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르른 틈새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1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최근에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여러 권 읽고 너무 좋아서 장편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권여선 작가가 1996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의 개정판이 출간되어 읽어보았는데,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권여선 작가의 원점, 시작점을 알게 된 느낌이라서 더 좋았다. 소설은 서른 살을 앞둔 미옥이 그동안 살았던 방을 비울 날을 일주일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옥은 선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두 자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여중,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대학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미옥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던 때였고, 인문대생인 미옥 또한 선배의 부름을 받고 언더서클에 가입해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사실 미옥은 시위 자체보다 언더서클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미옥은 동기인 여자 친구 둘, 남자 친구 셋과 일종의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이십 대 내내 미옥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성적인' 미혜와 '중성적인' 수진은 미옥으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여성상으로 살아갈지 결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모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타입의 남자 친구 셋(한영, 명호, 종태)은 미옥에게 각각 사랑, 관심, 우정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미옥의 내면을 성장시킨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 당사자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 문학으로도 분류될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내면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다. 과거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이사를 일주일 앞둔 미옥이 곧 있으면 떠날 방 안팎의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시간적으로는 뒤섞여 있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유의미한 순서로 각각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구성한 점이 기발하고 훌륭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한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험한 일들을 여성 자신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도 분류될 수 있다, 미옥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재하고 외가 식구들이 집 안을 점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동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나 여학교 시절 동급생들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것, 대학생이 된 후에도 미혜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등은 퀴어 서사의 관점으로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