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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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고 든 첫 느낌.

 

아, 늦었구나.

 

누군가 언젠가는 한 번 연암과 다산에 관해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쓸 자신도 없고 공부도 하지 못했지만, 이 둘의 이야기는 이야기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미숙이 글 써 버렸다.

 

이미 이에 대한 작업이 먼저 있었는데, 그 때는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이란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목이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였다. 역시 고미숙이 썼고.

 

이번엔 그 때의 작업을 더욱 구체화했다고 보면 된다. 아예 책 한 권으로 나왔으니.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라고.

 

이들은 별이 확실하고, 이들이 제시한 길 역시 우리에겐 지도 역할을 하는데, 이 둘을 하나로 묶으려는 모더니티의 자장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 둘을 둘 그대로 인정해야 할 때라고, 자신의 체질에 맞게(최근에 고미숙이 명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고, 또 동의보감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 둘은 책으로도 나와 있다.) 둘 중의 한 별을 택하면 된다.

 

아니지. 명리학에 따르면 또는 체질론이라고 해도 좋다면 우리는 그 둘 중에서 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누구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사람에게로.

 

하늘의 별을 본다고 모든 별들에게 똑같이 감흥을 느끼지 못하듯이 어떤 별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어오는데, 그 별의 밝기라든가, 그 별이 있는 위치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냥 자연스레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인물도 마찬가지리라.

 

이성적으로 나는 이런 쪽으로 가야지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그런 자신을 발견하곤 하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마음과 머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마찬가지다.

 

같은 시대를 살아냈지만 다산과 연암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냈고, 그 살아냄이 글로써 남아 있는데, 그 글은 서로의 차이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고미숙이 책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연암과 다산이 만났을까 하는 질문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사를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 바로 고미숙도 지니고 있었던 의문이다.

 

이 둘은 과연 만났을까?

 

태어나고 죽은 때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가 정조 때인데, 또 그들을 연결시켜 줄 인물들도 있는데(박제가, 정석치 등) 이들은 왜 서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의 만남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 이것이 고미숙이 이 책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이 둘의 만남보다 우리는 이들이 같은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는 것.

 

같은 시대를 보는 관점의 차이는 그들 삶의 형태의 차이로 나타나고(이 삶의 형태 차이를 고미숙은 사주를 동원하야 해석하기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렇다고 고미숙이 운명론자라고 할 수는 없을텐데, 연암과 다산의 사주가 물과 불, 파동과 입자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하니...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체질적으로 끌리는 무엇은 있고,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삶을 이루는 차이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있다고 한다.

 

연암은 유목인(노마드)라면 다산은 정착민.(다산에게 '앙가주망'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참여적 지식인이라고 하면 될 듯하기도 하다) 

 

연암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탈주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는 리좀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다산은 한 곳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나무를 지향하고 있는 상태.

 

연암이 중심을 거부하고 원심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갔다면, 다산은 중심을 추구하는 구심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차이.

 

이런 삶의 차이가 연암의 탄생에서 다산의 죽음까지 딱 100년이라는, 한 세기라는 우연찮은 사실. 이 책의 2장에 나와있는 이들의 생몰연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암 : 1737년~1805년  정조 : 1752년~ 1800년  다산 : 1762년 ~ 1836년

 

하여 이 백년 동안에 일어났던 두 개의 별들을 고찰하고 있으며, 그 별들의 중심에는 정조라는 또 하나의 별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정조 또한 이 둘을 이야기할 때 조연이 아닌 주연이어야 함을 제3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별들은 서로를 빛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또한 각자 자신만의 길을 품고 있어, 그 길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지도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차례의 제목을 보면 이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에 대해서 우리 나름대로 어떤 별을 택해야 하는지, 아니 천성적으로 어떤 별에 더 끌리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1장 물과 불 - 파동과 입자

2장 기묘한 '트리아드' - 연암과 다산, 그리고 정조

3장 문체반정 - 18세기 지성사의 '압축파일'

4장 "열하일기" vs "목민심서" - 유쾌한 '노마드'와 치열한 '앙가주망'

5장 진검승부 - 패러독스 vs 파토스

6장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각 장들의 제목만 보아도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왜 그들이 이렇게도 대비를 이루게 되는지는 각 장의 내용들을 읽어가면서 찾아내면 된다.

 

다만, 우리들의 삶은 이들처럼 이렇게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안에는 더 많은 복합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이 두 개의 별과 두 개의 지도가 다 유용할 때가 많다는 사실.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어떤 지도를 택할 것인가는 그 때 그 곳의 나와 관련지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내 판단 자체도 내 맘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극한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연암과 다산이라는 사실.

 

다산이 20세기에 먼저 주목받았다면, 연암은 21세기에 주목받았다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고, 먼저 온 자가 나중 되었다고... 그러나 이들은 이 세기로 끝나지 않았다고,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문제를 제기한다고.

 

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냐고, 그것이 평전이 제시하는 문제 아닐까.

 

다음으로 두 권이 더 기획되어 있던데... 이 책들이 나오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던데..

 

기대된다.

 

덧글

 

가끔 책을 읽다보면 연도가 잘못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앞과 뒤를 살피면 아 잘못된 연도구나 하고 금방 알게 되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책에서 연도는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

 

248쪽. 1881년 다산은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 있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앞을 보면 이는 18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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