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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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브릿G 서포터즈 활동할 때 받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중 일부가 집에 있는데 몇 년이 넘도록 안 읽고 방치했다. 올해는 완독을 해야겠다 싶어서 며칠 전 책장에 서서 뭐부터 읽을까 생각하다가 깔끔하게(?) 1권부터 읽기로 했다. 1권의 제목은 <빛이 있는 동안>. 애거서 크리스티의 데뷔작인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이 아닌 제목도 생소한 이 책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의 1권인 이유가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 월드'를 소개하는 일종의 안내서다.


이 책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서문과 아홉 편의 단편, 각각의 단편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전에 예순여섯 편의 장편소설, 한 권의 자서전, 여섯 권의 '메리 웨스트매콧' 시리즈, 한 권의 시리아 탐험기, 시집 두 권, 시와 동화를 수록한 책 한 권, 열두 편이 넘는 연극 용 라디오용 미스터리물, 그리고 150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고 나와 있다. 크리스티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탐정은 에르퀼 푸아로이며(33편), 그 다음은 미스 마플이다(12편). 그 밖에도 다른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이 몇 편 있고, 탐정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는데, 크리스티의 초기작도 있고 전성기와 말년에 쓴 작품도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맨 섬의 황금>이다. 이 단편은 1929년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맨 섬'의 관광 부흥을 위해 기획된 대규모 보물찾기 대회의 광고문 내지는 홍보문으로서 집필되었다. 참가자들은 총 5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된 단편을 읽고 거기서 얻은 단서를 활용해 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으면 되었다. 신문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없고, 애거서 크리스티처럼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작가가 있었던 시대에 가능했던 재미와 낭만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실린 단편에는 각각 해설이 실려 있는데, 이 해설을 읽으면 해당 단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티의 생애와 작품의 특징도 알 수 있다. 가령 단편 <칼날>은 1927년 2월 한 매거진을 통해 처음 공개가 되었는데, 공개 당시 글의 마지막에 '이 작품을 쓴 후 저자가 병이 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종적을 감추었다'라는 편집자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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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의 방
김그래 지음 / 유유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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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이후의 나를 상상하면 그저 막막하다. 삼십 대 후반인 지금도 밥벌이가 힘든데 나이 들면 더 힘들겠지. 시간이 흘러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는 날이 오면 무슨 기쁨과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같은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고독과 후회로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내게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김그래 작가의 <엄마만의 방>이다.


이 책은 50대 미싱사인 엄마가 베트남 현지 공장을 감독할 전문가로 파견되면서 딸인 저자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대체로 부모보다는 자식이 유학이나 취업 등을 계기로 외국에 나가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부모 중에서도 엄마가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점이 신선했다. 오십 넘은 여자가, 가족을 놔두고 혼자서,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국에 간다고 하니 말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딸인 저자만 "오십이 넘어서도 새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멋진 일"이라고 엄마를 격려했다는 것도 K-장녀로서 무척 공감되었다.


겉으로는 엄마를 응원했지만 내심 저자도 엄마가 외국에서 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엄마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초반에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아 고생하는 듯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혼자서 여행도 다니고 현지 직원들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는 강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식들의 손을 빌려야 했던 일들을 스스로 해내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자신감도 높아졌다. 오히려 저자가 외국에서 낯선 사람들과 잘 지내는 엄마를 보면서 빈 둥지 증후군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하다.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도 엄마에게는 평생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자식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대목들도 좋았다.


책을 읽다보니 필연적으로 나의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나의 엄마도 형제자매가 많은 집의 장녀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결혼 전까지 가족들을 부양했다. 결혼 후에는 바로 임신, 출산, 육아를 하고,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로만 살았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자기만의 시간도 오롯이 가져본 적 없다. 그런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딸로서 마음이 아픈 것이 사실이지만, 엄마의 삶을 안쓰럽게만 여기고 싶지 않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다. 섣부른 연민으로 죄책감을 덮기 보다는, 엄마의 삶에서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발견하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일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일하는 중년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소위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번다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어머니들이 일과 육아, 살림, 간병 등등을 동시에 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저자의 엄마도 스무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해 30년 넘게 미싱사로 일하며 가족들을 먹이고 돌봤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을지 몰라도 계속하다 보니 전문성이 생겼고, 오십이 넘어서는 전문가로서 해외 파견 제안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여성의 노동도 경력이 된다는 것, 여성이 나이 들어서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 매우 큰 귀감이 된다. 엄마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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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4 3 2 1 1~2 세트 (양장) - 전2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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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민스크 출신의 19세 청년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뉴욕항에 도착한다. 레즈니코프는 이민자 티가 나는 러시아 식의 긴 본명 대신 당대 최고의 부호인 록펠러의 성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민국 직원이 이름을 물었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잊었는데요"라는 뜻의 이디시어 "Ikh hob fargessen(이크 호브 파게센)"이 입에서 나왔고, 이민국 직원은 그의 이름을 "이커보드 퍼거슨(Ichabod Ferguson)"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이커보드가 된 그는 어찌저찌 미국 사회에 정착해 아들 셋을 얻고 그중 하나가 스탠리다.


스탠리는 로즈라는 여자와 결혼해 아치라는 아들을 얻는다. 스탠리는 가구 및 가전제품 판매점을 운영하고, 로즈는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사진을 배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소설이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가족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다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전에 읽은 챕터에서는 스탠리의 판매점에 불이 났는데 지금 읽는 챕터에서는 무사하다든지, 이전 챕터에서 사진관을 그만뒀던 로즈가 다음 챕터에서는 계속 사진관에서 일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챕터 간의 내용이 직렬로 연결되지 않고 일종의 '평행우주'처럼 병렬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 소설의 전체 구조가 눈에 들어 왔다. 이 소설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의 1은 1부의 2가 아니라 2부의 1, 3부의 1, 4부의 1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1부의 2는 2부의 2, 3부의 2, 4부의 2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주인공 아치 퍼거슨이라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치 퍼거슨이 될 수도 있었던 네 사람(퍼거슨 1,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두 가지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다.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퍼거슨 1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네 가지 버전의 이야기에서 아치 퍼거슨은 각각 다른 삶을 산다.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와 반목하고 절연한다.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사진 작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만,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데 만족한다. 어떤 삶에서는 에이미가 아치의 연인이 되지만, 어떤 삶에서는 배 다른 남매가 된다. 유년기에는 대부분 부모와 친척들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그들이 한 선택에 의해 아치의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치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청년이 된 후에는 아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아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변화가 대부분이다.


가령 어떤 삶에서 아치는 소설을 쓰고, 어떤 삶에서는 소설 대신 신문 기사를 쓴다. 어떤 삶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삶에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떠난다. 어떤 삶에서 여성만 사랑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남성을 사랑하고, 또 어떤 삶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사랑한다. 어떤 삶에서는 성 구매자이고, 어떤 삶에서는 성 판매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삶이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일종의 가능성 또는 선택지로 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는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자 장점이다. 구성 자체가 특이하고 특별하지만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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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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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쓴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소설가들은 산문도 그렇게 자신의 소설처럼 쓰는 걸까. 황정은의 산문은 황정은의 소설 같고, 박민정의 산문은 박민정의 소설 같고, 한정현의 산문은 한정현의 소설 같고... 이번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첫 산문집 <책과 우연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김초엽의 산문은 김초엽의 소설 같구나. 장르를 불문하고 글은 글쓴이를 반영하는구나...


이를테면 소설가가 된 계기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설이 좋아서', '글쓰기 밖에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같은 주관적인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저자는 포스텍 재학 시절 과학 서평 또는 칼럼 연재로 용돈 벌이를 했고, 소설가보다는 과학 논픽션 작가가 되고 싶었으며, 한국 소설은 등단 이후에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고, 글쓰기는 몇 권의 작법서를 수험서처럼 독파하면서 익혔다, 라는 식으로 자신이 소설가가 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 객관적인 팩트를 제시한다. 이런 면이 과학도 출신 소설가다울 뿐 아니라,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김초엽 소설의 매력과 연결된다고 느꼈다.


작품의 영감을 얻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화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부터 소설보다 과학 논픽션을 더 많이 읽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서 과학 논픽션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그 질문들이 곧 소설의 영감이 된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직간접적인 체험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서 신선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소설이라는 핍진한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방법은 몇 권의 작법서를 통해 배웠다. 어떤 작법서에는 어떤 특장점이 있고 자신은 그 책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등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험 합격 수기 같기도...?)


저자는 글쓰기를 문자 그대로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글을 쓰는 유형의 작가인데, 나는 이렇게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쓰는 작가가 그렇지 않은 작가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가고, 작품에 대한 기대와 애정도 높아진다. 문과 과목이 싫어서 이과를 전공했고 과학자가 되려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사람이 소설 창작이라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희로애락을 소개하는 대목들도 좋았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책과 '우연들'이라고 썼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결국 저자가 해온 '노력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음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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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면 (여름 리커버)
김지안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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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냉면 없이 어떻게 여름을 버텼을까. 어쩌면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들만의 냉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김지안 작가의 동화 <호랭면>은 더워도 너무 더웠던 조선 시대의 어느 여름날을 배경으로 한다. 더위 때문에 힘든 건 어른도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래도 놀거리를 찾아 씩씩하게 동네를 누비던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웬 서책 한 권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책에 따르면 구범폭포라는 곳에 절대로 녹지 않는 신비로운 얼음이 있다고 한다.


노는 거라면 빠지지 않는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녹지 않는 얼음을 찾아 구범폭포로 향한다. 얼음을 찾으면 어떻게 먹을지 궁리하고 상상하느라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얼음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그들 앞에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나는데...! 이야기의 배경과 전개는 전래 동화의 그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즐겨 먹는 냉면이 나오니 반갑고 새롭다. 무엇보다도 냉면의 시원함과 감칠맛을 그림으로 표현한 솜씨가 대단하다. 집에 걸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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