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약해서 샀는데 초판 3쇄다. 빠르게 주문했다고 생각했는데 1쇄가 아니라니. 1쇄 받으신 분들 부럽고요... 어젯밤에 도착한 책을 오늘 오전에 읽었다. 두께는 얇지만 단숨에 후루룩 읽을 만한 내용이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 찬찬히 읽어보면 좋을 내용이라서 앞으로 여러 번 정독하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여행 갈 때 가지고 가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글 한 편, 숙소에서 시 한 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좋을 듯. 그런 날이 언제쯤 오려나.


전체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빠르게 훑다가 눈길이 멈춘 대목은 한강 작가님의 하루 루틴이다. 글 제목이 <출간 후에>이고 글 내용 중에 <작별하지 않는다>가 여러 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후에 지키신 루틴인 듯하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44쪽)


아무리 전업 작가라고 해도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으신다니 너무 대단하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는 기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하신다는 것도 놀랍다. 소설도 안 쓰면서 운동량은 훨씬 적은 나... 반성한다. 이 시절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선유도공원의 폐허 같은 구조물들과 초록 숲 사이를 걷다 돌아오기도 했다"라고 쓰셨는데(43쪽) 나도 가봐야지. "폐허 같은 구조물"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


다음 글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에 지키려고 노력하신 루틴이 나온다.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61쪽)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앞의 루틴에서 '읽기'가 '쓰기'로 바뀐 것 외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매일의 중심 활동이 읽기이든 쓰기이든 간에 그러한 활동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본받을 만하다. 커피가 아닌 '홍차'를 드신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홍차도 종류가 많은데 어떤 홍차 드시는지 궁금하고요... 나도 이제 슬슬 커피 줄이자(라고 맨날 말만 하면서 오늘 벌써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신 나. 반성한다...).


루틴 이야기가 (나에게) 워낙 인상적이라서 루틴 이야기를 길게 썼지만 루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고,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미발표 시, 산문, 정원 일기 등도 실려 있다.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쓴 다른 형태의 글(들)인데, 책 전체로 보면 이사를 앞두고 그동안 자신이 쓴 시들을 모아서 손수 시집을 엮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했던 아홉 살 여자아이가 그 후에도 열심히 소설과 시, 산문을 써서 마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자기 명의의 집을 사고, 그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을 기쁜 마음으로 가꾸는 '전개'가 소설처럼도 읽히고 영화처럼도 보인다.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마취 상태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외부에서 볼 때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에서 느끼는 상태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여도 내면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아도 내면은 행복한 사람이 있다. 둘 중 하나의 상태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순수의 시대>, <여름> 등을 쓴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이 192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반마취상태>는 전자와 후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수작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주인공의 가족 구성을 정확하게 이해해 두면 좋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 번 이혼한 여자다(당시 뉴욕 상류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안좋았는지는 <순수의 시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폴린의 첫 번째 남편 아서 와이언트는 '뉴욕 구혈통' 출신에 외모도 출중하지만 무직이고 음주와 도박으로 아내의 돈을 축내기 일쑤였다. 결국 아서가 사촌 엘리너와 몰래 만나는 걸 폴린에게 들키면서 이혼을 하게 되었다. 폴린의 두 번째 남편은 폴린의 이혼을 도와준 변호사 덱스터 맨퍼드로 지독한 일 중독자다.


폴린은 아서와의 사이에서 아들 짐을, 덱스터와의 사이에서 딸 노나를 얻었다. 이혼-재혼 가정이지만, 폴린과 폴린의 전 남편과 아들 짐, 며느리 리타, 폴린의 현 남편 덱스터와 딸 노나는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서로를 아끼며 친하게 지낸다. 문제는 짐-리타 부부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서 불거진다. 결혼 전부터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리타는 짐과의 결혼 생활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짐과 이혼한 후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게 된 폴린과 덱스터, 노나는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짐에게서 마음이 떠난 리타는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보면 폴린과 덱스터, 노나가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짐을 위하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폴린과 덱스터, 노나에게는 각각의 속내가 따로 있다. 특히 폴린은 자신도 이혼을 했는데 같은 여성으로서 리타의 이혼을 말리는 게 말이 되나 싶다. 사실 폴린은 소설 곳곳에서 이중적,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다. 폴린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산아 제한과 출산 장려처럼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동시에 옹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 이중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저자가 소설의 제목인 <반마취 상태>라는 단어를 통해 일종의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에 따르면 반마취 상태는 '출산하는 여성에게 모르핀과 스코폴라민을 혼합한 진통제를 주사하여 산고를 줄일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출산 자체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하는 의학 기술'을 뜻하며, 실제로 1920년대 미국 뉴욕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 반마취 상태 분만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도입부의 리타의 출산 장면에서 폴린이 반마취 상태 분만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린으로서는 출산을 먼저 경험한 여성으로서 리타가 느낄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폴린의 캐릭터로 미루어 봤을 때 며느리 걱정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깨인' 시어머니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깨인' 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리타의 이혼을 반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뉴욕의 상류층 가족이지만 며느리 하나 빠진다고 휘청거리는 모습은, 역으로 이 가족이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가족 중에 가장 젊고 앞날이 창창한 노나가 결말에 이르러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 생을 마무리하는 게 낫다"라고 절규했을까. 결국 돈이나 지위나 결혼,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은 남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마취제인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베트의 만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5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베트의 만찬>. 오랫동안 영화 제목으로 알았는데 최근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되었기에 반가워하며 구입했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훌륭하면 영화로 제작되고 그 제목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기까지 했을까. 일단 소설부터 읽고 나중에 영화도 꼭 보기로 다짐했다. 책을 펼쳐보니 <바베트의 만찬> 외에 네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설을 읽기 전에 작가 이력부터 읽었는데 이력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자크 디네센(본명 카렌 블릭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29세에 남작 폰 블릭센과 결혼해 남작부인이 되었고, 남편을 따라 케냐로 이주해 대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남편에게 옮은 매독 때문에 남은 생 내내 투병했다.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출간을 시도했지만 덴마크와 영국에서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한 여성 작가가 이자크 디네센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미국의 출판사와 연결해 주었고(여돕여), 이후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책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덴마크 문단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어째서...).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도 이자크 디네센이 썼다. 근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 즉 실화라고. 본명인 카렌 대신 이자크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남성의 이름으로 낸 책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제작 <바베트의 만찬>은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주인공 자매는 목사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을 해왔다. 젊을 때는 자매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성한 노랫소리에 반해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결국 자매는 아무와도 맺어지지 않고 오로지 신만을 섬기며 수녀님처럼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는 친척의 부탁으로 프랑스에서 온 여인 바베트를 식객으로 맞게 된다. 친척에 따르면 바베트는 파리의 유명한 요리사였는데 혁명으로 집과 일터, 가족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세 여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얼마 전 복권에 당첨되어 큰 돈을 벌게 된 바베트가 자매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상차림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면서 긴장이 발생한다. 


이어지는 단편 <템페스트>의 내용도 흥미롭다. 배우를 꿈꾸는 말리는 쇠렌센이라는 연극 연출자의 눈에 띄어 셰익스피어의 연극 <템페스트>의 에어리얼 역을 맡게 된다. 몇 달에 걸쳐 열심히 연습한 말리는 공연을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 직전에 이르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말리가 용감하게 나서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배의 난파를 막은 것이 알려지자 배의 주인이 말리를 자택으로 초대하고 며느리감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여성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두 남자와 엮이면서 원래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를 좋아한다. 뭔가 읽고 싶은데 호흡이 긴 글을 읽을 기분은 아닌 때, 비상시를 대비해 쟁여둔 간식을 쏠랑쏠랑 빼먹듯, 그동안 사놓은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 중 눈길이 가는 한 권을 골라 읽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정용준의 <저스트 키딩>을 읽은 것도 그런 때였다. 명색이 책 좋아하는 사람인데, OTT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뒤늦게 넷플릭스 드라마 <데드 투 미>에 푹 빠졌다)와 유튜브(일본 여성 코미디언 콤비 하리센본의 채널을 열심히 정주행 중이다)를 보느라 하루에 책 읽는 시간이 30분도 안 되는 요즘... 이런 생활을 반성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열(심히) 독(서하는) 모드로 진입하기에 앞서 일종의 예열 차원에서 고른 책이 이 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그동안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를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총 열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다. 내용도 안온, 다정, 무해 이런 느낌이 아니고, 세신사와 학교폭력 피해자, 죽은 사람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펜션에 굳이 찾아온 손님과 펜션 주인, 새벽 근무 중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수상한 손님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만 보아도 다음 전개가 쉽게 예상되지 않고, 예상이 되어도 그 예상이 기분 좋게 깨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장르도 드라마부터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하다.

표제작 <저스트 키딩>은 술술 읽히는 내용이지만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그저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사건의 발단으로 묘사되는 후반부의 어떤 사건은, 실제로 최근에 인터넷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어떤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이런 소설을 '그저 소설'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 문학동네 청소년 76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 "십 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하루 중 몇 시간을 공부하는 지가 대학 간판을 결정한다 같은 말에 세뇌되어 당장 하고 싶은 일, 그때 아니면 못할 일을 포기하거나 대학 입학 이후로 미뤄야 했던 그 시절을 반복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오! 사랑>,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 등을 쓴 조우리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의 주인공 심락영을 보면서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인 락영은 학급 반장에 서울대를 목표로 할 정도로 공부도 잘한다. 락영이 이렇게 일찍부터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로 자란 건, 몽상가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꿈을 포기한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젊은 시절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는 현재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서 '첼시 호텔'이라는 이름의 LP 바를 운영하며 여전히 음악에 빠져 살고 있다. 벌이가 시원치 않은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공무원으로 일하며 세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고, 락영은 그런 부모를 보면서 자신은 가능한 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입사해 하루 빨리 경제적 안정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인데도 공부를 하려고 스터디카페에 간 락영은 같은 반 아이인 정지유와 마주친다. 같은 스터디카페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같이 편의점에 가고 커피우유를 나눠 마시면서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런데 며칠 후 누군가 지유의 책상에 긴 지렁이 같은 벌레 수십 마리를 놓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유의 친구이자 학급 반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 락영은 앞장서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담임 교사는 쓸데 없는 일에 정신 팔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한다. 이때 같은 반 남학생 김도영이 두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이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락영이 친구 지유, 도영과 함께 '연쇄 벌레 테러'를 일으킨 범인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락영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첼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그동안 입시 공부와 학종 관리를 하느라 친구들과 마음 편히 어울리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락영은 지유, 도영과 범인을 찾으러 다니면서 비로소 십 대 청소년다운 나날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 사이에 다양한 감정이 생겨나는데, 각자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봐주었으면 좋겠다.


첼시 호텔 또한 락영의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공간이다. 락영은 내심 첼시 호텔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한심하게 보았다. 남들은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음악이나 듣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는 게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락영 자신이 정신적으로 위기 상태에 놓였을 때(번아웃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예전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첼시 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 도망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거라고. 이런 깨우침을 주는 공간이 십 대 시절의 나에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에게 첼시 호텔 같은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취미는 없지만, 비슷한 효과를 주는 시간은 있다.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현재의 우울이나 미래의 불안을 잊을 수 있다. 아무 책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그 효과가 더 크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돈이 되거나 미래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정도를 넘어 퇴행적인 취미로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시간이 없으면 다른 시간을 버틸 힘이 안 생긴다. 첼시 호텔을 찾는 사람들에게 첼시 호텔이 꼭 그런 존재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