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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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고 든 첫 느낌.

 

아, 늦었구나.

 

누군가 언젠가는 한 번 연암과 다산에 관해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쓸 자신도 없고 공부도 하지 못했지만, 이 둘의 이야기는 이야기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미숙이 글 써 버렸다.

 

이미 이에 대한 작업이 먼저 있었는데, 그 때는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이란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목이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였다. 역시 고미숙이 썼고.

 

이번엔 그 때의 작업을 더욱 구체화했다고 보면 된다. 아예 책 한 권으로 나왔으니.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라고.

 

이들은 별이 확실하고, 이들이 제시한 길 역시 우리에겐 지도 역할을 하는데, 이 둘을 하나로 묶으려는 모더니티의 자장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 둘을 둘 그대로 인정해야 할 때라고, 자신의 체질에 맞게(최근에 고미숙이 명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고, 또 동의보감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 둘은 책으로도 나와 있다.) 둘 중의 한 별을 택하면 된다.

 

아니지. 명리학에 따르면 또는 체질론이라고 해도 좋다면 우리는 그 둘 중에서 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누구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사람에게로.

 

하늘의 별을 본다고 모든 별들에게 똑같이 감흥을 느끼지 못하듯이 어떤 별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어오는데, 그 별의 밝기라든가, 그 별이 있는 위치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냥 자연스레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인물도 마찬가지리라.

 

이성적으로 나는 이런 쪽으로 가야지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그런 자신을 발견하곤 하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마음과 머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마찬가지다.

 

같은 시대를 살아냈지만 다산과 연암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냈고, 그 살아냄이 글로써 남아 있는데, 그 글은 서로의 차이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고미숙이 책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연암과 다산이 만났을까 하는 질문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사를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 바로 고미숙도 지니고 있었던 의문이다.

 

이 둘은 과연 만났을까?

 

태어나고 죽은 때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가 정조 때인데, 또 그들을 연결시켜 줄 인물들도 있는데(박제가, 정석치 등) 이들은 왜 서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의 만남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 이것이 고미숙이 이 책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이 둘의 만남보다 우리는 이들이 같은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는 것.

 

같은 시대를 보는 관점의 차이는 그들 삶의 형태의 차이로 나타나고(이 삶의 형태 차이를 고미숙은 사주를 동원하야 해석하기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렇다고 고미숙이 운명론자라고 할 수는 없을텐데, 연암과 다산의 사주가 물과 불, 파동과 입자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하니...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체질적으로 끌리는 무엇은 있고,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삶을 이루는 차이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있다고 한다.

 

연암은 유목인(노마드)라면 다산은 정착민.(다산에게 '앙가주망'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참여적 지식인이라고 하면 될 듯하기도 하다) 

 

연암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탈주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는 리좀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다산은 한 곳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나무를 지향하고 있는 상태.

 

연암이 중심을 거부하고 원심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갔다면, 다산은 중심을 추구하는 구심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차이.

 

이런 삶의 차이가 연암의 탄생에서 다산의 죽음까지 딱 100년이라는, 한 세기라는 우연찮은 사실. 이 책의 2장에 나와있는 이들의 생몰연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암 : 1737년~1805년  정조 : 1752년~ 1800년  다산 : 1762년 ~ 1836년

 

하여 이 백년 동안에 일어났던 두 개의 별들을 고찰하고 있으며, 그 별들의 중심에는 정조라는 또 하나의 별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정조 또한 이 둘을 이야기할 때 조연이 아닌 주연이어야 함을 제3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별들은 서로를 빛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또한 각자 자신만의 길을 품고 있어, 그 길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지도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차례의 제목을 보면 이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에 대해서 우리 나름대로 어떤 별을 택해야 하는지, 아니 천성적으로 어떤 별에 더 끌리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1장 물과 불 - 파동과 입자

2장 기묘한 '트리아드' - 연암과 다산, 그리고 정조

3장 문체반정 - 18세기 지성사의 '압축파일'

4장 "열하일기" vs "목민심서" - 유쾌한 '노마드'와 치열한 '앙가주망'

5장 진검승부 - 패러독스 vs 파토스

6장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각 장들의 제목만 보아도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왜 그들이 이렇게도 대비를 이루게 되는지는 각 장의 내용들을 읽어가면서 찾아내면 된다.

 

다만, 우리들의 삶은 이들처럼 이렇게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안에는 더 많은 복합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이 두 개의 별과 두 개의 지도가 다 유용할 때가 많다는 사실.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어떤 지도를 택할 것인가는 그 때 그 곳의 나와 관련지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내 판단 자체도 내 맘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극한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연암과 다산이라는 사실.

 

다산이 20세기에 먼저 주목받았다면, 연암은 21세기에 주목받았다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고, 먼저 온 자가 나중 되었다고... 그러나 이들은 이 세기로 끝나지 않았다고,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문제를 제기한다고.

 

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냐고, 그것이 평전이 제시하는 문제 아닐까.

 

다음으로 두 권이 더 기획되어 있던데... 이 책들이 나오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던데..

 

기대된다.

 

덧글

 

가끔 책을 읽다보면 연도가 잘못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앞과 뒤를 살피면 아 잘못된 연도구나 하고 금방 알게 되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책에서 연도는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

 

248쪽. 1881년 다산은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 있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앞을 보면 이는 18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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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신물이 나도록 배웠던 사람. 연암 박지원.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사람.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읽어야만 했던, 아니 읽는다기보다는 분석해야만 했던 그의 글.

 

허생전. 양반전. 호질. 그리고 일야구도하기.

 

이렇게 단편으로만 알고 있었고, 암기식으로 기억했던 그의 "열하일기"

 

지금은 많이도 번역이 되어서 열하일기를 읽는 사람도 늘었지만, 예전에 열하일기를 전체적으로 번역해놓은 책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도서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 열하일기".

 

읽다보니 재미있네... 이거 이래서 유명하구나 했던 책. 그 다음에 읽은 책이 보리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한 "열하일기(상,중,하)"

 

이 다음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낸 열하일기가 있는데, 그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그밖에도 많은 열하일기가 있는데, 내가 읽은 책은 이 두 종류뿐.

 

그러나 그게 어떠랴. 시중에 나와 있는 열하일기를 모두 읽는다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열하일기를 읽어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나만의 열하일기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고, 나만의 열하일기 읽기법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열하일기를 읽어도 마찬가지리라.

 

그동안 내가 읽었던 박지원에 관한 책들. 그리고 지금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고미숙,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북드라망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고미숙, 나비와 전사, 후마니타스

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개

박지원,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보리

박지원, 열하일기(상,중,하), 보리

박지원, 국역 열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박지원, 연암집(상,중,하), 돌베개

김영호, 조선의 협객 백동수, 푸른역사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김영동, 박지원소설연구, 태학사

박기석, 박지원문학연구, 삼지원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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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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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전3권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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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 전3권 세트
박지원 지음, 신호열.김명호 옮김 / 돌베개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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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박지원 지음, 홍기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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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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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에 이어 반환점이다. 이 책이 반환점이라는 제목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이미 하야오는 원로 대우를 받는 감독 아니던가, 그가 아직도 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는, 또 하고 싶어하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는 반환점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아직도 현역으로, 하긴 감독은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그들에게는 '전(前)'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활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올해 또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도 할 예정이니... 이런 말하기가 뭐하지만 한참 뒤에야 '종착점'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올 듯하다.

 

이번에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라는 네 가지 제목을 달고 나왔다. 이 넷은 출발점 이후 그가 만든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순서대로 그가 한 말들, 그가 쓴 글들을 엮었다고 보면 된다.

 

글로 묶일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문필가라면 짧은 문장을 쓸 때에도 언젠가 책이 될 것을 각오하고 있겠지만 나는 그런 각오도 없습니다.'(431-432쪽)라고 했으니, 이 책에는 그 때 그 때 하야오의 진심이 섞인 말들이나 글들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는 얘기는 그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의 내면에 있는 풍경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어떤 자세로 영화를 만들었는지(그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보다는 영화라는 말을 쓴다. 애니메이션 하면 영화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으로 보는 인식이 있는데, 그를 피하기 위해서도 또 실사 영화든, 그림 영화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에 여기서는 영화라는 말을 쓴다)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의 글이 그를 다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 역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과거의 문장이나 발언이 모인 것을 보면 그곳에 있는 사람이 진짜 미야자키 하야오인가 하면, 그건 나도 절대 보장은 못 합니다.'(432쪽)

 

뭐, 사람이 단일한 요건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니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은, 그렇게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이들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니, 우리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아니 단정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단정하는 태도가 얼마나 많은 독단을 낳았고, 갈등을 낳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복합적인 존재, 그를 인정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지니게 되는 태도이지 않을까 한다.

 

책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대로 펼쳐 본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이 도처에 있다. 그 부분들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으니...

 

사람도 짐승도 나무도 물도, 모두 동등하게 살아갈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만 살아가지 말고 짐승에게도 나무에도 물에도 살아갈 장소를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상이 일찍이 일본에는 있었습니다.

  이번 영화 [모노노케 히메]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만들려고 했기에 꽤 번거로운 일이 되어버렸어요. 이제 다 만들었는데 어떤 작품이 됐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40쪽)

 

아이들이 세상의 입구에 서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먼저 움직이게 할 필요가 있어요. 유치원에서 입구를 옥상과 밑에서 양쪽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합니다. 운동장에서 언덕길을 기어 올라가면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올 수 있죠. (146쪽)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태어나는 아이들한테 "참 대단한 때에 태어나버렸구나"라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역시 "잘 태어나줬다"란 마음이 강하니까요. "축하해"나 "어서 와"같은, 그런 마음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힘든 현실세계와의 사이에 어떻게 다리를 놓을지, 간단히는 다리를 놓진 못하겠죠. 그래도 역시 아이들한테 "태어나서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323쪽)

 

영화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다. 특히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 보고 싶어하는 영화,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아이들이 변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단, 그가 만든 영화를 수십 번씩 반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때에만 보는 아이들이면 더욱 좋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그에게서 영화를 만들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미술관을 운영하는 힘이 되게도 하지 않을까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술관. 정돈되어 있는 미술관이 아니라, 무언가 뒤죽박죽이 되어 아이들 스스로 체험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스스로 얻어갈 수 있는 미술관을 꿈꾸는 사람. 그래서 부모들도 하여금 미술관 내에서는 사진촬영을 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3부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지만, 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이 3부에서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미술관 이야기다. 이 미술관을 만드는 이야기. 미술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 제목이 좀 바뀌었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아이들이 중심에 서 있다. 미래를 현재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아이들이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가 앞으로도 아이들이 꿈을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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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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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에게 열광하게 했을까? 처음에 본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나?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란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준 "미래소년 코난"부터였을까?

 

어른이 되어, 무언가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보게 된 애니메이션, 아이들이 보는 장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어른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은 아무래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인 듯하다.

 

이 작품으로 하야오도 자신의 스튜디오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을테고.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도 역시 '나우시카'다. 그가 나우시카에 대해서 보게 되고, 또 영화로 만들게 되고, 만화로도 그리게 된 일들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는데...

 

단지 나우시카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이웃집 토토로"에 얽힌 이야기도 많고.

 

무엇보다도 그의 애니메이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인 듯하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빠져들게 했는지 찾기보다는 그의 작품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식으로 작품활동을 해왔는지를,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통해서 읽는 사람이 스스로 확인해가도록 하는 방법을 이 책은 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이거다라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에게 계속 작품의 주제를 물어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는 모습이 이 책에 나와 있고, 그 자신도 무엇이다라고 정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기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고 하고 있기에 결국 작품에 의미를 채우는 일은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500여쪽의 방대한 책이다. 그런 분량 속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던 대담들과 작품 기획서, 또 어떤 작품을 보고 난 뒤의 느낌을 쓴 글 등 정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나와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1979년부터 1996년까지의 활동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이렇다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기보다는, 그의 글들을 직접 읽고 그를 알아가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한 생각 두 가지.

 

하나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 대해서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 '인간은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는, 그런 사회에서 그나마 가능한 것은 어쩌면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하고, 시사회에서 아이들이 좋아했을 때 그도 기뻐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품, 그것은 거짓이지만 진실인 작품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다. 그는 대놓고 이야기한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거짓이라고. 거짓인데, 있을 수 있는 거짓, 영화 속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짓.

 

작품을 만들 때 작품이 현실성을 띠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주변의 풀들도 하늘도,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또 걷는 모습, 뛰는 모습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이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이면 3살 이전의 아이들이 "이웃집 토토로"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태도. 세 살 이전의 아이들은 자신의 몸으로 움직이면서 촉각을 최대한 활용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그런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여주고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은 직접 손으로 만지고, 맛보고 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우리들은 어떤지, 반성하게 하는 말이고... 이런 단계를 넘으면 이제 아이들은 시각을 활용하는 영화를 봐도 된다고. 그 때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수 있는 영화. "이웃집 토토로"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점에서 그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영화를 보고나서 감통을 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또 하나는 일제 시대 김동인이 한 주장. 어느 글인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은 그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하면서 자신은 '톨스토이'가 좋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싫다고 한 점.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가로서 실패했다고 한 점인데... 

 

이유가 톨스토이는 신의 입장에 서서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을 자신이 조정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에 자신이 끌려다니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책을 읽다보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에 가깝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상을 다한 다음에 작품을 만들지 않고 직관적으로 생각이 떠오르면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인물들이 이끄는 대로 나아간다고 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습니까?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란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만화로 완결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래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이나 의미 역시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읽으면서 스스로 찾아나가야지 작가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으며 이 다양함이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방대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본 사람이라면 그 작품을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을 수 있기에 작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떠올릴 수도 있고, 또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 그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생각들도 다시 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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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들과 옥천에 갔다 왔다. 옥천하면 안티 조선 운동과 정지용이 떠오르는데... 이문구가 쓴 글에서 옥천에 관한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그렇지.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참 인상 싶었는데... 박용래 시인과 옥천에 얽힌 사연.

 

  1973년 8월 며칠경엔가 있은 일이었다. 시인 이 아무개가 자기의 고향이 좋다 하여 작가 유광우 씨와 함께 옥천을 가다 말고 대전에 머문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차시간에 늦어 막차를 놓쳤으므로 대전에서 하룻밤을 묵어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녁 어스름에 밀려 온종일 삶던 더위가 그음하려 하자 목촉교 옆의 허름한 탁배기집으로 박시인을 불러 모셨다. 내가 초면인 유씨, 이씨를 인사시키자 박 시인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옥천같이 빼어난 고장을 다 둘러보게 되었더냐고 여간 기특해하여 마지 않았다. 이에 힘입었는지 이씨는 시키지도 않은 옥천 지방의 산수를 자랑 삼아 덧거리하였다. 그러자 박 시인은 대번에 이씨를 겨누어보며 '산 좋고 물 좋은 것은 어느 두메나 일반인데 시인이 고향을 쳐들면서 어떻게 물경풍치만을 떠들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관광객에게 맡기고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고을이 배출한 시인부터 기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바로잡아준 다음,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이기 때문이오."

  하며 찻잔을 들어 서운한 마음을 가시려고 하였다. 나와 유씨가 숙연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물정 모르는 이씨가

  "그런가요? 나는 정지용이가 우리 게 사람인 줄도 몰랐네......"

  하며 새퉁스런 소리로 두런거렸다. 박 시인의 결곡한 성미를 알고 있던 내가 이제 큰일났구나 싶어 민망한 낯을 둘 데 없어하던 순간이었다. 바람벽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지면서 박 시인의 성난 음성이 귓전을 갈겼다.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거밖에 친구가 웂네? 정지용이 제 고향 선배인 줄두 모르는 이런 무녀리두 시인 명색이라고 하냥 댕기는겨? 이런 것도 사람이라구 마주 앉어 술 마시네?"

 

이문구, 이문구의 문인기행, 에르디아,2011년.  93-94쪽에서.

(이 이야기는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권 박용래 편에도 나온다.)

 

정지용을 모르는 시인이라. 아니 알았는데, 그가 자신의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랐던 시인. 그 시인이 박용래 시인에게 당한 일화.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한국에서 배출한 위대한 시인은, 특히 자신의 고장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는 것.

 

정지용이 누구인가? 교과서에서 늘 배우던 '청록파'시인들을 시인으로 등단하게끔 추천해준 그 인물 아니던가. 그러니 일반 사람들은 검열이라는 어려운 시절에 정지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명색이 시인이라고 자처한다면 정지용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박용래 시인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내가 도착한 옥천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정지용 전집, 민음사, 1992년 2판 6쇄 46쪽 '향수' 1연

 

시인이 그렇게 그리워한 그 고향엔 이미 넓은 벌도 없었고,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도 없었으며(단지 현대식으로 크게 만들어놓은 개천만이 있었다),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백이 황소도 없었다.

 

하여 나에게 옥천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정지용 '고향' 1연)라고 읊던 정지용의 마음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옥천에 도착해서 정지용 생가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앞의 건물에 커다랗게 붙은 현수막은 옥천이 낳은 또 한사람의 서거를 기념한다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옥천이 그러한가?

 

박용래 시인에게 옥천은 정지용을 낳은 곳으로 기억되지만, 내게 옥천은 언론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곳, 안티 조선 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여기에 정지용의 고향으로 남아 있었는데, 정지용과는 별 상관도 없는, 또다른 인물의 이름이 현수막에서 나에게 보여지다니.. 씁쓸한 감정.

 

그래서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정지용의 고장인 옥천을 큰맘 먹고 벗들과 함께 찾았는데, 초장부터 기분이 별로였다고 할까.

 

여기에 점심으로 먹었던 '구읍할매묵집'은 '구읍'이라는 이름과 '할매'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한옥이 아니라 양옥 건물이었으니, 그것도 상가 건물이었으니, 근처에 있던 한옥집들과 대조되고, 햐, 이거 내가 생각한 옥천과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정지용 생가, 그 아담한 모습에, 그 앞에 흐르는 개천에 시인이 왜 '향수'를 노래했는지, 왜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고향의 변모를 서러워했는지 알 수 있었고, 정지용 문학관이 다른 문학관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지 않음에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운영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좋았다고나 할까.

 

여기에 정지용 문학을 보여주는 한국 시의 역사에서 빼놓기 쉬운 인물인 백석, 오장환, 이용악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좋았고, 그리고 입구에 전시해놓은 정지용 문학상 수상 시들도 좋았다고 할까.

 

한국시에서 한 획을 그은 정지용. 그를 한 때 정O용으로 배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정지용이라고 하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도, 문학제도 있으니... 시인은 가도 그의 시는 남아 있고, 그의 시정신은 남아있다고 해야 하나.

 

시인이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 기억되는 사회, 그리고 시인과 마을이 하나로 기억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문화 사회 아닐까.

 

언론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옥천, 그리고 정지용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배출한 옥천. 그 옥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향수길'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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