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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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중에 읽어볼 만한 작품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고를 것이다. 같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계기로 친해진 재일교포 3세와 한국인,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지치고 힘든 삶에 재미라고는 인터넷 밈뿐인 외국인 노동자와 마트 직원, 고전 읽기 시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혔다가 곤경에 처하는 고교 교사,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가수 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소재 선정과 인물 설정이 탁월하다.


서늘함과 따뜻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문체도 매력적이다. <전조등>의 주인공 남자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구와 갈등을 빚거나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 없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고 적당한 여자 만나 결혼해서 살고 있다. 많은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건 전부 가졌고, 무난하고 안정된 지금의 삶이 흔들리거나 망가질 전조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다. 그를 보고 있는 독자 역시 불안하다. 야간 운전 도중 전조등 앞에 나타난 무언가 혹은 나타나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서도 흔들리거나 망가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 인생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일까.


<전조등>이 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듯한 작품이 <무겁고 높은>이다. 주인공 송희는 탄광촌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고3 여학생이다. 역도에 재미를 느껴서 열심히 해왔지만 한 번도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역도를 그만둬야 하는가. 대학 입시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운동은 하면 안 되는 건가. 역도뿐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엇에 쓰는지, 돈이 되는지 묻는다. 그걸 하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지는 안중에도 없다. 겉보기에 안정된 삶을 살면서 불안을 느끼는 <전조등>의 남자보다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아는 송희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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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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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라는 말이 참 좋다. 풀 해(解), 놓을 방(放)무언가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상상만 해도 가뿐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막막함과 불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해방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지탱할 것을 마련해야 한다. 정신적인 지지대로 삼을 만한 것 중에는 책이 있다. <해방의 밤>의 저자 은유 역시 그랬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초보 엄마 시절 유아차를 끌고 집 근처 도서관을 드나들었던 추억을 소개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도서관 책기둥 사이를 누비던 그 시절의 저자는 몇 년 후 자신이 유명 작가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자신의 정신적인 지지대가 되어준 책들을 소개한다.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 이십 대 중반에 아이 둘의 엄마가 된 저자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젊은지 몰랐다. 그랬던 저자에게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 책이다. 왜 남편의 노동, 아빠의 노동은 자상함의 발로이고 특별한 일로 찬사를 받는데 아내의 노동, 엄마의 노동은 당연한 희생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폄하되는가. 왜 아들에게는 더 주고 덜 받는 것이 당연하고 딸에게는 덜 주고 더 받는 것이 당연한가.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늘 책 안에 있었고, 책을 읽으며 저자는 현실을 곧바로 바꿀 수는 없어도 더 나은 미래가 올 때까지 버틸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어느덧 두 아이를 다 키우고 오십을 넘긴 저자는 최근 '간헐적 자취'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자식들이 자취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자신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는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자취에 관한 책은 많지만 비혼 무자녀에 살림 경험도 적은 사람이 쓴 책이 대부분인데, 만약 저자가 자취에 관한 책을 쓴다면 기혼 유자녀에 임출육 경험자이고 살림 실력도 만렙이라서 기존 책들과는 다른 내용이 나올 것 같다. 저자의 또 다른 해방기(記)를 기대해 봐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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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닌 여행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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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는 나에게 여러 의미로 특별한 작가다. 부모님이 사주시는 책이나 학교에서 읽으라고 하는 책만 읽었던 중학생 시절. 집 근처 서점에서 예쁜 표지에 혹해 <키친>, <암리타> 같은 소설을 사서 읽었는데 그 책들의 작가가 요시모토 바나나였다.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내가 몰랐던 세계가 이 책 안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일본 소설 읽기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해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오쿠다 히데오 등으로 취향을 넓혀갔다. 지금은 일본 소설을 그때만큼 열심히 읽지 않지만, 그 시절 좋아했던 작가들의 책이 나오면 옛정으로 읽곤 한다.


<여행 아닌 여행기>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2012년에 출간한 에세이집이다. 원제는 <人生の旅をゆく2>. 1권은 <매일이,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201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제목만 보고 여행 이야기도 있고 여행 아닌 이야기도 있겠구나 짐작했는데 과연 그랬다. 서민 동네 출신인 저자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시 경관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것에 불만이 많다. 새로 지은 고층 건물이 늘어나면 부동산 업자들은 좋겠지만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어울려 살아온 이웃 관계가 무너지고 소상공인의 형편도 어려워지는 등 여러모로 안 좋은 점도 많기 때문이다.


여행을 즐겨 하는 저자는 외국에 갈 때에도 그곳의 이른바 로컬 문화에 눈길이 간다. 저자가 특히 좋아하는 여행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그리스 미코노스섬, 이탈리아 카프리섬 등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도시에서 보기 힘든 자연 경관과 현지 문화가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잔 올스타즈, 오바케의 Q타로, 마쓰우라 야타로 등에 관한 글도 흥미롭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글도 있고, 동물 및 식물과 어울려 사는 삶, 육아의 기쁨과 어려움에 관한 글도 있다. '그때그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을 찬찬히 헤아리자'라는 문장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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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책이 좋아서 - 책을 지나치게 사랑해 직업으로 삼은 자들의 문득 마음이 반짝하는 이야기
김동신.신연선.정세랑 지음 / 북노마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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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한다. 출판계도 예외는 아닐 터. <하필 책이 좋아서>는 책을 너무 사랑해서 직업으로 삼은 세 사람의 희로애락을 담은 산문집이다. 공저자 중 김동신은 돌베개 출판사 디자인팀 팀장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동신사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신연선은 출판사 홍보 기획자, 온라인 서점 MD, 독서 팟캐스트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작가 출신의 프리랜서 작가다. 정세랑은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소설가다. 에세이 형식을 취하지만, 책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을 거친 세 사람의 실제 경험을 통해 한국 출판계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논픽션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는 책이다.


소설가 정세랑은 이 책에서 저자의 입장을 들려준다. 요즘은 신간이 나오면 굿즈를 제작하고 리커버를 만드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졌는데, 환경을 걱정하는 저자 입장에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소위 인기 작가가 되면 집필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원고료는 몇십 년째 그대로인 데다가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강연, 심사, 외부 원고 등 다른 일들을 하다 보면 집필에 집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작가는 연예인도 아닌데 인터넷에 사진이나 영상이 올라가 온갖 악플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고, 스토커 등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경호를 받기는 어렵다. 웹소설, AI가 쓴 소설 등 디지털 기술과의 경쟁 역시 저자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북 디자이너 김동신은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북 디자인의 세계를 상세히 소개해준다. 북 디자인 하면 책 표지 만드는 일을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 북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책 표지 만드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본문 글자를 왼끝맞춤으로 정렬할지 아니면 양끝맞춤으로 정렬할지 정하는 일부터 책등 디자인, 출판사 로고 디자인도 전부 북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라고 해서 놀랐다. 이른바 'PPT로 한 것 같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책이라는 매체는 물성을 지닌 상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미감 또는 취향을 만족하는 시각적 형태를 띠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었다.


프리랜서 작가 신연선은 출판사 홍보 기획자, 온라인 쇼핑몰 도서 MD로 일한 경험을 들려준다. 특히 온라인 쇼핑몰 도서 MD 시절의 이야기가 강렬했다. 매출 경쟁이 심한 건 온라인 서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도서 이외의 다른 품목들도 취급하는 온라인 쇼핑몰의 경우 도서 MD는 경쟁사뿐 아니라 타부서와도 경쟁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압박에 놓인다. 더욱이 이 시절은 도서정가제 시행 이전이라서 매출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그것이 나중에 죄책감으로 돌아왔다고. 그런 저자가 여전히 책의 곁에 있는 건, 출판사 재직 시절 옥상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했던 친구 정세랑의 존재 덕분이라는 대목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책읽아웃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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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 백은별 장편소설
백은별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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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수아는 유복한 부모 슬하에서 사랑받으며 자랐고 학교생활도 원만하게 하고 있다. 수아의 가장 친한 친구는 윤서인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8년 동안 단짝으로 지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윤서와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서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수아의 눈 앞에서. 윤서의 죽음은 수아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충격을 주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슬픔과 친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수아를 계속 힘들게 했다. 그래서 수아는 1년 후 자신도 윤서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설정한 시한부 인생의 결과는 무엇일까.


백은별 작가의 소설 <시한부>는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한 작품이다. 첫 번째는 제목이다. <시한부>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말기 암 같은 병에 의해 원치 않게 죽음을 앞두게 된 사람의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고 건강한 여자 중학생이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내용이라서 놀랐다. 두 번째는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중학생인데 이들 중 다수가 죽음을 바란다는 점이다. 윤서와 수아뿐 아니라 이들의 주변 친구들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해 또는 자살 충동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작가의 나이다. <시한부>를 쓴 백은별 작가는 2009년생, 올해로 15세다. 작가 자신이 교실에서 보거나 겪은 청소년들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내용이 생생하고 작가의 메시지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주인공 수아와 마찬가지로 가장 친한 친구를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수아가 느끼는 감정적 고통이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이 글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에게도 읽어주고 싶다.


"윤서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생각날 때면 많이 그리워진다. 함께한 모든 기억이 그냥 많이 소중한 기억이다. 보고 싶다. 그냥 그때로 돌아가서 한 번 더 느끼고 싶다. 다시 살아 돌아와 달라는 말도, 내가 시간을 되돌아가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겠다. 그냥 그때로 돌아가서 그때의 어리고 순수했던 감정을 한 번 더 느끼고 싶다. 더 소중하게 간직할 텐데." (270쪽) 이별 후에 드는 감정과 생각이 희미해진 후 결국 그리움만이 남는다는 걸 작가는 어떻게 알았을까. 통찰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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