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감 연습 -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평점 :
이 책을 쓴 레슬리 제이미슨은 작가가 되기 전에 '의료 배우'로 일한 적이 있다. 의료 배우란 의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에서 환자 역할을 맡아 어떤 질병의 표준 증상들을 연기하는 배우를 일컫는다. 똑같은 질병, 똑같은 환자인데 어떤 학생은 사무적인 어투로 형식적인 질문만 하고 끝낸 반면, 어떤 학생은 꼬치꼬치 캐물어 환자의 부모가 어떤 약을 복용했고 무슨 질병 또는 사고로 돌아가셨는지까지 알아냈다. 저자는 그 차이가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은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답을 하게끔 질문하는 것이다." (20쪽)
이 책에는 저자가 작가로 유명해지기 전에 쓴 11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우선 소재가 다양하다. 의료 배우로 일한 경험, 낙태 경험, 이상한 모겔론스 병 취재, 니카라과 거주, 멕시코와 볼리비아 여행, LA 갱 투어, 울트라마라톤 취재, 교도소에 갇힌 수감자 면회, 국가에 착취당하고 버려진 지역 답사, 잘못된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소년들 등 저자의 직접 체험부터 간접 체험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알코올 중독, 섭식 장애, 자해벽 등 과거에 겪은 증상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여성 고통의 대통일 이론>이라는 글이다. 시, 소설, 미술, 영화, 뮤지컬 등 그 어떤 장르를 봐도 고통받는 여성의 이미지는 고통받는 남성의 이미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고통을 당하는 방식도 자연적으로 병들고 아픈 경우부터 타인(주로 남자)에 의해 상처 입고, 피 흘리고, 목 졸리고, 벗겨지고, 강간당하고, 죽임 당하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이러한 이미지 또는 스토리텔링이 "고난을 여성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여성 구조의 한 요소로 전환시킬 위험이 있다."라고 경고한다. (308쪽)
"여성이란 고통을 필요로 한다"라는 잘못된 인식은 급기야 여성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남자의 고통은 심각하게 받아들인 반면, 여자의 고통은 '심인성', '스트레스', '히스테리' 같은 단어로 일축하며 무시하고 간과해 왔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 밝혀졌다. 심지어는 여성들 자신도 극심한 통증을 겪으면서 이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통증이 약할 때 병원을 찾았다가 의사한테 '스트레스', '호르몬' 같은 말을 듣고 병원 출입을 안 하게 된 것이리라.
저자의 경우에는 그 대상이 남자친구였다. 저자는 한때 여러 사고를 당해 몸이 많이 아팠다.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고통을 호소하면 남자친구는 '부상병동'이라고 놀리며 '아픔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당시 저자는 남자친구의 말대로 자신이 고통을 과장해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해를 할 때도 '상처 어필'을 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당시 남자친구가 여성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 보통의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 사람이라는 걸 안다. "연기된 고통 역시 고통이다."라는 친구의 말을 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