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 - 사회수선론자가 말하는 각자도생 시대의 생존법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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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어른이 없을까?

 

이때 어른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어른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임을 넘어서 공동체의 책임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만이 아닌, 공동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인데...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어갈수록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현대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본주의 관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사고방식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한다.

 

상품을 주고받는 관계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어버린 자본주의 사회. 이것을 가정에까지 적용시켜 가정에서도 맹목적인 주고받음은 이제 일어나지 않고 이익을 주고받음의 관계로까지 변질이 되었으니, 여기서 공동체가 존재할 틈이 없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내 이익에 관계없는 것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어른이 존재하겠는가.

 

우치다는 적어도 한 사회에 7%정도만 어른이 있어서 그 사회는 견딜 만한 사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풍요시대를 거쳐온 지금 일본의 40-50대는 공동체가 파괴된, 모든 것을 상품으로 환원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고 한다. 이들이 곧 60-70대가 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자란 30-40대가 사회의 주축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어른이 있을까? 그야말로 어른이 없는 사회가 도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른이 없는 사회, 공동체가 파괴된 사회,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가 된다는 얘기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이야기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일본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얘기다.

 

우리 역시 어른이 없는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상품사회 말고도 어른이 없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제자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가 없다는 얘기는 스승이 없다는 얘기다. 즉, 보고 배울 어른이 없다는 얘기다. 아니, 어른은 있을지 모른다. 찾지 않고 있을 뿐.

 

그러나 우치다의 이 책을 읽다보면 어른이 없기 때문에, 스승을 찾는 제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어른이 되었어야 할 세대들이 어른이 되지 못했는데, 이들이 한 번도 제자가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스승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지? 학교마저도 상품관계로 넘어간 지가 오래되었는데... 교사는 상품판매인이고, 학생은 구매자일 뿐이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학교에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지고 거부하는 것이 지금의 모습 아닌가.

 

여기서 스승을 찾는다는 것, 제자의 자리로 자신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자가 없는데, 어떻게 스승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승이 없으니 자연스레 어른은 없다. 이 사회에 어른은 없다.

 

보여주는 모습이라고는 어린이의 모습뿐이다. 자신은 어린이의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른스런 행동을 하라고 하면 누가 듣겠는가. 스승이 '바담 풍 하면서 바람 풍 하란다'고 자신이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따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른이 먼저 되어야 한다. 남이 어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먼저 어른스러운 일을 하면 된다. 어른스러운 일은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다.

 

'혼술'이라든지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우리나라에서 공동체는 참 먼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주거공동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함께 생활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고, '밥상공동체'라 하여 함께 상을 차려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어른이 되려는 사람들이다.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다.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 남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어른이다. 하여 이런 어른들은 우선 제자의 자세를 갖춘다. 제자란 무엇인가?

 

스승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아닌가? 단지 말뿐이 아니라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우려 하는 사람이다. 온몸으로 스승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바담 풍' 하지 않는다.

 

어른이 없는 사회, 다른 말로 하면 제자가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잘났다. 모두가 잘나서 공동체가 없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만이 옳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다. 그렇지 않은가.

 

어른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사실상 '피의자' 신분이 되었는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잘못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 잘못이야, 난 억울해. 마치 애처럼 떼를 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람이 어린이처럼 굴고 있는데... 어른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어른답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는 학생 세대... 이게 현실이다.

 

우치다의 이 책, "어른 없는 사회"를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치다 역시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고. 7%정도만 어른이 돼도 그 사회는 행복해질 거라고.

 

그렇다면 바로 나부터 어른이 되면 된다고. 남을 보지 말고 바로 나부터 행동하면 된다고, 나부터 제자가 되려고 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가 어른이 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그게 어른 없는 사회를 어른 있는 사회로 바꾸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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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는 광대다 - 얼음 같은 세상, 마음을 녹이는 현장예술가 최병수
박기범 외 지음, 노순택 외 사진 / 현실문화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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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책이다.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를 읽고 최병수에 관한 책이 또 한 권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데 검색해 보니 품절이다. 품절,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 중에 몇 년이 지나면 품절이 되어 더이상 구할 수 없게 된다. 아쉽다.

 

왜 품절이 되었을까? 최병수란 예술가, 많이 알수록 좋을 것 같은데... 그의 예술이 아직도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하다가, 현장예술은 현장에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

 

그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현장이 변하면 현장예술이 사라지고 기록으로 남듯 그의 책도 그때의 시의성이 사라지면 품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과연 그의 예술의 현장성이 사라졌는가? 지금 우리는 그가 87년에 이한열이 최루탄에 목숨을 잃었듯이,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환경이 지금도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지 않은가. 평택 대추리가 강정에서 상주에서 또 밀양에서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그 죽음을, 그 일들을 둘러싸고 또다시 반복되는 일들을 우리는 겪지 않았는가. 마치 데자뷰 현상(기시감)을 느끼듯이... 책임자는 여전히 처벌이 안 되고 있고, 우리는 다시 거리로 거리로 나오고, 현장예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지 않은가.

 

최병수의 예술, 과거에 했던 현장예술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이 다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읽히기보다는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작품들이 사진으로 많이 실려 있으므로. 지구온난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고, 그가 만든 얼음 펭귄은 계속 녹고 있는 상태이며, 새만금의 갯벌은 썩어버렸고, 사패산 터널은 뚫려 버렸으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더한 환경 파괴, 생태 파괴, 우리들의 삶 파괴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 삶은 온갖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것을 알려줄 현장예술가가 너무도 필요한 시점이다.

 

어쩌면 최병수에게 기대지 말고 우리 모두가 현장예술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작은 촛불 하나를 들고 나온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현장예술가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거리에 그려내고 있는가. 그런 현장예술가들, 우리 모두가 현장예술가가 되어 세상을 예술로 바꾸어내고 있다. 바꾸어내려고 하고 있다.

 

예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우리들의 삶에 예술이 어떻게 다가와야 하는지, 최병수의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예술은 민중과 늘 함께 했으므로.

 

책의 제목이 된 권정생 선생의 글에 '병수는 광대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은 그 다음을 아쉬워 한다. '보는 사람 있어도 모두 구경꾼 뿐이다. 그래서 병수는 외롭다' 고.

 

우리나라 민주화, 환경, 생태, 그리고 세계 평화까지 최병수가 참여하지 않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예술은 없다. 그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세계의 위기를, 우리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의 광대놀음은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냥 박수만 치고 끝낼 뿐이었다. 권정생 선생은 그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모두가 구경꾼만은 아니었다. 그의 광대놀음을 보고, 그의 현장예술을 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제는 광장으로 나와 자신이 현장예술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거대한 예술이 된다. 최병수의 예술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함께 참여한다.

 

이 책에도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 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최병수는 외롭지 않다. 이 책은 비록 품절이 되었지만 삶 속에서 그의 예술은 현장에 있다.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다양한 그의 활동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그의 예술이 현장에서 사라진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우리 모두가 이런 현장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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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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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란 말이 인터넷 공간을 점령한 때가 있었다. '있었다'라는 과거형을 쓴 이유는,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메갈리아'가 뭐하는 곳인지도 잘 모른채, 그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남성들로부터 추행, 희롱당한 사례들이 많이 있었다. 

 

양성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에, 비록 제대로 정치를 못해 하야 압박을 받고는 있지만, 어쨌든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에서 아직도 여성은 피해자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주는 사이트였는데...

 

마찬가지로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으며, 인종차별, 여성비하 등을 일삼는 부동산 재벌이 여성 후보를 누르고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니...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도 뭐 좀 힘있다고 여기는 남자들이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외모로만 판단하는 말들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니,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페미니즘이 나온 지가 한참이 되었음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여성들의 권리가 신장되었음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권리들, 또는 암묵적으로 비하되고 있는 부분들, 사회적 분위기, 또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여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 교육을 강화하고, 성희롱, 성추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도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성차별적 편견들을 없애는 데는 긴 시간, 오랜 노력이 필요하겠단 생각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이 몸에 배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차별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당신 그것은 성차별이야 하고 말해주는 사람도 적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신이 성차별적 말이나 행위를 하고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도 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 이 책에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것이 꼭 남자만의 문제일까? 여성을 비하하는 말 또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일까?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들 역시, 그것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는 여성들도 알게모르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도 많다.

 

극단적인, 또는 올바른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 이 책에서 말한 이런 구분... 이건 유머라고 해야 하나?

 

근본주의 페미니즘은 곧 분노, 유머 감각 없음, 공격성, 확고부동한 원칙을 나타내며 적합한 페미니스트 여성이 되는 방법, 적어도 적합한 백인 이성애자 페미니스트가 되는 방식을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싫어하고 여성의 대상화는 무조건 매도하고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지 않고 남자를 미워하고 섹스를 싫어하고 일에만 열중하며 제모를 하지 않는다. (356-357쪽)

 

요즘은 이렇게 페미니스트를 규정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여기서 '나쁜'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간 말이 아니라, 이러한 페미니스트 규정에 따르지 않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다.

 

우리 말로 하면 '날라리' 페미니스트 정도 되겠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규칙대로 규정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것은 기계적 삶이다. 매뉴얼대로 입력과 출력이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그런 삶을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그때그때 자신의 처지에 맞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꼭 다리나 겨드랑이의 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지내야 한다는 말, 이것은 이 저자도 '나는 종종 가장 마지막 건을 농담으로 삼는다'(357쪽)고 했듯이,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쪽에서 하는 말이기 쉽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의 일들을 보고, 그 일들에 대한 글을 써서 발표를 한다. 그런 발표글들이 이 책에 묶여 있는데...

 

개인의 경험도 섞이고, 미국 사회의 문제도 섞이고, 페미니즘의 관점과 인종주의의 관점, 계급주의의 관점이 적절히 섞인 그야말로 자신만의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편견을 바라보는 글들이다.

 

여성차별주의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여성이 아님을 이 책에서는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상류층 백인 여성과 하류층 흑인 여성, 그리고 이주해온 동양, 라틴아메리카 여성이 그 사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아이티에서 이민온 흑인계의 후손으로서 흑인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일들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3부에 실린 "엔터테인먼트:인종과 젠더"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보여주고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흑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는 흑인문제를 주제로 다룬 영화들에서 흑인들을 표현하는 방법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는 것. 여전히 영화에서는 백인의 시선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흑인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여성이기에 또 흑인이기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음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은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지만, 이 때 여성은 개별적 여성이어야 함을, 그리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보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을 무시하고 원칙이라는 큰틀만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개성을 살리고,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여성이라는 성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나쁜'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것이다. 글들이 참 통쾌하다. 읽기도 수월하고. 특히 영화에 관한 평은 내가 참 감명깊었다고 생각하는 영화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짚어주어서 더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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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멀어지고, 사람과 자연이 멀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 서로 물고 뜯고 죽이고 헐뜯는 관계로 바뀌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잘해도 우주가 편안해질텐데, 주제넘은 행동들을 해서 우주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상태.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고... 세상에, 우주의 기운이 도와줄 수 있을 때는 자신의 일에 충실할 때, 내 이익이 아니라 우주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행동할 때.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이럴 때... 우주의 기운이 느껴질 수 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이런 가족 간의 관계가 사회로 확장이 될 때... 그 때 우주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문인수 시집에서 '쉬'라는 시를 읽으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 그리고 여기서야말로 우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식과 부모 간의 관계를 조용히 지켜보는 우주.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문학동네. 2006년 초판. 14쪽.

 

마음이 편하지 않은 지금... 이 시를 읽으며 조금의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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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0 0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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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0 0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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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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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이렇게 영어로 표기를 하면 누구의 운동화인지 모른다. 그 시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L'. 그는 바로 '이한열'이다. 87민주화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최루탄에 희생된 학생. 86학번이라고 한다. 대학에 들어온 지 갓 일년이 지난 나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앞장서야만 했던 나이. 그렇게 당시의 학생들은 소위 386세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부연 최루탄이 일상생활이던 87년. 하지만 이 소설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운동화 이야기다. 낡아가는 이한열의 운동화.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이야기.

 

운동화 복원은 곧 이한열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고, 87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이한열의 운동화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국민의 힘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누더기가 되고, 사그라져버릴 것처럼 낡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 눈 앞에 있어야 한다. 늘 기억하라고. 그 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소설에서 복원가인 주인공은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데... 생명이 죽어가는 냄새를 맡게 된다.

 

그냥 놓아두거나 복원하지 못했을 경우 마치 생명체가 썩어가듯이 썩어가고 있는 운동화. 그런 냄새는 바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하나 운동화를 복원해 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냄새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서서히 표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내부로부터는 서서히 변화가 있겠지만, 변화는 어느 순간 확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이 소설에서 썩어가는 냄새가 어느 순간 사라졌듯이.

 

복원이 완성되어 가는 지점에서 냄새는 사라지고 만다. 냄새의 사라짐과 운동화의 복원. 썩어가는 민주주의의 회복...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우리가 잊고 있었던 87년 정신을 다시 되살리는 것 아닌가? 서서히 곪아가서 썩어가고 있었는데, 냄새가 우리나라 곳곳에 넘실대고 있었는데,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마치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듯이.

 

관심이 없으면 냄새조차 맡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까지 그 냄새를 무시하면 안 되지 않나. 어떻게든 냄새를 의식하면서 행동을 해야 한다.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정신을 살리는 것이고, 그 때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다시 우리에게 되살려 오게 하는 것, L의 운동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단지 운동화의 복원 얘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또는 잊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어쩌면 억지로, 이 소설의 또다른 인물은 이소연이라는 여인이 왼발과 오른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겨 아이를 집까지 억지로 끌고 왔듯이, 그렇게 87년 정신을 어거지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우리는 광장에 서게 되었는데... 신발의 짝이 맞지 않았음을,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었음을, L의 운동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비록 짝을 완전하게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L의 운동화 복원을 통해 87년 정신만은 잊지 않고, 계승해가고 있음을... 광장에 다시 서는 사람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87년 광장의 한 복판에서 주인을 잃었던 L의 운동화, 이제 다시 그 운동화들이 광장에서 주인을 찾아 함께 걷고 있다. 이 나라 곳곳을... 민주주의의 함성을 울리며.

 

L의 운동화. 지금 여기 다시 복원되어 우리들 발에 있다. 그렇게 L의 운동화는 우리와 함께 한다.

 

이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 요즘의 상황과 너무도 잘 맞는다. 우리가 다시 87년을 재현하게 될 줄이야. 다시 이렇게 L의 운동화처럼 끈을 단단하게 조여매게 될 줄이야. 아마 우리는 L의 운동화를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29년 전 87년 광장으로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2016년 광장으로 나를 불러내고 있다. 우리를 불러내고 있다. L의 운동화 복원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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