등을 빚고 학생들에게도 부정적인 강의 평가를 받으면서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 설상가상으로 주현이 애써 외면해 왔던 집안 일에도 휘말린다. 주현은 몇 년 전 발표한 소설에 자신의 큰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딸을 프랑스로 입양 보내고 막내인 아들만 남겼다는 가족사를 폭로해 집안 내에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그 후로 주현은 큰아버지 가족과 연락을 끊었는데, 어느 날 큰아버지의 아들 장훈의 아내와 연락이 닿으면서 졸지에 그들의 딸인 수아를 며칠 동안 맡게 된다. 주현은 요즘 아이답게 발랄하고 적극적인 수아의 모습을 기특하고 예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괴롭힌 학생들의 모습을 겹쳐 보며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다 우연히 수아가 '프랑스 고모'와 연락을 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프랑스 고모'가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 있어 한, 프랑스로 입양된 사촌 언니임을 직감한 주현은 애써 잊으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박민정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백년해로외전>은 박민정 작가의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에 실린 단편 <신세이다이 가옥>을 장편으로 확장한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신세이다이 가옥>은 한 여성이 외국으로 입양된 사촌 자매들의 방문을 통해 아들 딸 차별이 심했던 할머니와 한 집에 살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백년해로외전>의 프리퀄 같은 내용이다. 가부장제, 성차별이 공기처럼 존재하던 80년대에 태어나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이 만연해 있던 90년대와 2000년대에 학창 시절과 청춘을 보낸 여성이 가정 내, 직장 내 성차별에 부딪혀 산화하거나 그 직전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전작인 <미스플라이트>와도 맞닿아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주현이 자신의 집안 일이기는 해도 직계 가족의 일은 아닌 큰아버지의 가족사에 그토록 연연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는 부분이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풍조라고 하지만, 1980년대생인 나 때는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해서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고 하면 낙태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은 딸만 둘이라서 엄마가 아들 낳으라는 소리를 엄청 들었고,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지우려고 했다고 한다. 나와 내 동생이 자라는 동안에도 아들 없다는 소리를 지겹게 들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사랑 받는 외동딸인데도 유사시에는 여자라서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는 수현의 심정에 공감할 밖에. 아무튼 그렇게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등한시한 죄로 한국은 현재 출생률 세계 최저 수준. 초고령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할지.  


오랫동안 나는 야엘의 이야기가 내가 간접적으로 겪은 슬픈 가족사를 넘어서길 바랐다. 결코 가족 이야기가 왜소한 소재라서가 아니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이미지는 비단 1983년의 장선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언젠가 나도 버려지지 않을까 싶었던 두려움, 갓난아기인 수진 언니를 그런 식으로 버릴까봐 전전긍긍했던 엄마의 두려움은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대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304-5쪽)


문제의 원흉은 이 집안의 절대 권력자인 큰아버지인데, 힘도 없고 발언권도 없는 여자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는 모습도 너무 친숙하다(이 집안에서 발언권이 있는 남자는 큰아버지와 주현의 아버지, 큰아버지 아들인 장훈 정도인데, 주현의 아버지는 형 앞에서 비굴하고 장훈은 적극적인 역할을 안 한다). 야엘이 미국에 있는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이 "한국인들은 정말로 그렇게 애들을 학대해?"라고 질문하면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생부와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가해자를 변호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자신도 그들과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들을 비난하면 한국인을 비난하는 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비난 당하게 되는 모순. 왜 이런 모순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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