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영화 찍자 - 청소년 감독이 씹어 먹어야 할 레알 real 130가지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2
안슬기 지음 / 다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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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심있는 학생이 늘고 있다

 

영화를 전문적인 감독만이 만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자신들은 단지 영화관에서 이미 만들어진 영화만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청소년들이 줄고, 청소년들 자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직접 만들어보려고 시도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요즘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비싼 장비만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고, 핸드폰으로도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청소년들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이 적다보니, 이들은 주로 핸드폰이나 컴퓨터와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일은 도를 깨우치는 일이다

 

도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여행에는 필요한 것들이 많다. 그냥 무작정 떠났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영화에 달려들었다가는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사람도 잃고 또 자기가 그렇게 좋아했던 영화까지 잃게되는 경우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에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130개의 지침이 있다.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지니고 있으며(특이하게도 수학교사란다), 동아리 활동으로 영화를 만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저자가 청소년들이 영화를 만들 때 명심해야 할 사항들을 교사답게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다.

 

도를 깨우치는데 스승이 필요하듯이 영화를 만드는데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이 책이 하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첫 장이 참 도발적이다. 영화 만드는 일, 힘들다. 그러니 포기하라고 한다. 자꾸 포기하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영화를 만드는 일은 도를 깨우치는 일만큼 힘든 일이라는 거다.

 

도를 깨우치겠다고 출가하여 용맹정진하지만, 결국 깨우침까지 이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도 마찬가지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경고한다. 정말로 자신을 버리고 영화에 미치지 않겠다면 영화 만들 생각 아예 하지 마라고.

 

영화 감독은 가끔 프랑켄슈타인이 된다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라고.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사실 괴물이라는 건 인간이 지닌 편견이다. 그는 창조물이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낸 박사의 이름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해낸 인물에겐 이름이 없다. 그냥 그는 괴물로 우리에게 인식될 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인간의 온갖 신체부위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다.

 

자, 보라. 영화 감독도 인간 세상의 온갖 일들을 모아 새로운 세상을 스크린 위에 만들어낸다. 그는 필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창조해낸다.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름을 붙였을 거고, 또다른 제2의 생명체를 자발적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생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체를 버려두고 도망친다.

 

즉 그는 창조는 했으나 그 창조물에 실망을 하고 도피를 하고 만다.

 

이런 경우를 편집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편집을 할 때 그간의 활동으로 절망하여 편집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래도 편집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얘기. 그것은 그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며, 자신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면서 영화에 대한 예의라고.

 

하여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이 되면 안된다.

 

감독은 조물주가 되어야 한다

 

조물주를 신이라고 해도 좋겠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신은 인간에게 많은 실망들을 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인간들에게 벌도 내렸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사랑으로 감싸안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감독도 영화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는 영화에서는 조물주가 되는 것이다.

 

신도 인간에게 실망을 했듯이 감독도 자신의 작품에 실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도망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은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다음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에게 최후로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것은 고무적이다. 인간도 희망을 최후까지 지니고 있는데 하물려 신임에랴.) 갖고 창조물을 대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감독의 태도라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 전지적인 관점을 지니고, 그러한 관점을 행동으로 옮기며, 끝까지 자신의 창조물을 책임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얘기가 이 책의 전반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부터, 스탭 구성, 배우 선발, 촬영 준비, 촬영, 그리고 편집, 편집 이후에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알린 다음에 함께 나누기 등등 영화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알기 쉽게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조물주의 위치에 올라야 하듯이, 이 책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것들에 대해서 조물주처럼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

 

애정을 가지고, 앞에서는 영화 만들지 마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 만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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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 동문선 현대신서 37
로버트 리처드슨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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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단순하게 영화와 가장 가까운 문학이 소설이라고 생각해서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처럼 영화와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있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나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읽게 되었다.

 

문학이라고 하지만,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로 시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을 쓴 사람이 영화비평가도 아니고 영문학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전공은 아무래도 영시인 것 같은데.. 영시 중에서도 모더니즘 영시 쪽이라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시와 영화라?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시를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가 있지만, 이것은 한 나이많은 여자가 시를 배워가고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나타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시의 특성과 영화의 특성이 교차되고 융합되는 영화로 받아들이기는 좀 힘들었는데...(아직도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능력이 부족하고, 그러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른 장르의 예술들과 비교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을 보면 시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과 영화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아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고 하여 새로운 경향을 실험하고, 새로운 유파를 형성해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읽으면서 왜 영화나 시들이 다 오래된 것들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왜 그런지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0년대라는 것을. 그러니 작품들이 다들 20세기 초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감독도 영화도 마찬가지고.

 

영화가 막 중심 문화로 자리잡을 때 영화와 다른 예술을 비교 통합하는 책을 썼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잘 다루고 있지 않은 형태의 유사성, 표현의 유사성 등을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에 들어온 소설 기법이라든지, 시의 기법이라든지, 또는 영화로 인해 변한 소설, 시의 기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은 어떤 것이든 홀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섭' 또는 '융합'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일들은 이루어져 왔고, 또 연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영화를 영화만으로서 끝내지 말고 다른 것들과 연결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러한 생각을 해야겠다는... 그것을 초기의 영화와 소설, 시에서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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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장마란다. 어떤 곳은 비가 와서 농사가 안 되고, 어떤 곳은 지나친 가뭄이라서 농사가 안 되고...

 

이래저래 넓은 땅덩이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 넓은(?) 땅덩이에서 겪는 기후로 인한 어려움보다는 농민들을 더 힘들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얼까? 우리는 답을 알고 있지 않나?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 농민들은 힘이 없으니까? 농업은 구시대의 산업이며,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때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귀농을 하려는 이유가 땅과 더불어,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그리고 자신도 살리는 그러한 농업을 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도시의 삶에 지쳐서,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서 농촌으로 내려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준비 없는 귀농 결과 어떤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말았다고도 하니...

 

농촌에 가도 먹고살 일이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농촌에 가도 자급자족하기 힘든 실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논보다는 과일 농사에 더 주력을 하고 있으며, 무슨 환금작물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되는 작물에, 축산에 몰려들고 있는 현실이니...

 

이게 농민탓이랴?

 

어떻게 농민을 탓할 수 있는가?

 

그동안 얼마나 농민을 홀대했는가?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기 전에도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정책을 펼쳤고, 굶주림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단일작물을 심게해 병충해에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외국 농산물의 수입을 개방해 농민들이 살기 더욱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며칠 전부터 이중기의 이 시집을 읽고 있었다. 내용이 어렵지 않은데, 이상하게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자꾸 곱씹어야 한다. 물론 사투리가 있어서 낱말의 의미를 유추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내가 농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리라.

 

또 이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시 '밥상 위의 안부'를 읽고 또 읽고 계속 곱씹어 읽는데, 의미가 확 하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렇다고 마음에 확 들지도 않는다. 시집 뒤에 있는 해설을 읽어도 이 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시인데...

 

하여 전문적인 시평을 할 것도 아니고, 이 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시들로 넘어갔다. 다른 시들 중에 마음에 와닿은 시들이 제법 있다. 눈물겹도록 슬픈 시도 있고, 슬픈 상황에서도 해학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을 머금게 하는 시도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가 명심해야 할 시.

 

비교우위론에 대한 경고

 

게릴라전을 펴는 비교우위론에서

쌀은 굶주린 자의 빛나는 희망이 아니라

살아남을 자의 생애를 대변합니다

 

소말리아의 죽음잔치는 인간의 예언입니다

 

이중기, 밥상 위의 안부, 창작과비평사, 2001년. 72쪽

(이 시집의 51쪽과 68쪽에 이러한 비교우위론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표현한 시가 있다. 이 세 시는 서로 연결된다.)

 

이중기는 시인이자 농민이다. 그는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이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는가를 목격했고, 경험했고, 저항한 사람이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저항이 처절하게 드러나 있다. 농촌의 실상이 진실되게 드러나 있다.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그리고 쌀이 아닌 과일을 재배하는 농민의 슬픔 등이.

 

그래서 슬프다. 우리는 밥상을 받으면서 안부를 묻고 있는지, 밥상에는 단순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음식만이 있지 않고,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 미래가 있음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깨우칠 수 있었는데...

 

농담식으로(사실은 진심이다) 앞으로 가장 유망한 직업은 농부라고 말하는데...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동물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고, 우주를 살릴 수 있는 직업, 그것은 직업이라기보다는 바로 우리의 삶 자체이다. 그것이 바로 농부의 삶이다.

 

돈을 추구하는 농부가 아닌, 삶을 추구하는 농부. 그리고 그런 농부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내가 꿈꾸는 나라 아니던가.

 

그 때서야 농부는 미래의 가장 유망한 직업이 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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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위의 소설들 - 소설과 영화 사이 사이 시리즈 5
송기정 지음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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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소설의 세기였고, 한 때는 영화의 세기였다. 소설이 많이 퇴조해서, 문자언어의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소설은 문학 장르에서 대표적인 장르로 군림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소설을 축출해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텔레비전의 등장이 영화를 몰아내지 못했듯이 영화 역시 소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요즘에는영화가 소설을 살려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와 소설의 관계만 보더라도,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 더 유명해졌으며,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더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영화가 소설의 판매를 촉진하는 경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소설과 영화가 내용이 똑같지는 않더라도(사실 똑같으면 안된다. 영화나 소설이나 둘 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표현방식에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다가 영화를 망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바란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설을 읽고 싶어 하며,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은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어떻게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고, 나라면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텐데, 또는 와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로 삼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여 최근에는 영화와 소설이 서로 넘나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추세를 기반으로 영화와 소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소설은 설명이나 묘사가 충분히 작품을 이끌어간다면, 영화는 대사나 인물의 표정, 행동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든지, 그런 차이에서 작품이 어떻게 변형이 되는지,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창조적 탄생을 하는지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오는데... 이 책도 그 중의 하나다.

 

1부는 프랑스 소설을 중심으로 영화로 표현된 경우, 소설이 영화에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나는지, 또 같은 영화라고 하여도 감독에 따라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라는 소설이 영화로 많이 창작되었는데, 그 중에서 외국영화 두 편과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영화와 소설의 차이, 그리고 비슷한 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위험한 관계"란 소설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세계 각국에서, 또 시대를 넘어서 영화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담은 소설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겠다.

 

즉, 소설은 소설로서 끝나지 않고 다른 장르로 변형, 변용되어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면 특수한 경우를 통해서 인간 삶의 보편적인 면을 포착하고 표현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이청준의 소설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이어도","서편제","벌레 이야기"를 들고 있다.

 

이 중에 "벌레 이야기"가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 말고는 모두 이청준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어내었으며, 각 영화는 감독의 표현방식에 따라 조금씩 소설과 다른 모습을 지닌다고 한다.

 

물론 소설과 영화가 똑같을 수 없고, 또 똑같아서도 안된다. 하여 영화는 소설의 주제의식을 빌려온다든지, 인물들을 빌려온다든지, 갈등 상황을 빌려온다든지 하지만, 표현방식에서는 영화 장르의 특성과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살려 창조적 변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려다 실패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영화감독은 소설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화라는 토대 위에 서 있기에 영화라는 장르를 늘 의식하면서 소설을 변형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소설도 살고 영화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소설인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잘 설명해내고 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지금. 소설은 영화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이야기 기러들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재구성, 창조적인 표현... 그것이 바로 소설과 영화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이런 창조적인 관계맺음이 잘 되었을 때 영화와 소설은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이 책에 예를 든 "서편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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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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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사람은 철학이 있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있어."

 

흔히 하는 말이다. 여기서 쓰이는 철학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관성으로, 어떤 경우에는 진리로 쓰이기도 한다.

 

일관성이나 진리, 같지 않을 것 같은 용어가 한 단어에서 쓰이는 것은 그만큼 철학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일관성이란 자신이 생각이나 행동을 변함없이 꾸준히 유지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 없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옳다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 옳다는 믿음으 어디에서 오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해보면 결국 일관성은 진리와 연결이 된다.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믿기에 일관성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철학은 진리의 문제가 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남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질문도 하게 된다.

 

왜? 왜? 어떻게? 어떻게?

 

그러한 질문들이 앎으로 나아가고 앎은 다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앎과 행동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알고도 행하지 않을 때 그를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 별거 아닌 거 같은 질문이 별거로 존재하게 되고, 누구나 질문하는 문제가 특정한 사람만이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우리 교육이 그렇다. 도대체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던가? 아니 철학을 가르치려고 했던가?

 

철학이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 교육에서 철학을 너무도 홀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철학을 홀대했다고 하기보다는 철학을 너무도 위대한 그 무엇으로 인식해서 감히 가르치고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철학은 특정한 어떤 뛰어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도대체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를 늘 고민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좋은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일테고, 그러한 진리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철학을 서양에 국한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동서양의 모든 철학을 아우르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 대한 작업, 이슬람 철학에 대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라고 이해하면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다.

 

총 스무 명의 철학자가 나온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크레티우스, 스토아학파,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몽테뉴,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테르, 디드로, 루소, 흄, 칸트, 헤겔, 토크빌, 마르크스, 니체

 

이 중에 마키아벨리와 토크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평소에도 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 둘도 이 책을 읽어보면 왜 철학자로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철학적 내용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 언급은 삼가하고...

 

그들의 생애와 철학을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를 알기 위한 책 소개와 그와 연결되는 다음 철학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책을 더 쉽게 읽게 하고 있다.

 

철학.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때 비록 서양철학자에 국한되었지만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면 지금 여기서의 우리 고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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