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한다. 한때 하늘의 절반이라고까지 외쳤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받는 존재였다.
함께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을 집 안이라는 공간에 가둬놓고 사회 생활을 못하게 한 적도 있었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투표권을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주 먼 미래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다. 여성들에게 참정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0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녔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반이라고까지 주장했음에도 그러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더욱 힘든 일이 우리에게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성 말고, 사회적인 성, 또는 자신이 선택한 성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들이 쏟아지고 있다.
세상에 두 성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상에는 한 성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한다. 한쪽을 완전히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여기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존중이란 없다. 오로지 제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혐오사회가 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청문회장에서 기껏 질문한다는 것이 '동성애를 찬성하냐?'는 것이고, 여기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교사에게 비난을 쏟아붓는 일도 생기고 있으니, 다름이 인정되고 있지 않은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 아닐까 한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종북'이 아니라 '동성애'가 사람을 배제하는 말이 되었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학교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서는 정말로 철저하게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다. 획일성만이 학교의 존재이유라는 듯이 학교에서는 무조건 동일성을 강요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 조금이라도 교복을 줄이거나 박음질을 하거나 하면 가차없이 벌점이나 처벌을 하는 학교들!!! - 같은 교과서로,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배우는 학생들.
이들에게 다름은 없다. 다름은 튄다는 것이고, 튄다는 것은 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10년이 넘는 기간을 동일성, 획일성 속에서 지내다 보니, 다름은 멀리해야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몸에 배게 된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또 한 번 이 다름이 문제가 되는 현실에 맞부딪힌다. 다름은 곧 배제다. 군대에서는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것을 몸으로 철저히 익힌다. 마음 속 깊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는 생각이 박힌다.
그렇다. 공존의 기술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교육기관에서 기를 쓰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교육은 문화, 사회, 정신의 재생산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들레 113호에서 다른 이번 호의 특집 제목은 '공존의 기술, 젠더 감수성'이다. 세상이 두 성으로만 나누어져 있어도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두 성보다 많은 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금, 세상을 여전히 두 성으로만 가두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있다.
젠더 감수성에 대해서 언제 우리가 교육받았던가.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남학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남교사 이야기도 이번 호에 실려 있으니, 우리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민들레가 이런 바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만하다. 이번 호 역시.