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21 | 4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2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2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현정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 전, 재벌 2세 미모의 여형사와 독설 집사가 등장한다는 코믹한 설정으로 2011년 일본 서점을 휩쓸었던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미스터리 소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1권을 읽었다. 그리고 요 며칠 전까지 일주일에 걸쳐 소설 원작의 동명 드라마를 다 보았는데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었다. 1권을 읽을 때 이미 드라마가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재벌 2세 미모의 여형사 '호쇼 레이코'에 키타가와 케이코, 독설 집사 '카게야마'에 사쿠라이 쇼, 레이코의 상사 '카자마츠리'에 시이나 킷페이를 대입하여 상상하며 읽었는데 상상한 그대로였고, 독특한 인물 설정과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드라마에 잘 녹여냈다. 드라마를 보면서 딱 하나 아쉬웠던 점은 2권을 아직 보지 않아서 소설과 드라마의 차이를 비교하지 못했다는 점 정도? 그래서 얼른 2권을 읽기 시작했다.


2권을 읽어보니 전체적으로 소설과 드라마의 큰 차이는 없지만 다른 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단 각색된 부분이 몇 개 있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 설정이 바뀐 것도 있고, 트릭이 더해진 것도 있고, 에피소드는 드러내고 인상적인 부분만 차용해서 아예 다른 이야기를 만든 것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원작을 심하게 훼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각색된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보다 더 다른 점은 레이코와 카게야마, 카자마츠리의 관계다. 소설에서 레이코와 카게야마는 소위 말하는 '썸씽'이 생겨날 것 같지만 생기지 않고, 카자마츠리만 레이코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레이코와 카게야마의 관계는 소설의 그것보다 훨씬 친밀하다. 게다가 카자마츠리는 레이코가 아닌 (레이코가 재벌 2세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카게야마가 만들어낸 설정인) '호 쇼레이'라는 여인을 짝사랑한다. 소설이 독특한 인물 설정에 치우친 나머지 놓친 부분들을 드라마가 잘 잡아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드라마를 더 추천. 둘 다 볼 거라면 소설을 먼저 읽고나서 드라마를 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 라디오 키드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유쾌한 빈혈토크
김훈종 외 지음, 이크종 그림 / 더난출판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그 시절에는 이상하게도 라디오에서 떠드는 수다와 DJ가 틀어주는 음악이 없으면 하루가 텅 빈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난 지독한 '라디오 키드'였다. "'라디오 키드'가 라디오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좋아 죽던 일을 불혹이 가까운 나이까지, 거기다 돈도 받아가며 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다시 한 번 나는 행운아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p.272)



<응답하라 1994>, 이른바 '응사' 열풍이 거세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응답하라 1997>의 후속격인 이 드라마는 케이블 방송으로는 드물게 자체 최고 시청률 10%를 돌파했고, 신인이나 다름없는 배우들을 일약 스타덤에 올렸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연이어 히트를 친 비결은 무엇일까? 신인치고는 괜찮은 배우들의 연기와 케이블 드라마 특유의 통통 튀는 줄거리도 한몫 했지만, 드라마 곳곳에 3040세대의 공감을 사는 요소들이 많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한 번이라도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상민, 우지원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은 물론, 당시 유행했던 패션, 드라마, 영화, 만화 등을 회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때 고작 여덟 살이었던 나도 이럴진대, 감성 충만했던 10대, 20대였던 지금의 3040 세대에게는 얼마나 아련하고 애틋할까. 

 


'응답하라' 시리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20세기 라디오 키드>의 감성에도 쉽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SBS 라디오 PD 김훈종, 이승훈, 이재익이 쓴 이 책에는 록음악과 영화, 만화에 열광했던 유년기부터 다사다난했던 청년기, 그리고 라디오 PD로 재직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쓰여있다. 제목이 '20세기 라디오 키드'라서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일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라디오 말고도 음악, 영화, 책 등 문화 전반에 걸친 이야기가 담겨있고, 요즘 유행하는 것들보다는 과거에 유행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서 (저자들에 비해 한참 연하인 나조차도)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이재익 PD의 이름이 낯익어서 찾아봤더니, 높은  청취율을 자랑하는 '두시 탈출 컬투쇼'의 PD여서가 아니라, 몇 달 전에 들은 팟캐스트 '하루키 라디오' 1부에 출연하신 분이었다(여자친구를 위해 쓴 소설이 문학사상 장편소설상에당선되는 바람에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이야기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하도 재미있게 말씀을 하셔서 드라마틱 한 삶을 사신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책을 보니 역시 그랬다. 게다가 그 드라마틱한 삶을 소설로 쓰기까지 하셨다니 참 대단하시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 깔깔거리면서 웃을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 찍 흘릴 수도 있는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더 픽처>에서 주인공 벤은 운명을 바꾸어 유명 사진가가 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렇다면 똑같이 한 사진가의 운명을 다룬 1981년에 발표된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서는 어떨까?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 교스케는 야간에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차량 연쇄 추돌 사고를 찍은 <격돌>이라는 작품으로 '10만 분의 1의 우연'을 만났다는 극찬을 받으며 A신문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 최고상을 수상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런데 얼마 후 A신문 독자 투고란에 '카메라를 들이댈 시간이 있었으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애써야 옳지 않았느냐'는 내용의 비판적인 논조의 글이 실린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다른 이름으로 신분을 가장하며 그의 주변을 캐고 다니는 수상한 인물이 등장한다. 야마가 교스케는 어떻게 '10만 분의 1의 우연'을 만난 것일까? 그는 과연 프로 사진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개인의 욕망이 타인의 행복, 사회의 한계와 충돌하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1981년에 발표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보아도 세련되고 현대적이며, '보도의 사명과 인명 구조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를 묻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의적절하다.



사실 초반에 등장하는 신문 상의 찬반양론을 볼 때에는 신문사와 사진가 측의 입장에 더 공감했다. 보도의 사명과 예술가의 혼을 나같은 일반인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고, 그러니 그들의 말이 옳으리라고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고 당사자의 가족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는 인명 구조에 힘을 써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나같은 일반인은 신문사나 사진가와 다를 게 없다. 사진을 사진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사건과 관련이 생기면 어떨까? 혹시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애 마지막 모습을, 그것도 처참한 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신문에서 본다면 충격이 어떨까?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 중에서는 비교적 덜 유명한 편이지만 소설 자체의 무게와 문제 의식은 다른 작품들에 뒤지지 않는다. 팩트를 위시한 저널리즘과 예술을 가장한 개인의 공명심은 생명의 소중함과 비길 것도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리나라 방송에서도 남자 아이돌이나 개그맨들이 종종 여장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본 방송에서는 아예 여장을 전문으로 하는 남자 연예인, 이른바 '여장가(女裝家)'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미와 아키히로나 마츠코 디럭스, 미츠 맹그로브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다. 왜 여장을 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연예인으로서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여성의 외모를 동경하거나 여성의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유야 어찌됐든 굳이 쉽고 편한 길을 두고 여장이라는 불편한 길을 택하기까지는 남모를 고민과 갈등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애초에 남성과 여성, 단 두 개뿐인 성 구분과, 남성은 남성의, 여성은 여성의 외모를 갖추어야한다는 사회적 의식부터가 폭력이라면 폭력이겠지만.

 

 

얼마전 출간된 황정은의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주인공 앨리시어도 여장 남자다. 소설에 제시된 단서들로만 미루어 볼 때 그가 여성에 대한 동경이나 여성적인 성 정체성 때문에 여장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어린시절, 아니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의 주위에 자욱히 퍼져있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앨리시어와 그의 어린 동생을 때렸다. 두 형제가 뭘 잘못해서 훈육의 차원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기분이 안 좋아서, 눈초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등등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가며 때렸다. 이웃은 물론 앨리시어의 다른 가족들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폭력은 앨리시어네 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두 형제는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했다. 두 형제의 유일한 친구인 고미도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동네 주민들은 키우던 개를 해마다 잡아먹었으며, 재개발 이후 땅값이 치솟을 생각에 멀쩡한 집을 새로 보수하고, 살지도 않는 가족을 사는 것처럼 위장하는 식의 거짓도 불사했다. 물리적인 폭력은 물론 거짓, 기만, 묵인 등 정신적인 폭력까지, 앨리시어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비정상적인 구조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폭력이 그가 여장 남자가 된 절대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에게 맞서 복수할 계획을 세우던 그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겠는가. 그렇다면 그를 무너트린 건 폭력보다도 더 무서운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의 전 부인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을 찾아간 앨리시어. 그 우연한 행동이 다른 우연을 줄줄이 낳아 앨리시어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낙을 앗아갈 줄 알았을까. 왜 하필 그 날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물어도 답해주는 이는 없다. 인생이라는 베틀의 북을 움직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운명이고,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좌우하는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시키고 엮는 건 하늘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운명 그리고 하늘은 그렇게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인간이 폭력적인 건 그 때문이다. 어머니의 존재 자체를 없애고자 했던 앨리시어가 되레 여자의 모습을 뒤집어쓰고[女裝] 그토록 증오하던 어머니로 되살아난 건 그런 깨달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편치고는 짧디 짧은 이 소설을 읽고 이다지도 무거운 마음이 드는 건,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리라.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어머니에게서 똑같이 폭력을 당할 운명,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처럼 똑같은 무시와 냉대를 받을 운명...... 이게 어디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던가. 내가 당했으니까 너도 당해야 한다, 그런 부모를 두었으니 어쩔 수 없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삶을 결정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알레고리는 이 사회에도 넘쳐난다. 앨리스씨를 그 누가 야만적이라고 떳떳이 욕할 수 있으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바로 그가 억지로 떠밀려 들어간 '이상한 나라'인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황정은 작가를 알게된 건 '창비 라디오 책다방'보다 먼저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통해서였다. 그 때만 해도 한국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았는데, 영화든 책이든 깐깐하기로 소문난 이동진 DJ가 황정은 작가를 하도 강력하게 추천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게 되었다. <헌법의 풍경>, <욕망해도 괜찮아> 등을 쓴 김두식 교수님이 진행한다고 해서 듣기 시작했는데, 같이 진행하는 분의 목소리가 낭랑하니 예뻐서 누구일까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다름아닌 황정은 작가였다. 이거슨 운명이다, 라는 생각에 그날부로 황정은 작가의 책을 샀는데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기대가 커서 실망하면 어쩌나, 목소리에 속은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황정은 작가의 신간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나왔다. 이 책을 읽으려면 먼저 전에 산 책들을 읽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고 <백의 그림자>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아, 이 소설 정말 좋다.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에 비하면 상당히 얇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금방 읽기는 했다), 다 읽고나니 잘 만들어진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는 지극히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서 소설 한 편을 읽고도 두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잘난 곳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특별하고 로맨틱하게 느껴지는지. 인기 드라마나 영화 속 인스턴트 사랑에 익숙하던 내 입에 누군가가 공들여 키운 유기농 채소가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동진 DJ가 강력추천했는지, 황정은 작가의 담담한 목소리와 말씨가 그토록 매력적으로 들렸는지 알 것 같다. 그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현실의 복사판이라는 점도 좋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몰린 전자상가, 그 안에서 개미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슬럼'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나고자란 남자...... '그림자'라는 소재는 등장인물들을 이어주는 화제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의 처지를 일컫는 은유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저께 밤에 이 소설을 읽고 곧이어 어젯밤에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었는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이 소설에 비해 책 자체는 얇지만 무게감은 더 묵직하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두운 '그림자'보다야 '앨리스씨'가 훨씬 가벼울 듯 한데 말이다. 정확한 이유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창비 라디오 책다방' 내용으로 짐작건대 작가 자신이 사회 문제에 전보다 관심을 가지고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물론 황정은 작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백의 그림자>에서도 엿보인다). 아무래도 황정은 작가를 오래오래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21 | 4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