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 소설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소설로 보기가 참 힘들다. 짧은 글들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짧은 글들을 꿰고 있는 소재는 바로 '희다'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은 '흰' 것들에 대한 단상.

 

'나, 그녀, 모든 흰'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다보면 이어지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흰'이 밝음 보다는 어둠 쪽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보통 '흰'은 밝은, 깨끗한, 순수한, 맑은, 가벼운 등등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소설에서는 영어 제목부터가 '어두운, 무거운, 슬픈' 등등의 느낌이 나게 한다. 영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The Elegy of Whiteness'다.

 

엘레지(Elegy), 사전을 찾아보면 '비가(悲歌)'라고 나온다. 슬픔의 노래라는 뜻이다. 흰이 비가라니... 그렇다. '흰'은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1부인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이 '나'는 부재의 나다. 없는 나다.

 

바로 나자마자 세상을 뜬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다시 아이로 간다. 결국 없음에서 시작에 없음으로 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없음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있음으로 만들지만, 그 있음 역시 없음 속에 존재하게 된다.

 

'흰'은 다양한 색채들과 함께 존재하지만 그 색채들을 다시 '흰'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굳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게 있는 수많은 색채들은 바로 '흰'을 바탕으로 한다. '흰'을 바탕으로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흰'으로 돌아간다.

 

'흰'을 우리는 거부할 수가 없다. 세상에 나온 아이가 처음으로 보는 것은 '흰'일 것이다. 빛... 세상의 빛, 그 다음 아이는 '흰'것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다. '배내옷'이다. 이렇게 자신을 감싼 것에서 이제 새로운 '흰'이 나온다.

 

바로 엄마의 젖이다. 젖으로 아이는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젖은 외부에서 온다. 자신의 '흰'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때 나오는 '흰'이 바로 이다. 우리 삶을 유지시켜줄, 음식을 씹을 수 있게 해주는.

 

그러다 다시 '흰'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는 처음에 왔던 없음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검었던 머리가 하얘지고, '흰'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때... 이제는 다시 한 줌의 재가 될 준비를 한다. 나중에 이 재조차도 없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텅 빈 흰으로.

 

'없음'에서 태어나 다시 '없음'으로 가는 길, 이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흰'들을 만난다. 짧은 글들 속에 온갖 '흰'들이 나오지만 이 '흰들'은 바로 우리 삶이다. 

 

하여 소설 속에서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흰'으로부터 우리는 삶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보게 된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고, 이 글들이 작가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만, 그 슬픔으로 해서 '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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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생기면 그것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재개, 중단에 대한 시민참여단 공론조사 결과를 보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원전이 생기기 전에 공사를 했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미 건설 중인 원전에 대한 공사 중단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론조사위 결과가 어제(20일) 발표되었다. 오늘자 한겨레신문에 의하면 1차 시민참여단 의견조사를 했을 때, 재개 36.6% 중단 27.6% 판단 유보 35.8%였는데, 최종결과를 살펴보면 재개 59.5% 중단 40.5%로 공사재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판단을 유보했던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공사 재개 쪽으로 자신의 의견을 바꾸었다는 얘긴데... 그만큼 이미 실시되었던 것을 없애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원자력발전이라는 말을 핵발전이라는 말로 하고, 핵발전이 인류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시민참여단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재개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 더 가타부타 말할 필요는 없고, 정부에서도 공론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으니 원자력 발전소 두 기에 대한 공사는 곧 재개될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그래도 탈핵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 공론화위원회에서 다룬 핵발전 정책 방향에 대한 선호 의견 추이를 들고 있다.

 

1차에서는 핵발전 축소 45.6% 유지 32.8% 확대 14.0% 잘 모르겠음 7.5%였는데... 최종결과로 핵발전 축소 53.2% 유지 35.5% 확대 9.7% 잘 모르겠음 1.6%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핵발전 확대와 잘 모르겠음이라는 의견을 냈던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핵발전 축소 쪽으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미 건설하고 있던 핵발전소는 계속 건설하되, 더이상 핵발전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신고리5,6호기 건설 재개를 하겠지만, 더이상의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지 않을 명분을 얻었고, 그것도 사회적 갈등 상황을 시민들의 의견을 통해서 결정을 했으니, 일종의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핵발전이 아닌 다른 발전에 대한 정책을 펼칠 수 있고, 또 그쪽으로 연구를 하도록 지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록 기존에 있던 것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좋은 쪽으로 움직인 공론화위원회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렇게 한번 만들어진 것은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도 쉽게 없앨 수가 없으니, 만들어지기 전에 공론화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 한다.

 

정부가,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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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1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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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한다. 한때 하늘의 절반이라고까지 외쳤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받는 존재였다.

 

  함께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을 집 안이라는 공간에 가둬놓고 사회 생활을 못하게 한 적도 있었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투표권을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주 먼 미래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다. 여성들에게 참정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0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녔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반이라고까지 주장했음에도 그러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더욱 힘든 일이 우리에게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성 말고, 사회적인 성, 또는 자신이 선택한 성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들이 쏟아지고 있다.

 

세상에 두 성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상에는 한 성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한다. 한쪽을 완전히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여기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존중이란 없다. 오로지 제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혐오사회가 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청문회장에서 기껏 질문한다는 것이 '동성애를 찬성하냐?'는 것이고, 여기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교사에게 비난을 쏟아붓는 일도 생기고 있으니, 다름이 인정되고 있지 않은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 아닐까 한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종북'이 아니라 '동성애'가 사람을 배제하는 말이 되었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학교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서는 정말로 철저하게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다. 획일성만이 학교의 존재이유라는 듯이 학교에서는 무조건 동일성을 강요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 조금이라도 교복을 줄이거나 박음질을 하거나 하면 가차없이 벌점이나 처벌을 하는 학교들!!! - 같은 교과서로,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배우는 학생들.

 

이들에게 다름은 없다. 다름은 튄다는 것이고, 튄다는 것은 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10년이 넘는 기간을 동일성, 획일성 속에서 지내다 보니, 다름은 멀리해야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몸에 배게 된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또 한 번 이 다름이 문제가 되는 현실에 맞부딪힌다. 다름은 곧 배제다. 군대에서는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것을 몸으로 철저히 익힌다. 마음 속 깊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는 생각이 박힌다.

 

그렇다. 공존의 기술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교육기관에서 기를 쓰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교육은 문화, 사회, 정신의 재생산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들레 113호에서 다른 이번 호의 특집 제목은 '공존의 기술, 젠더 감수성'이다. 세상이 두 성으로만 나누어져 있어도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두 성보다 많은 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금,  세상을 여전히 두 성으로만 가두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있다.

 

젠더 감수성에 대해서 언제 우리가 교육받았던가.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남학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남교사 이야기도 이번 호에 실려 있으니, 우리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민들레가 이런 바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만하다. 이번 호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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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이 보이는 창 112호"(2017년 가을)를 읽다.

 

이번 호에는 주로 '노동'과 '임금'에 관한 글이 실렸다. 우리는 과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있을까 하는 생각.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에 걸쳐 만원이 되게 하겠단다. 그래도 올해 최저임금은 많이 올랐다고 하는데(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한다), 여전히 만원이 되기에는 멀다.

 

내년에 과연 최저임금이 더 오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부정적인 답이 나올 것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저임금을 올려서 내수를 진작시키고, 이를 경제가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데, 내수도 늘지 않고 생산력도 향상되지 않으면 자본은 이익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임금을 올리려는데 저항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자본가들과 보수 정당들이 한 목소리를 낼 거라는 예상(한지원, 최저임금의 경제)

 

그런데 최저임금을 꼭 노동의 대가로 생각해야 할까? 노동력의 대가로 생각해야 하지 않나, 또한 경제가 성장하지 않음에도 최저임금을 인상하라는 요구는 그동안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던 이익을 재구성하자는 요구가 아닐까? (김도현, 노동과 임금의 재구성, 제갈현숙, 여성노동력의 대가로서 최저임금 인상)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최저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아니 한 사람이 최소한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소득, 사회의 책임, 사회 구성원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생각할 것이 이번 호에 실린 박경미의 글이다. 성서의 관점에서, 또 예수의 관점에서 본 최저임금이다. (박경미, '하느님나라'와 노동)

 

생각할 것이 많은 글인데...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작은 제목을 단 글을 보면 노동과 임금에 대해서 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가 수치로 계량화하여 임금을 지급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질문...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동등하게 1데나리온을 받았다. 주인은 자신이 자비롭다고 했는데... 이 자비는 하루 종일 일하고도 같은 돈을 받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 예수가 꿈꾼 세상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나눌 수 있는 것.

 

하여 내 생활만큼 다른 사람의 생활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노동으로 인한 임금이라는 것. 지금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많은 임금 격차가 있고,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가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임금 차이가 있는데...

 

이런 기계적인 노동생산성의 차이가 아니라 노동을 통한 생활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서로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하루 종일 장터에서 누가 자신을 사주기만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 오늘도 식구들이 끼니를 거를 생각을 하며 힘없이 돌아서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자기를 불러주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자비이자 은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의 선함, 자비로움은 먼저 일한 사람이 자기도 1데나리온을 받는 것으로 만족 할 수 있어야만 실현 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과 나중 일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기계적인 평등주의에 대항하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의 위계질서, 인간의 위계질서를 뒤집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삶이 보이는 창 11호. 74-75쪽)

 

이번 호가 '노동과 임금'을 특집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공동체가 살 수 있는 길, 그것은 내것과 네것을 엄격하게 나누고, 시간으로 나눠서 이익을 가져가는 그런 행위들이 아니라, 삶을 중심에 놓고, 서로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면 '기본소득'으로 갈 수 있다. 결국 기본소득은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의 이익 배분인 것이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살기 힘들다. 청년들도 힘들다. 학생들도 힘들다. 이렇게 서로 힘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고 함께 천천히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아마도 최저임금(이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소득이라고 해야 한다)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만원은 되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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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9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10-1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라는 말이 큰 울림을 주네요..

kinye91 2017-10-20 08:16   좋아요 0 | URL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이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며 더불어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밥, 다름을 통한 하나됨


흰쌀, 현미, 보리, 콩, 조,

하다못해 은행까지……

한 통에 섞인

부대낌.


물을 붓고는

문질러 대는

손, 손놀림……

부대끼는 알갱이들.


아야, 왜 이래?

가! 저리 가!

몸부림칠수록

더 부딪히는 몸들.


부딪혀,

껍데기가 사라지고

뜨거운 불길에

끈끈하게 묶이는

알갱이들,

밥,

영양분들.


다 달라,

다름을 지닌 채

하나가 된

우리 하늘,

우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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